| [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 날 짜 (Date): 1998년 7월 3일 금요일 오후 05시 54분 17초 제 목(Title): 노르망디 전선의 종결 - 36 (3) 팔레즈 포위전 8월 5일, 제3군 예하의 미 제15군단은 '웨이드. H. 하이슬림'소장의 지휘아래 퐁트볼을 거쳐 남동쪽의 '마엔느'와 '라발'을 향해 맹진격을 계속했다. 이것은 몽고메리 원수가 "상륙 이튿날, 혹은 늦어도 3일 뒤까지는" 해결해야 한다고 공언했던 계힉이 그로부터 두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실현되고 있는 셈이었고, 또 그것은 몽고메리가 가장 싫어했던 미국 장군 - 패튼 - 에 의해 이루어질 참이었다. 제3군의 맹진격에 의해 독일군은 영 달갑잖은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고, 그것은 어느 쪽이든 전면적인 파국을 의미하고 있었다. 즉, 독일군의 잔존부대가 모조리 집결해 있는 팔레즈 지구로부터 병력을 빼내어 패튼에 의해 뚫려버린 아브랑슈 지구를 메우게 되면 독일군은 최후의 거점이라고나 할 팔레즈 일대를 송두리째 내어주는 결과가 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다보면 바로 그 미군 제15사단군단에 의해 후방을 차단당하고 고립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서부유럽 총사령관 크뤼게 원수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에 하이슬립의 전차대는 사흘동안 120km를 주파하여 '르망'에 도착했고, 이로써 연합군은 독일군의 제5장갑군과 제7군의 2개군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아직도 '절묘한 막판 뒤집기'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만일 포위된 독일군이 비교적 포위망이 취약한 '모르탱'방면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서 아브랑슈를 탈환한다면 독일군의 배후로 우회해온 제15군단을 거꾸로 고립시킬 수 있으며, 연합군을 '좁은 울타리' 안에다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매두었던 지난 두달과 같은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아닌게 아니라 지도상으로만 보자면 그것은 유일하고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선택이기도 했다. 크뤼게 원수는 모험을 싫어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반격작전이라기보다는 호랑이 아가리와 같은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업이었으므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위해 파드깔레와 남프랑스에 주둔해 있던 몇 개의 예비사단을 빼내 아브랑슈로 급파해 주겠다는 히틀러의 보기드문 배려에 용기를 얻을 크뤼게가 최후의 반격이 나서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석달여에 걸친 노르망디의 혈전에서도 그 대미를 장식하게되는 팔레즈 포위전이다. 포위망을 뚫기위한 독일군의 반격은 아브랑슈 동쪽의 '모르탱'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비록 전차가 몇대 남지않아 '위풍당당한 것은 이름뿐'이라고는 하지만, 4개의 기갑사단이 그 선봉에 섰다. 미 제30보병사단의 장병들이 귀에 익은 아군전차와 좀 다른 전차의 엔진소음을 들은 것은 8월 6일 자정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미군 포병대는 그 소리를 목표로 캄캄한 어둠속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지만, 제120보병연대가 지키고 있던 317고지는 순식간에 독일군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모르탱읍의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이 고지는 주변의 모든 지형을 한 눈에 관측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으로 인해 독일군의 최우선 공격목표가 되었던 것이고, 그 꼭대기에 배치되어 있던 제2대대는 이제 독일군에 포위되어 '행방불명 대대'가 되고 말았다. 밤 사이에 독일군은 모르탱에서 아브랑슈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6km쯤 전진했지만, 날이 밝자 전차를 모두 길옆에다 정지시키고 위장망 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다시피 노르망디의 하늘은 온통 연합군의 공군기로 뒤덮혀 있고, 그런 상태에서 도로를 따라 전차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8월 7일에는 오전내내 짙은 안개가 끼일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있었으므로 그걸 믿고 행동을 개시했던 것인데, 정작 날이 밝고 보니 야속하게도 안개는 커녕 햇볓만 쨍쨍한 여름날의 아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밝자마자 미군의 P-47 썬더볼트와 P38 라이트닝, 그리고 영국군의 타이푼, 허리케인 같은 '야보'들이 굉음을 울리며 몰려왔고, 독일군의 전차들은 엄폐물 하나없는 캉-팔레즈 가도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기총소사와 폭격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야보의 공습은 정말 견딜 수 없도록 지긋지긋하고 집요했다. 8월 7일 하룻동안 우리는 한발도 전진하지 못한채 완전히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다." 발레브로카쥬 전투에서 단신으로 영국군의 캉 포위작전을 무산시켜 버린 바 있는 무장 친위대의 전차 격파왕이며, 전 독일군을 통털어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일컬어지던 미하일 비트만 대위가 전사흔 것은 이날 오전 10시경이었다. 북쪽에서 팔레즈를 향해 물밀듯이 압박해 들어오는 캐나다군의 전차대를 전지하라는 임무를 띠고 출격한 독일전차는 비트만 자신이 탑승한 '파이거'전차를 포함하여 단 3대 뿐이었으니, 이 무렵 독일군이 처해있던 전차부족의 심각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비트만의 전차는 2대의 영국군 파이어 플라이 전차로부터 협격을 받아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 전설적인 젊은 영웅도 마침내 다른 승무원 전원과 함께 그 화려했던 운명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흡사 장차 독일군 전체가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불길하게 예고해 주는 듯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빗발치는 휘하 사단장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크뤼게는 작전의 중지와 철수허가를 총통에게 요청했지만, 히틀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무슨 소리냐? 작전중지는 곧 그 자리에서 앉아서 죽겠다는 뜻이란 걸 모르는가? 더욱 공세를 강화하여 반드시 아브랑슈를 탈환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완전히 포위되어 보급선이 절단된 독일군이 팔레즈 부근에 그냥 웅크리고 앉아 있어도 어차피 고사(故死)당하기는 마찬가지이고,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부질없는 반격을 시도하는 것 역시 독일 제7군 참모장 '루돌프 겔스도르프'소장의 표현대로 "어서 콱 졸라 주십사고 올가미 속으로 목을 들이미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전투는 8월 8일에도 종일토록 계속되었지만 전선은 꼼짝도 않은채 그 자리에 얼어 붙었고, 양측 모두 피해가 막심했지만, 아무래도 더 빠른 손실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의 원군을 전혀 기대할 수 없던 독일군 쪽이었다. 그리고 이 사흘간의 전투에서 그 어느 연합군 부대보다도 뛰어난 용기를 과시한 것은 모르탱의 317고지에 고립된 '행방불명 대대'였다. 이들은 이미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튿날 - 8월 7일 - 아침에 탄약을 완전히 소진해버린 상태였지만, C-47 수송기가 독일군의 대공포화를 무릅쓰고 투하해준 약간의 탄약과 보급품만으로 굳세게 버티고 있었다. 독일군은 두번이나 백기를 든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지만 그들은 이것을 거부했다. "웃기지 마라! 독안에 든 쥐 신세는 우리가 아니라 너희ㅣ들이다. 우린 작은 곳에 갇혀 있지만, 너희들 역시 좀더 넓은 곳에 갇혀 있다는 것 몰라?" 8월 11일, 마침내 크뤼게 원수는 히틀러의 엄명을 무시하고 반격작전을 중단을 것을 결심했다. 317고지를 둘러싸고 있던 독일군이 철수하자 완전히 탈진해 버린 '행방불명 대대'의 생존자 370명이 고지로부터 비틀비틀 걸어 내려왔고, 연합군 병사들은 열렬한 박수로써 이 뛰어난 감투정신을 보여준 전우들을 환영했다. 독일군의 집중공격을 뒤집어 썼던 이 대대는 정수의 절반에 가까운 3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고지 정상에서 닷새동안이나 끈질기게 버티면서 주변에서 벌어지는 독일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관찰하여 일일이 보고해 주었던 덕분에 연합군의 항공기와 화포는 약 100대 이상의 전차를 포함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독일군에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하이슬립이 이끄는 제3군의 전차들은 르망을 함락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알랑송'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북쪽에서 남하하고 있는 캐나다군과 합류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양군이 연결되면 약 10만명의 독일군은 그야말로 완벽한 올가미 속에 걸려들 참이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브래들리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3군은 진격을 중지하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국군과 캐나다군의 남하를 기다리라." 당연히 패튼은 노발대발했다. "뭐 이따위 명령이 다 있어? 이건 이미 다 쳐놓은 올가미 한쪽을 끊어주라는 얘기가 아닌가? 독일놈들이 우리 코앞을 지나서 빠져 나가는 꼴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으만 만일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브래들리도 완강해서, 패튼의 공공연한 항명을 전혀 용납하지 않을 기세였다. 이때 브래들리가 내린 명령은 분명히 상식밖의 것이었고, 브래들리는 훗날 이 결정이 "미군과 캐나다군이 정면으로 마주쳐 오입접전이 벌어지는 위험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무척이나 궁색한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험담가들 중에는 "이 전투를 통해 패튼이 다시 한번 영웅으로 부각되는 것을 원치않았던 브래들리가 패튼의 밥상에다 재를 뿌린 것"이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하지만 패튼이 그것을 달가와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이 무렵 패튼의 제3군은 명백히 브래들리의 제12집단군 예하에 속해 있었으므로 제3군의 전공은 그대로 브래들리의 전공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설명은 패튼과 브래들리라는 생판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의 신경전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속모르는 사담를의 헛소리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 무렵 브래들리가 내심 가능한한 미군의 희생을 줄이려고 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그는 이미 다 이겨놓은 싸움에서 미군에 할당된 지역인지, 아니면 영국군에 할당된 지역인지도 애매한 '독일군의 소굴' 깊숙히 부대를 밀어넣으면서까지 싸움을 가로맡고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그의 조심스런 성격으로 볼때 잔뜩 독이 오른 독일군의 대부대가 버티고 있는 팔레즈에서 '목뼈가 부러질지도 모르는 모험'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여간 이처럼 브래들리가 회피해 버린 '마무리'는 자연히 싸움 좋아하는 몽고메리가 가로맡고 나서게 되어 있었다. -------------------------------------------------------------------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