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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
날 짜 (Date): 1998년 6월  3일 수요일 오전 11시 03분 50초
제 목(Title): 노르망디 공폭작전 - 35 (1)


셀부르 함락
6월 중순이 지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럽은 겨울이 우기로써 여름철에는 보통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1944년의 여름에는 이례적으로 6월부터 7월 중순까지 거의 한달이상 매일 같이 
얼음처럼 찬 비가 쏟아져 내렸다.
성벽처럼 견고한 생나무 울타리에 가로막히고 수렁으로 변한 들판 한가운데 발목이 
빠져버린 연합군의 진격은 지지부지하기만 했고, 벽돌더미 아래에 파묻힌 채로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영국군은 여전히 캉을 중심으로 완강한 방어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독일군에 발목이 
잡혀 있었고, 셀부르항구를 점령한다는 임무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미군의 
사장은 더욱 막막하기만 했다.
몽고메리는 점차 거세지기 시작하는 연합군 총사령부의 책임추궁에 대하여 "미군이 
아직도 셀부르를 점령하지 못함에 따라 오직 노르망디 항구를 통해 들어오고 있는 
포탄과 실탄, 군수물자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이 말은 미 제1군 사령관 오마 브래들리 장군의 자존심을 적지않게 긁어놓았지만, 
그것도 분명 큰 요인중에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브래들리는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는 미군을 향해 다시한번 혼신의 힘을 쥐어짠 
총공세를 명령했고, '로턴 콜린즈'소장이 이끄는 제7군단이 이 중책을 맡게 되었다.
6월 14일 아침.
'카랑탕'을 출발한 제82공수사단과 제9보병사단이 선봉에 서서 용약진격을 
개시했지만, 코탕탱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는 이들의 행진은 한마디로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
연일 쏟아져 내리는 폭우에다 독일군이 최근에 이 부근의 댐을 파괴하여 
코탕탱반도 일대를 완전히 수몰(水沒)시켜 버렸고, 이처럼 물바다로 변해버린 넓은 
벌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외줄기의 독길을 따라 전진하는 그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더없이 뚜렷한 사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포탄이 작렬하면 병사들은 모두 길 양편의 물속으로 뛰어 들어 몸을 
숨겨야 했고, 특히 이 무렵에 와서는 D데이 전날 밤 낙하산으로 투입된 이래 잠시 
숨돌릴 틈도 없이 격전을 계속해 온 공수부대 장병들은 거의 피로의 극한 까지 
내몰려 있었다.
아무리 잘 훈련된 정예부대라 할지라도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며, 그 어떤 
고통보다도 이겨내기 힘든 것이 바로 수면부족의 고통이다.
포탄이 터지거나, 드물게 독일 공군기가 공습을 가해 올 때마다 둑비탈에 몸을 
숨긴 공수부대원들은 그대로 잠이 떨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독일군의 기총소사가 자신으로부터 불과 30~40cm 떨어진 곳의 흙을 파뒤집어도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 병사들은 깨어나지 않았고, 한바탕의 공젹이 자니가고 나면 
지휘관들은 진창속에 즐비하게 널부러진 부하들 중에서 잠에 떨어진 병사와 
전사자를 구분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폭발하는 포탄의 충격으로 길가의 물구덩이 속으로 내팽겨쳐진 
병사들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에 잠긴 채로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지경이었으므로, 도저히 이들을 더이상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무리라고 결론을 
내린 콜린즈 장군은 이들을 후방으로 돌려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으로, 보병 
제2사단과 79사단으로 그 자리를 메우는 부대재편을 단행했다.

히틀러는 연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셀푸르를 사수하라'는 추상같은 
명령을 내려 보내고 있었지만, '칼 빌헬름 폰 쉴리벤'중장이 이끄는 25,000여명의 
독일군 수비대 역시 형편이 이런 미군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아다시피 셀부르는 코탕탱반도 최북단의 항구도시이므로 더이상 도망칠 곳조차 
없는 그들은 처음부터 그곳에서 전멸하든가, 항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중 30% 이상은 독일인이 아니라 폴란드,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징집해 온 외국인들이었고, 심지어는 다수의 해군 수병들과 '대서양 방벽'공사에 
동원되고 있던 노무자들, 그리고 프랑스인 경찰관까지 섞여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들의 전투의지는 처음부터 낮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초급 지휘관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판이었다.
"내 중대원 전원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작전지시를 내리자면 최소한 3개국어를 
구사해야만 한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더라도 절대로 놈들은 믿으면 안된다. 그 
녀석들이 언제 총구를 미군이 아니라 내 등뒤에다 겨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유한 전차는 대부분 1940년대에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한 R-35나 
S-35같은 구식뿐이었고 탄약과 식량 같은 필수적인 물자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침내 히틀러도 이런 사정을 감안했음인지, 6월 20일에는 그간의 명령을 이렇게 
수정했다.
"셀부르의 사수가 불가능하다면 항구가 아니라 완전한 폐허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이 귀관들의 임무다. 셀부르를 철저히 파괴하고 그 자리에는 한 명의 적군이라도 
더 사살하는 것으로 작전목표를 수정한다."

6월 22일, 힘겨운 전진을 계속하던 미군은 마침내 셀부르시 남쪽 외곽에 건설된 
독일군의 요새선에 도달했다.
히틀러의 이른바 '대서양 방벽'은 미도 내륙에서 북쪽 해안을 향해 건설된데 비해 
이례적으로 도시남쪽을 감싸는 형태의 길이 10km 남짓한 이 요새선은 흡사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측하고 건설된 것처럼 보였고, 보병부대를 이런 요새의 정면으로 
몰아넣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전술상의 상식이다.
콜린즈 장군의 해법은 당연히 하늘로부터의 공격이었고, 계속되는 악천후속에서도 
전투기편대가 발진할 수 있을 만큼 잠깐씩 개이는 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군은 폴란드, 프랑스, 독일어의 3개 국어로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의 통첩을 
내보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전원ㅇ디 항복하고 걸어 나오지 않으면 그 이후에는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미군보다도 히틀러의 명령이 더 무서웠던 독일군이 순순히 항복할 턱이 
없었다.
최후통첩이 시한을 넘긴 6월 22일 오후, 20파운드 로켓탄으로 무장한 
'타이푼'전투기를 비롯한 500여대의 연합군 전투기가 독일군의 요새에다 공습을 
감행했다.
한 시간 가량 계속된 이런 공습만큼 보기에 멋진 것도 없지만, 공습으로 요새속에 
틀어박힌 적을 깨끗이 섬멸할 수 있었던 전례가 한번도 없다는 것은 과거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바 그대로다.
이튿날인 6월 23일 아침, 미군의 3개 보병사단이 전진을 재개했을 때 독일군은 
치열한 탄막사격으로 그들은 마중했고, 참호와 고지 하나하나를 점령하고 독일군을 
소탕하는 일은 결국 보병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6월 25일, 독일군의 방어거점 중에서도 가장 견고한 '포트 드 룰' 요새가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벼랑꼭대기로 기어 올라간 M10구축전차들이 시내를 향해 포탄을 
퍼붓는 지경이 되었으므로 이제 누가 보더라도 셀부르의 함락은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쉴리벤은 항복을 승인해 줄 것을 재차 상신했지만 히틀러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요청을 기각한다. 적을 격퇴시킬 수 없다면 항구가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폐허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이 귀관들의 임무다"
독일군 포로를 심문한 미군은 쉴리벤 중장이 최일선의 지휘소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지휘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다.
한차례의 의례적인 항복권유 방송이 있고나서 구축전차의 90mm주포가 일제히 
터널입구를 향해 집중포격을 시작했다.
이런 포격이 30분정도 계속되자 마침내 지욱한 초연속에서 쉴리벤 장군과 그의 
참모들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낯선 프랑스 땅에서 죽어야 할 사명감도, 
명분도 없던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독일군의 한계가 순식간에 들어나고 
말았다 - 셀부르 독일군 병력이 속속 투항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6월 30일, 미군은 비록 예정보다 3주일 가량 늦었지만 마침내 셀부르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광경은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독일군 수비대는 히틀러의 마지막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지난 며칠동안 
'발터 헤네케' 제독이 지휘하는 독일해군의 폭파반이 셀부르 항구를 완전히 파괴해 
놓었던 것이다.
도저히 조각배 한 척조차 갖다 댈수 없을만큼 철저하게 파괴된 항만시설을 
복구하고 부근 해역에 빈틈없이 부설된 기뢰를 모두 제거하는 복구작업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고, 시내의 민가에까지 설치된 수많은 
위장폭발물 - 부비트랩 - 은 그것을 설치한 독일군 포로 스스로 해체하도록 
동원해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항만에 가라앉혀 놓은 폐선안에는 최소한 48시간, 혹은 그 이상이 경과한 뒤에야 
폭발하도록 교묘하게 세팅해 놓은 시한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복구작업을 하던 
해군 공병대원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사고가 속출했고, 그것을 설치했던 독일군 
자신조차 손을 댈 수 없는 부비트랩이 많았기 때문에 이 셀부르시는 피난갰던 
시민들이 돌아온 뒤에도 이처럼 계속되는 크고 작은 폭발사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면서 복구작업은 강행되었고, 예정대로 보급물자를 실은 
최초의 연합군 수송선이 셀부르항에 입항에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7월 1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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