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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3월11일(수) 16시20분25초 ROK
제 목(Title): 절대군구, 칼을 뽑다! 29 - (4)


양키들이 왔다!
1943년 12월, 마침내 다가올 대륙진공작전을 지휘할 사령관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줄곧 미국과의 관계에서 뻔뻔스러워 보일만큼 당당한 태도를 취해왔던 처어칠 
수상은 내님 이 역사적 과업을 수행할 인물은 당연히 영국군에서 나와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육군 참모총장 '브룩'장국에게 이미 그 자리를 약속해 놓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이 작전의 '돈줄'을 대는 것은 미국이었고, 그만한 돈을 내놓는 쪽에서도 
당연히 그에 걸맞는 대접을 요구할 수 있다는게 순리에도 맞는 일이다.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마땅히 미군 참모총잔 '마샬'원수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를 곁에서 놓아주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전혀 의외의 인물이 그 자리에 보임되었다.
그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언론에조차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드와이트. D. 아이젠 하워'대장이 예의 그 "20개사단 이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하는 온화한 미소를 흘리면서 영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패튼'과 같은 강인한 투사형의 야전 지휘관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다고 해서 롬멜과 같은 군사적 직관력이 번득이는 천재형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각양각색의 의견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또한 이것은 오버로드 작전이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바로 그런 재능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는 부임과 동시에 그의 타고난 중재자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이를테면 자신을 보좌할 부사령관으로 영국공군 참모총장 '아더 
테드'경을 임명하는 것을 비롯하여, 이 작전에서 실무를 담당할 야전 지휘관들을 
모두 영국군 장군들로 임명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영국해군 참모총장 '버트램 램지'제독이 작전에 동원되는 영,미 양국의 해군 
전체를 지휘할 연합해군 사령관에 임명되는 한편, 항공지원을 담당할 연합공군의 
지휘는 영국 공군 참모총장 '리 말로리' 대장에게 돌아갔다.
그는 모건중장과 그의 참모들이 완성시켜 놓은 상륙작전의 초안을 '완벽하다'고 
한바탕 추켜 세운 뒤에 모건 장군을 이 작전의 작전참모로 유임시킴으로서 그 
공로를 치하했다 ( 실제로 모건의 '코삭'팀이 초안해낸 이 작전의 개요는 상륙 
주정의 생산이 늦어지는 바람에 한달여가 지연되었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정없이 그대로 채택되었다)
영,미 양군의 지휘관들과 정치가들이 다소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은 실제 
상륙부대를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에 첫발을 내딛게 될 지상군 사령관이었다.
무릇 모든 전투행위는 후방에서 그것을 계획했던 고위급 지휘관들보다는 실제로 
총탄이 날아 다니는 전선에서 장병들과 고락을 함께한 야전 지휘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맞추어지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이 자리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과 영광이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직책이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아프리카 전선에서부터 탁월한 능력을 입증해 온 '애롤드 
알렉산더' 영국군 대장을 이 자리에 앉히고 싶어했지만,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한발도 뺄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이 자리는 오래전부터 누구보다도 간절히 
이 일을 맡고 싶어 하던 한 인물에게 돌아갔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제8군을 이끌고 엘 알라메인의 대승리를 이끌어 냄으로써, 전 
영국국민의 우상이 되어있던 '몽고메리' 중장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몽고메리의 자기중심적이고 까닭 없이 미군울 얕보는 버릇을 잘 알고 있던 미군 
지휘관들은 이 인선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표시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몬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성격의 일단은 작전 기간내내 영,미군간의 크고 작은 불협화음과 심심치 않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는 요인이 된다.

양키들이 왔다!
아무도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킹즈 크로스'역 앞에서 신문팔이를 하는 
소년들까지도 곧 대규모의 유럽본토 진공작전이 눈앞으로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런던 도심의 '피카딜리' 광장으로부터 남부 잉글랜드의 시골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어디를 가나 '양키' 병사들이 흘러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4년 2월까지 영국에 파견된 100만의 미군병력중 일부로, 오버로드 
작전개시일까지 그 숫자는 160만까지 불어나게 된다.
미육군성이 '볼레로'라는 별도의 작전명칭이 붙여진 이 병력 파견작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와 거기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불화였다.
아닌게 아니라 좀 문제가 있긴 했다.
보수적인 영국인들의 시각으로 볼때 이 미국의 젊은이들은 한마디로 버릇없고 
경박스러울 뿐 아니라, 시건방지기 짝이 얺는 녀석들이었다.
큰일을 앞두고 두 맹방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사태를 염려한 것은 영국 
정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신문에다 미군 병사들의 행실을 비난하는 기사를 싣지 
못하도록 하는 보도통제가 실시되었는데, 덩케르크의 비참한 패배 사실까지 한줄의 
첨삭도 없이 그대로 보도해 오던 영국의 언론 풍토에서 볼때 이것은 별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양키들의 행돌을 비꼬는 농담은 
이루셀 수도 없을만큼 나돌고 있었다.
"그 친구들의 문제는 돈이 너무 많다는 것과 여자를 지나치게 밝힌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여기게 왔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는 그래도 점잖은 편이었다.

"박물관도, 공원도 양키들로 만원이다. 전차도, 버스도 그들이 점령해 버렸으니 
우리는 걸어 다닐 수밖에... 그러다가 차도를 거꾸로 달려온 양키 지프에 치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줄 알아라"
영국은 미국과 달리 자동차가 좌측통행이고, 실제로 여기에 익숙치 않은 미군 
운전병들은 곧잘 접촉사고를 내곤 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단, 양키 친구들이 우리 영국 아가씨들을 
쏘는(Shoot)것 만큼만 독일군을 잘 쏘아 준다면 말이다"

간신히 이 '재난'으로부터 벗어난 북부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모든 영국 국민들이 
이 시건방진 우방국의 병사들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대체로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영국의 어린이들과 젊은 아가씨들은 대체로 이 
미군 GI들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모든 미군 병사들이 호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는 츄잉껌이나 쵸콜렛, 캔디 따위는 
전시의 물자부족으로 단맛에 굶주린지 오래된 꼬마들로부터 대인기를 끌었고, 
지극히 한정된 소수의 사치품이 되어버린 화장용 비누나 여성용 실크 속솟 따위는 
그것을 영국인 애인에게 선물하려는 미군 병사들에 의해 동이 나 버렸다.
영국 아가씨와 결혼하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하여 자신의 상관을 성가시게 만들고 
있는 미군 장병이 수만명에 달했고, 실제로 전쟁이 끝났을때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이른바 '전쟁 신부'도 8만명에 달했다.
미군의 주둔이 가져다 준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많은 영국 시민들은 "눈꼴이 실때도 가끔 있지만" 이 양키친구들이 최소한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 것이다.
오랜 전쟁과 독일군의 폭격에 시달려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그들에게 있어서 미군 
병사들 특유의 생기발랄함은 일종의 신선한 청량제와 같은 구실을 해 주었고, 
마침내 그들이 서로 정이 들만한 무렵의 어느날, 그 미군 병사들은 한명도 
남김없이 홀연히 떠나갔던 것이다.
영국 시민들의 생활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것은 비단 이 '양키군대의 침공'만이 
아니었다.
작전 개시일까지 175만명의 병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운 영국군도 폭발적인 
증가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미 상당수의 병력을 아시아와 이탈리아 전선에 파견해 놓고 있는 영국이 이만한 
병력을 확보하자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등의 영영방군 18만명과 함께 독일에 점령된 
조국에서 탈출한 프랑스, 노르웨이, 벨기에, 폴란드, 체코, 덴마크 출신자 
5만여명이 가세함으로써 이제 영국군은 통일된 군복은 입은 세계 최고의 다국적 
군대가 되어 있었다.
이만한 숫자의 순대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역시 영국 
국민들이 떠맡을 수 밖에 없는 일이고, 1944년 초반에 이르자 그 부담은 거의 
지탱할 수 없을 지경으로 커져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모든 국토는 온갖 
종류의 물자로 온통 뒤덮혀 가고 있었다.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부터 비행기, 선박, 화포, 전차로붜 시작해서 이루셀 수 없는 
많은 종류의 군수품들이 줄지어 흘러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좁은 섬나라 영국은 바야흐로 그 엄청난 짐짝들의 무게를 못이겨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귀족들의 영지안에 있는 스쿼시 코트에조차 산더미같은 탄약상자가 야적되고, 북부 
스코틀랜드의 황무지에도 거대한 커테이너 야적장이 건설되었다. 갓 피어나기 
시작한 사과꽃 향기가 그윽한 남부 잉글랜드의 시골길 양편으로는 연료탱크가 
줄지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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