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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3월11일(수) 16시19분48초 ROK
제 목(Title): 절대군구, 칼을 뽑다! 29 - (3)


대서양 방벽
2차세계 대전을 정의할때 '히틀러의 세계정복 야망이 빚어낸 인류의 비극'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의 정형화된 공식일 뿐 아니라 또 '모범답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따져볼때 이것은 결코 완벽한 답안이 아니다.
히클러 자신은 이 전쟁을 가리켜 '유태인과 공산주의로부터 유럽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정의했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독일은 그야말로 
20세기의 십자군으로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벌어진 수비형의 전쟁을 
'마지못해' 수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을 유린해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부당한 간섭과 
착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독일 민족의 신성한 권리'가 들먹여지고, 동유럽과 
소련을 침공한 이유를 물어면 '지배민족 게르만을 위한 최소한의 생존공간 
확보'라는 궤변이 그때마다 준비되어 있지만, 이 전쟁 전기간을 통해 그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한 일이 최소한 딱 두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도대체 무슨 영문에서인지 결행되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영국본토 
상륙계획을 끝내 실행하지 않았던 점이고, 두번째는 유럽 대륙 전체를 감싸는 
'만리장성'을 세우려고 했던 일이다.
아직 패전의 징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독일이 마음만 먹으면 못한 일이 
한가지도 없어 보이던 1941년 12월의 어느날, 히틀러는 난데없이 '북해의 느로웨이 
해안으로부터 스페인 국경의 대서양에 이르는" 전 서유럽의 해안에다 견고한 
병벽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무릇 모든 담장이란 수비하는 자에게 필요한 물건이지, 공격하는 자기 신경 쓸만한 
물건이 아니다.
막대한 양의 콘크리트와 철강으로 건설되는 이 총연장 3860km의 구조물은 
15,000개의 화포진지와 30만명의 수비병력을 가지게 될 예정이었으므로, 아무리 
승승장구의 독일이라 하지만 이쯤되면 실로 국가재정을 휘청거리게 할만큼 규모가 
큰 대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 이후로도 근 2년간 가까운 세월동안 강박관념과도 같은 
열정으로 이 일에 매달렸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독일의 유럽'을 위협할만한 세력이라면 그것은 미국과 
영국뿐이다.
그는 바로 이 영,미 연합군이 서유럽 해안 어딘가에 상륙해 올 것을 그때부터 
예견했던 것이고, 이 부분에 관한한 그는 정말 '수비형'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라고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은 당연히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실제로 벨기에의 '에반에말' 요새나 프랑스의 '마지노'선처럼 아무리 난공불락이라 
하지만 결국 인간의 손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 성이란 없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이 
그동안 몇번이나 실증해 보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하지만 독일 제3제국에서 총통의 명령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제 아무리 "그것은 지극히 히틀러다운 몽상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진 
독일의 국민적 영궁 '에르빈 롬멜' 원수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1942년초부터 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보목공사가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신임하는 제국 기술고문 '프릿츠 토트'박사가 이끄는 토트 연구소가 그 
설계를 맡았고, 제국 군수장관 '알베르트 쉬페어'가 진두지휘를 맡은 이 공사는 
착수되자마자 이전의 찬반론을 씻은 듯이 잠재우고 순식간에 모든 독일 국민에게 
안도감을 주는 자랑스런 존재로 돌변했다.
그리고 특히 네덜란드로부터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도버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곳 - 즉 영국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 -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에프 기습작전은 이 방벽의 건설에 더욱 확실한 명분과 목표를 부여해 
주는 계기가 되었고, 이 사건이후 히틀러는 이렇게 선언했다.
"유럽대륙으로 진공을 시도하는 그 어떠한 적도 반드시 해안에서 격멸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 본인의 결의는 다시한번 증명되었다."

공사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1943년부터는 아프리카에서 귀환한 롬멜원수가 이 진지작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그는 처음부터 이 공사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태도에서 돌변하여 
정열적으로 이 일에 달라 붙었다.
그리고 뒤이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은 지켜 보면서 롬멜은 
자신의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 '대서양 방벽'을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래로 변모시켜 나갔다.
이미 설치해둔 대전차 장애물에다 다시 대전차 지뢰를 붙들어 매고, 공수부대가 
착륙할만한 공터에는 날카로운 쇠창을 박아두는 식의 빈틈없는 진지 강화작업은 
운명의 'D데이' 전날 밤까지도 계속 되었던 것이다.

절대 군주, 칼을 뽑다
인류역사를 통털어 유례가 없었던 초 거대규모의 상륙작전, 오버로드(Over Load: 
'절대군주')가 잉태된 시점은 1943년 4월로,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광장에 위치한 
육군성의 작은 부속건물 '노포크 하우스'가 그 산실이었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영국군은 덩케르크 철수의 그날부터 '유럽대륙으로 
되돌아간다'는 명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프레드릭 모건' 중장을 
참모장으로 하는 영미 합동 참모본부 '코삭:COSSAC'이 창설되면서 그 염원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1년뒤, 미국의 '아이하워' 장군이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연합군 
파견군 최고사령부(SHAEF)로 개칭되는 이 기구에 떨어진 과제는 '영미 연합군이 
1944년 중에 유럽대륙에 상륙하는데 필요한' 작전계획을 만들어 내라는 단 
한가지였다.
곧 실시될 시칠리아 상륙작전 계획을 입안해낸 경험을 가진 모건장군은 이것이 
단순히 '작전계획'이라 불리울 수 있는 그런 성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숨에 
이해했다.
그것은 거대한 민족 이동계획인 동시에 수백만의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막대한 
양의 물조조달 계획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수천만톤에 이르는 물자의 효울적인 
비축, 관리, 분배계획이기도 하며 인류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수송작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영국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해 낼만한 힘이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다. 따라서 바로 여기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한자작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 이 거대한 작전에 필요한 비용은 바로 
미국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모건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1943년의 일년동안 꼬박 이 일에 매달렸다.
사령부의 분위기는 군사령부라기 보다는 한결같이 천문학적인 숫자들로 구성된 
복잡한 계산과 씨름하는 연구소에 한결 더 가까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륙지점과 작전개시일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모건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머리를 싸매고 이 거대하고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내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당연히 디에프에서 경험했던 참패가 모든 사안을 결정짓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데이터로 등장했다.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항공기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아군기가 작전지역 
상공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이자면 상륙지점은 영국에서 가까울수록 
좋다.
따라서 독일군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나, 덴마크, 
네덜란드의 '프리지아' 해안은 고려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항구다.
300만 이상의 병력을 대륙해안에 쏟아놓고 나서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가만한 
병력이 생활하고 전투를 수행하자면 하루에도 수만톤의 물자가 필요하고, 이만한 
양의 물자를 하역하고 처리해 낼 수 있는 시설과 규모를 가진 항구는 서유럽 
해안을 통틀어 그다지 많지 않다.
게다가 그 물자의 공급은 독일군의 방비강화 속도를 앞지를만큼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후속부대의 투입이나 부상병력의 후송을 위한 공간까지 
고려한다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리고 어떤 상륙지점을 골라 잡든 간에 그 맞은 편 대안 - 영국 - 의 발진기지로 
사용될 항구의 규모도 고려해야 한다.
300만의 병력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가 그냥 한자리에 몰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필요한 공간이 얼마나 될는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 영국에는 그만큼 
큰 항구가 단 한곳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발진기지와 상륙지점을 여러개로 분산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집중과 기습의 원리에 의해 볼때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상륙지점 뒤쪽에 있는 대륙의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300만의 병력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그냥 한자리에 몰아 놓는다 하더라도 
거기에 필요한 공간이 얼마나 될는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 영국에는 그만큼 
큰 항구가 단 한곳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발진기지와 상륙지점을 여러개로 분산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집중과 기습의 원리에 의해 볼때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상륙지점 뒤쪽에 있는 내륙의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해안에 상륙한 부대가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내륙부로 진출함으로써 해안을 '비워' 
주어야만 후속부대가 계속 상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넓은 평야와 잘 
완비된 도로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거꾸로 말해서 독일군이 증원 병력을 
투입하기도 그만큼 좋은 곳이라는 뜻이니, 이 점도 신중히 고려해야만 한다.
이처럼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은 문제들을 끌어안고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파 드 깔레' 해안과 '노르망디'가 
최적의 후보지로 떠오른 것이다.
그중에서도 파 드 깔레는 이런 제반조건들에 비춰볼때 가장 이상적인 상륙지점으로 
여겨졌지만, 문제는 독일군도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파드깔레 주변은 독일군이 건설한 대서양 방벽의 모든 구간 
중에서도 가장 경계가 삼엄하고 방비가 철통같다고 하지 않은가?
결국 최종 상륙지점이 결정되었다. 해적 바이킹의 후손인 노르만인들이 살고 있는 
땅 - '노르망디'가 바로 그곳이었다.
상륙장소가 결정되자 작전 개시일 - 이 무렵부터 'D데이'라는 암호명이 붙어 
있었다 - 도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바람의 영향과 해류의 흐름등을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변덕이 심한 도버해협에서 바도가 잔잔하고 지원 항공기들이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을만큼 쾌청한 날을 일년중에서 실로 며칠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거 10년간의 통계치로 볼때 그런 날이 바로 5월의 첫주였고, 여기서 5월1일이란 
날자가 결정되었다.
이 날은 소련의 가장 큰 명절인 메이데이(노동절)로써, 오래전부터 이 상륙작전을 
고대해 왔던 이 동맹국에게 그것은 무척 상징적이고 의미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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