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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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2월24일(화) 10시07분33초 ROK
제 목(Title): 은빛의 작은 친구들 - 28 (2)


미군 폭격대는 아헨으로부터 레겐스부르크에 이르는 480km의 거리를 1시간 반동안 
비행하면서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난타 당했다.
그들이 나아가는 항로 양편에 대기하고 있던 기지로부터 차례차례 날아오른 
전투기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연료와 실탄이 떨어질때쯤되면 또 새로운 
부대가 모습을 나타냈다.
극심한 타격을 입은 채로 간신히 레겐스부르크 상공에 도달하여 허겁지겁 폭탄을 
내던진 폭격대개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를 향해 귀로를 잡은 것은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이 폭격기들이 당연히 오던 길을 되돌아 영국으로 귀환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던 독일군은 그 퇴각로에다 수백대의 전투기를 배치해 놓고 
있었고, 이런 예상과는 달리 기수를 정남쪽으로 돌려 아프리카로 향한 폭격기들은 
간신히 이 사신(死神)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레겐스부르크 폭격대가 출격한지 10분뒤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짙은 안개로 인해 3시간이나 더 지체하고 나서야 시바인푸르트를 향해 
출격했던 미군 폭격대 제2파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시작된 독일전트기들의 요격을 폭격을 마치고 귀로에 오를 
때까지도 전혀 기세가 수그러 들지 않았고, 미군 폭격기들의 이런 악전고투는 
네들란드 상공에 이르러 P-47 썬더볼트 전투기들이 구원을 위해 달려올때까지 
계속되었다.
미군의 야심적인 폭격작전은 면모가 일신된 독일공군의 요격전술에 휘말려 
지리멸렬이 되었고, 작전이 종결된 후에 발표된 전과 역시 참담한 것이었다.
폭격기 60대가 격추되고 수리가 불가능할만큼 대파된 시체가 47대가 되는데 비해 
격추된 독일 전투기는 고작 25대였던 것이다.
그나마 레겐스부르크와 시바인푸르트의 목표물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두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않을만큼 끔찍했다. 이처럼 호된 반격을 1주일만 계속 
받게 된다면 제8공군 전체가 전멸해 버리는 것도 시간문제라고들 수근거렸다."

그리고 이날 - 8월 17일 - 의 재앙은 미군들에게 그쳐 주지만도 않았다.
영국군의 폭격대가 바로 이날 밤에 '발트'해의 작은 섬 '피데믠데'를 향해 
출격했던 것이다.
그 섬에는 독일군의 '비밀무기' 연구소가 있다는 사실이 오래전부터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첩보원들로부터 전해지고 있었고, 비록 그것이 바로 V-1과 V-2 
로켓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영국공군은 마침내 그 비밀무기 연구소를 
분쇄해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서로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책략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영국군의 무전을 도청하여 그날 밤에 공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슬 알아낸 
독일군은 야간 전투기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고, 영국군은 또 그들 나름대로 
독일군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을 마련했다.
먼저 8대의 모스키토 편대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 상공으로 날아가 조명탄을 
투하하자 당연히 독일군의 전투기들이 벌떼처럼 이륙하여 베를린으로 달려 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군 고사포의 치열한 탄막사격이었다.
무서운 폭격의 전조인 조명탄의 불빛 아래서 곧 다가올 연합군 폭격기의 본대를 
기다리며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베를린의 대공포대는 머리위에 들이닥친 
항공기의 대군을 적기로 오인했던 것이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경우에 포대에다 사격중지를 명령해 주어야 할 
방공사령부와의 지휘통신이 까닭없이 두절되어 버렸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날밤 공격 개시시간에 맞추어 2명의 영국공작원이 캄후버 장군의 방공 지휘소에 
잠입하여 통신 케이블을 잘라 버렸던 것이다.
영문도 모른채 아군의 대공포 사격에 시달리며 베를린 상공을 맴돌고 있던 야간 
전투기들은 바로 그때 160km 정도 북쪽에 위치한 피데믠데의 상공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조명탄의 불빛을 발견했다.
그들은 곧 베를린의 지상관계소에 다 그쪽으로 이동해 보겠다는 뜻을 타전했으나 
이 제안은 바로 거부되었다. 베를린 대공관제소의 말단 관제장교가 피데믠데와 
같은 극비 시설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턱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전투기들은 나타나지도 않는 영국군의 폭격기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함하늘을 맴돌다가 연료부족으로 기지에 내려 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중에 섞여 있던 55대의 빌데자우 조종사들은 달랐다.
그글은 재급유를 마친 다음에 관제소의 명령을 무시하고 곧장 다시 이륙하여 
피데믠데로 날아갔고, 그들의 듁감은 적중했다 - '진짜 잔치'는 여시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밤 빌데자우 부대는 40대의 폭격기를 격추시켰는데, 조금만 더 빨리 요격을 
개시했더라면 전과가 더욱 컸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이날 팜의 폭격으로 피데믠데의 생산라인이 크게 파괴되어 V-1과 V-2의 
생산이 두달정도 늦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빌데자우의 존재는 더없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다시한번 확인되었다.
괴링은 이날 밤의 전과에 크게 만족하여 빌데자우를 3배 이상으로 확충시키라는 
지시랄 내렸고, 크게 사기가 오른 이 '전투기' 게릴리 부대'가 다시금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해 보일 기회는 불과 일주일후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베를린이 그 무대였다.

불타는 베를린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내내 런던이 독일 폭격기들의 자장 큰 표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베를린은 연합군 폭격기들로부터 그다지 큰 시달림을 받은 적이 없다.
이것은 전략폭격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격과 함께 런던과 베를린이라는 두 
도시의 조건이 그만큼 다른데 그 원인이 있다.
런던은 영국의 수도인 동시에 영국의 공업력을 지탱하는 가장 큰 공업도시다.
테임즈강의 풍부한 공업용수와 함께 대서양과 북해로 연결되는 항구가 가깝다는 
입지적 조건으로 인해 영국의 공업지대는 대부분 런던시내와 그 외곽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데다, 좁은 골목과 주택이 밀집한 런던의 주거지역은 공중에서 
퍼부어지는 폭격과 화재에 더없이 취약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개전 초기에 런던 시민들이 독일 폭격기들로부터 가장 큰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지만,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경우가 
좀 다르다.
우선 베를린은 독일 내륙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영국 본토에서 
그곳까지 폭격기가 왕복하기에는 너무 멀다는 것인데, 이것은 독일의 점령지 
프랑스로부터 실로 '코앞'에 위치한 런던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다.
또 독일의 군수공업 생산시설은 독일 전역이 비교적 고르게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베를린에는 이렇다할 공업지대가 없다. 게다가 비교적 근세에 와서 건설된 
계획도시인 베를린의 건물들은 대부분 돌과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데다가, 시내를 
종횡으로 가로 지르는 널찍한 도로가 자연적인 화재방제선 구실을 하기 때문에 
함부르크처럼 중세 시대에 건설된 고도(古都)처럼 쉽게 불태워 버리기도 힘들다.
따라서 영국 본토 항공전이 개시된지 수일만에 영국공군이 시도했던 최초의 베를린 
폭격이나 공습은 모두 "적의 심장부 한복판을 직격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제외한다면 그다지 큰 효과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상공의 항공전이 '공격하는 견합군과 방어하는 독일군'이라는 일방적인 
구도로 정착되자 영국공군 폭격항공단 사령관 해리스 장군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140만의 인구와 유럽 최고수준의 부(富)를 자랑하는 한편으로, 저 가증스런 나치 
권력의 심장이기도 한 이 도시를 어찌 그대로 놔둘 수 있단 말인가?
1943년 10월에 접어들자 영국공군에 의한 베를린 야간공습이 부쩍 가열되기 
시작했고, 아울러 자메자우와 빌데자우도 바빠졌다.
베를린의 밤하늘은 매일밤 불야성을 이루었다.
폭격대를 선도하는 모스키토들이 내던진 조명탄과 함께 독일군의 지상포대도 
무수한 조명탄을 쏘아올렸고, 저기에다 그 무렵부터 실용화된 조명 로켓에 의해 
밤하늘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는 모도가 더욱 높아지면서 베를린은 밤이 사라진 
도시로 변해버린 것이다.
거의 매일 밤마다 울려대는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방공호로 발길을 옮기던 
베를린 시민들은 볻 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지난 수년동안 베를린 시민들이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 있다면 그것은 
'등화관제'였다. 그 동안은 날이 저물면 집밖에서 담뱃물을 붙이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이 도시의 좁은 골목길에서도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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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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