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2월05일(목) 09시39분46초 ROK 제 목(Title): 공폭(空爆)의 서막- 25 (2) 1939년 12월 18일. 영국 공군의 폭격기 조종사들은 마침내 삐라 뭉치가 아니라 진짜 폭탄을 싣고 출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북해의 '빌헬름스 하펜'에 정박해 있는 독일해군의 함대를 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당시로선 최신형이라고 할 수 있던 회전식 총좌까지 갖춘 '웰링턴' 폭격기 24대가 용약 출격했지만, 이 작전의 결과는 한마디로 함담했다. 비록 대낮조차 어슴프레한 북극해의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정오 경의 대낮을 기해 목표해상에 쇄도했던 폭격기들은 독일 공군의 메사슈미크 Bf-109와 Bf-110 전투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순식간에 딱 절반에 해당하는 12대가 격추되어 버리는 대참사를 당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폭격 항공단의 존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육군과 해군은 물론, 심지어 같은 공군의 전투기 옹호론자들까지도 이 참담한 결과를 놓고 입방이를 찧어 댔다. "그것봐라! 속력이 느리고 덩치만 큰 폭격기를 동원하여 공습을 가할 수 있다는 발상은 말짱 헛것이라는 것이 단숨에 증명되지 않았는가? 이것은 마치 1854년 크리미아 전쟁에서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창지병대를 적의 포화속의로 독격시킴으로써 전멸해 버린 그 유명한 '최후의 창기병 돌격'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트랜처드 공군 참모 총장의 생각은 좀 달랐다. 대낮에 공습을 시도했던 복격기들이 참담한 피해를 입은 반면 주로 야간에 활동한 '휴지 보급 부대'의 피해율은 불과 2.8%정도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장차 폭격 항공단이 취해야 할 공습의 형태는 당연히 야간폭격 뿐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뚜렷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런 결정으로 인해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서치라이트의 불빛과 작렬하는 고사포, 그리고 편대를 지어 날아드는 육중한 중폭격기로 특징 지워지는 2차세계대전의 전형적이 또 한가지 모습이 결정되었다. 1940년 5월 중순.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를 침공함에 따라 드디어 어정쩡한 '조랑말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서유럽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게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영국의 신임수상으로 취임한 윈스턴 처어칠은 열렬한 공군 예찬론자였고, 또 일찍부터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역설해 오던 사람이었다. 수상이된 처어칠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유례없는 항공기의 증산 계획이었고, 특히 충분한 항속거리와 많은 폭탄탑재 능력을 가진 신형 4발 중폭격기의 개발에 최우선 순위가 두어졌다. "전투기는 곧 다가올 항공전에서 우리 국토를 구원해 주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대 줄 것은 폭격기다" 이처럼 수상의 열렬한 후원을 업고 있던 영국공군 폭격 항공단에게 있어서 1940년 5월 16일은 여러모로 의미깊은 날이었다. 그 전날, 독일공군이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을 폭격하여 800여명 이상의 시민들을 살상한데 대한 보복으로 영국 공군인 99대의 '화이틀리' 폭격기를 출동시켰고, 이 폭격기들은 선전삐라가 아니라 고성능 폭탄을 가득 싣고 있었다 - 드디어 지루하고 의미없는 휴지배달부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이날의 폭격으로 독일 본토 '루르'하곡의 정유소와 철도 조차장, 군수공장들이 불길에 휩싸였고, "절대로 연합군 항공기는 독일 상공에 얼씬도 할 수 없다"고 큰소리 치던 괴링원수의 장담은 깨어졌다. '과거 어느 때도 없었고, 장차에도 없을만큼 가혹한 공폭(空爆)의 시대'가 막이 오른 것이다. 목표는 베를린 1940년 8월이 되자 그 유명한 (배틀 오브 브리튼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아다시피 프랑스를 함락시킨 독일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영국이었고, 지상군의 '영국성' 상륙을 앞두고 독일군은 우선 그들이 가진 모든 공군력을 투입하여 영국의 항공전력을 일소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영국 본토 항공전이다. 그리고 이 인류사상 최대 규모의 치열한 항공전의 주역을 폭격기가 아니라 단연 전투기였다. 하지만 '헤르만 괴링'이자신만만하게 벌였던 이 전투는 독일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과적으로 '천년제국'의 수도 페를린 상공에다 연합군의 중폭격기를 불러들이는 날자를 더욱 앞당겼들 뿐이다. 8월 24일 밤, 개전이래 처음으로 런던 시내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졌다. 시내 한복판에 투하된 2발의 폭탄은 유서깊은 '세인트 질'교회와 부근 광장에 서있던 '존 밀턴'의 동상을 날려 버렸고, 또 수발의 폭탄이 '스테플리'와 '토테남' 같은 런던 북동부 변두리의 주택가에 떨어져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한다면 이날밤 런던에 떨어진 폭탄은 순전히 '실수'로 인한 것이었다. 이날밤 테임즈 강 하구 '테임즈 헤븐'의 거대한 유류 저장고를 목표로 하고 날아왔던 독일군의 폭격기 편대는 지상에서 쏘아올리는 치열한 고사포 사격을 받았고, 이 바람에 2대의 He-111이 항로를 이탈해 버렸다. 자신들이 길을 잃었음을 때닭은 하인켈의 승무원들은 평소 훈련받은 대로 폭탄을 아무 곳에나 내던진 다음에 기지로 귀환했는데, 공교롭게 그곳이 런던상공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폭격기 조종사들의 오폭은 런던에 대한 직접 폭격을 엄격히 금지했던 히틀러 총통의 명령에도 위반되는 것으로, 이 순간의 실수는 순식간에 인류의 역사이래 그 유례가 없는 적국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폭격의 시대를 활짝 열어 놓은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유사이래 영국인들은 매우 보수적이고 신중한 한편으로 싸움에서는 적의 의표를 찌르는 과감함과 함께 "한대를 맞으면 반드시 두대를 갚아준다"는 집요한 복수심을 발휘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처어칠 수상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공습을 간절히 기다려 오던 사람 같았다. "갚아준다! 우리도 베를린에다 폭격을 가한다!!" 런던에 대한 오폭사건이 발생한지 딱 하루가 지난 8월 25일밤, 개전 이래 처음으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요란한 방공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81대의 영국 폭격기가 베를린 상공으로 쇄도했던 것이다. 그날밤 따라 두텁게 드리워진 먹구름으로 인해 그 전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자신들의 국토가 맹폭격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이처럼 과감한 역습을 시도할 수 있는 영국인들의 두둑한 배짱에 베를린 시민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날밤부터 영국 폭격기들의 베를린 공습은 10일간 계속되었고, 이때부터 최소한 수도의 민간인 거주지역에 만큼은 폭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영,독 양국간의 묵계는 깨어졌다. 독일군도 런던을 폭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전형적인 '2차대전식' 전략 폭격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