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2월05일(목) 09시38분52초 ROK 제 목(Title): 공폭(空爆)의 서막- 25 (1) 전략폭격(戰略爆擊)의 개념을 가장 먼저 실증해 보인 것은 독일이다. 전락폭격이란 적의 지상병력이나 진지에 대해 폭격을 가함으로써 교전중인 아군의 지상군을 지원하는 것 - 즉, 전술폭격(戰術爆擊)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적국후방의 군수공장이나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그 대상을 확대시키는 것을 말한다. 일찌기 1차 대전중 독일군은 거대한 비행선 '제펠린'과 쌍발 복엽기 '고타'를 사용하여 영국의 주요도시에다 400여톤의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이런 전략폭격을 최초르 실증해 보였던 것이다. 이 공습으로 약14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 폭격의 당사자인 독인군 조차도 자신들이 장차 전쟁의 모습을 완전히 일변시키기에 충분한 전혀 새로운 전법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영국시민들에게 독일공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겁을 주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했을 뿐이며, 영국은 물론 이 사상유례없는 무고한 양민에 대한 학살행위를 열렬히 성토했다. 하지만 그런 경황 중에도 몇몇 안목있는 사람들은 이 항공기에 의한 적 후방의 무차별폭격 - 전략폭격 - 이 가지고 있는 가공할 잠재성에 대해 눈치챘다. 만일 적국의 군수공장에다 폭격을 집중시킬 수 있다면 그들의 공업생산력을 마비시킬 수 있고, 민간인 거주지역에다 무차별 폭격을 가하면 적국의 시민들에게 공포를 심어줌으로써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의지 자체를 꺽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지금히 당연한 상식처럼 되어 있는 이러한 착상을 1920년대 초반의 당시로선 지극히 이단적인 발상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전쟁은 그야말로 전선에서 총뿌리를 마주댄 양국군인들의 일일 뿐이란게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며, 이처럼 무고한 적국의 시민들을 폭격으로 살상하는 것은 지극히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적의 군수공업생산력 자체를 말살시켜 버리면 "육군이나 해군이 출동할 필요조차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은 전통적인 육군과 해군의 장군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1차 대전에서 모두가 보았듯이 전쟁무기인지, 신종스포츠 장비인지조차 애매모호한 항공기와 그것을 조종하는 '귀족의 자제들'인 비행사들의 한량놀음이 수백년간 전쟁의 주역이었던 육군과 해군을 모두 실업자로 만들 수 있다니, 도대체 그런 얼빠진 생각이 어디있는가 말이다! 그 결과 미육군 행공대 사령과 '윌리엄 밋첼'준장이나 이탈리아의 군사이론가 '지울리오 두에' 장군과 같은 전략폭격 옹호론자들의 활동은 조직적으로 방해를 받았으며, 1930년대초에 재무장을 시작한 독일조차도 그 어느 나라보다 공군력의 확충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상군을 엄호할는 전술폭격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도 이런 현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허무맹랑하고 이단적인' 전술개념은 엉뚱한 곳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상 최초로 직접 전략폭격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영국에서였다. 대체로 보수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성향을 가진 그들답지 않게 영국은 1차 대전중인 1918년에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를 통합하여 완전히 신종군대인 '공군'을 창설한 바 있고, 게다가 전략폭격 이론의 선각자였던 '휴 트렌쳐드'장군을 초대 공군참모총장으로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행운아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육군항공대의 조종사로 활약했던 그는 공군의 진정한 존재 이유야말로 바로 전략폭격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었고, 많은 폭탄을 싣고 장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대형폭격기의 개발과 함께 전문적인 폭격항공단의 육성에 혼신을 쏟았다. 물론 그 당시의 항공기 제작기술이란 것이 그의 이런 혁신적인 구상을 뒤쫓아 오기에는 아직 무리였지만, 이런 전략폭격의 개념조차 없이 전투기와 중거리용 쌍발중형폭격기만을 열심히 만들어 내고 있던 독일과 비교해 본다면 이것은 본명히 미래를 정확히 내다본 혜안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폭격기는 밤에 난다 2차 대전이 개전된 이후에도 폭격항공단이 그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체로 찾아오지 않았다. 개전초기의 8개월 여 동안은 독일군과 연합군이 서로 본격적인 대규모 접전을 회피하는 기색이 여력한, 이른바 '앉은뱅이 전쟁' - 연합군을 이것을 '조랑말전쟁'이라고 불렀다 - 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포병대가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포탄 한발을 발사하자 곧 프랑스군도 똑같이 한발을 응사했고, 독일군의 확성기가 방금의 포격은 우연한 오발사고였음을 해명하는 방송을 내보내자 프랑스군도 사격을 중지하고 알았다는 회답을 내보내는 식의 지극히 신사적인(?) 장난같은 전쟁에서, 대규모의 폭격기 편대를 동원하여 적국의 도시에도 폭탄을 퍼붓는 대담한 일은 양쪽 모두가 선뜻 손을 대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영국공군의 신생 폭격항공단은 장차 전쟁에서 중요한 교훈이 될, 모종의 중요한 교훈이 임무를 띤 출격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다. 1940년 초반의 넉달동안 영국군의 폭격기들은 거의 매일밤 독일의 주요 도시를 향해 출격했다. 그리고 실전배치된지 5년여 밖에 되지 않았으나 벌써 '구닥다리'라고 불리우고 있던 '화이틀리' 폭격기는 성능에 비해 볼때 그 폭격임무를 실로 성공적으로 수행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무렵 이 폭격기들이 열심히 투하가고 있는 것은 독일 본토를 불바다로 말들 폭탄이 아니라 독일 시민들에게 보내는 선전삐라 뭉치였다. 순식간에 폴란드와 체코, 노르웨이를 함락시키고 서유럽의 침공을 목전에 둔 싯점에서 사기가 오를대로 올라있는 독일 국민들을 향해서 "평화를 사랑하는 독일 시민은 총궐기하여 독재자 히틀러를 몰아내고 전쟁을 종식시키자"고 호소하는 삐라의 내용을 도대체 씨알이 먹히지 않는 헛소리였고, 그것을 투하하는 영국폭격기의 승무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시바삐 적국의 도시에다 장렬한 불벼락을 퍼부어 주고 싶다는 간절한 기대가 낙담으로 바뀐 이 폭격항공단의 승무원들은 자조적인 심정으로 자신들을 가리켜 '화장실 휴지보급부대'라고 불렀ㅏ. 하지만 이처럼 비록 자신들조차 못느끼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휴지보급부대는 장차 자신들이 수없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전술적 시금석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북 잉글랜드나 남 잉글랜드 각지의 비행장을 이륙한 폭격기들은 거의 매일같이 독일 고업지구의 심장부인 '루르'하곡이나 '함부르크','브레멘' 같은 대도시 상공에 삐라를 살포했고, 독일군의 방공망은 진짜 폭탄을 싣고 온 폭격기와 조금도 다름없이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을 찾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야간폭격(?)에서 격추된 폭격기는 거의 없었다. 경헝만큼 중요한 스승은 없다고 했다.아직도 항법장치가 지극히 원시적인 수준이었던 당시로서 오방중에 적국후방의 폭격목표를 정확히 찾아내고 또 그곳까지 몇번이나 왕북해 본 경험을 가진 조종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밖에도 배울 것은 수없이 많았다. 변덕스런 날씨는 지상에서 쏘아 올리는 고사포 시격보다도 위험한 것이며, 높은 고도를 비행아는 기체속에서의 혹한과 산소 부족을 견뎌내는 훈련도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런 충분한 경험을 쌓고 난 뒤라면, 언젠가 '필요해 질때' 선전삐라 대신 진짜폭탄을 싣기만 하면 될 것 아닌가? 요컨데 그것이 삐라이든 폭탄이든 간에, 무사히 목표상공에 도달하여 그것을 투하해 보았다는 경험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