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1월19일(월) 12시33분01초 ROK 제 목(Title): 안지오,안지오 22 - (3) 안지오,안지오 안지오의 상륙이 처이칠의 주장처럼 '독일군의 배후를 찌르는 성공적인 기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미군 지휘관은 처음부터 한명도 없었다. '제임스 루카스'소장이 이끄는 미 제6군단이 이 임무를 위해 선발되었지만 장군 자신은 "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가지갈다"는 말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그리고 '싱글작전'이라 명명된 작전의 암호명 역시 결과적으로 이 안지오 상륙작전이 가지는 의미를 시니컬하게 함축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 작전은 갈 수는 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는 편도여행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처음부터 안치오에 상륙하는 제6군단과 카시노의 제5군 주력부대는 뗄레야 뗄 수 없도록 운명적으로 얽혀 있었다. "자네들의 임무는 고양이 발톱이다. 제5군과 맞붙어 있는 독일놈들의 등짝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후벼파서 놈들이 뒤를 돌아보게 하라. 그러면 그 틈에 제5군이 단 한방에 그 녀설을 때려 눕힐 것이다." 알렉산더 장군의 이런 말처럼, 제6군단은 배후행동을 전개하여 카시노 방어선의 독일군 일부를 분산시킴으로써 제5군이 겪고 있는 최악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그 반면 제5군은 한시바삐 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그들을 구출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제6군단의 주력은 미국 제3사단과 영국 제1사단, 그리고 미군 레인저 대대와 영국군 코만뎌 여단으로 구성된 약4만명의 병력이었다. 그들이 나폴리 항구를 떠나 안지오에 이르는 하루동안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이무렵에는 이미 독일군의 공군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찰기 한대도 띄울 수 없는 형편이었고, 그 덕분에 전혀 발각되지 않은 채로 안지오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상륙작전 역시 예상밖으로 순조로왔다. 1월 22일, 6군단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않고 상륙에 성공했고 그날 정오경에는 해안에서 5km가량 떨어진 '네투노'읍까지 진격하는 뜻밖의 호조를 기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행운은 그걸로 끝이었다. 뛰어난 전략가인 케셀링이 연합군의 이런 배후상륙을 고려하지 못했을 턱이 없고, 여기서 연합군의 사전정보는 독일군의 전력을 크게 오판하고 있었음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케셀링은 연합군 수뇌들이 기대했던 대로 카시노 전선의 병력을 더 가지고 있었고, 그는 이 부대들을 안지오에 급파시켰던 것이다. 24시간 이내에 이들 독일군이 교두보 주위에 방어선을 형성했고, 제6군단의 전진은 거기서 얼어 붙어 버렸다. 그들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오게 되어있는 제5군 주력부대의 접근징후를 발견하기 위해 초조하게 귀를 기울였으나 그런 징후는 없었다 - 알다시피 제5군의 주력은 이미 라피도 강변에서 그 예봉이 꺽여 버렸던 것이다. 루카스 장군은 그렇게 며칠간을 더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상륙 9일째 날에야 이제부터 모든 난관을 자신들의 손으로 헤쳐나갈 수 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1월 30일 자정, 레인저 대대를 앞세운 부대는 안지오 근교를 출발하여 남쪽 - 독일군의 주 방어선 배후에 해당한다 - 향해 조심스런 진격을 재개했다. 선도 레인저 대대가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는 '시스테르나'읍에 도달했을때 파국은 시작되었다. 완전히 마을을 둘러싼 포위망을 형성했다고 판단한 그들이 마을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자마자, 그들의 등뒤쪽으로부터 치열한 사격이 쏟아진 것이다.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와 전차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독일군은 레인저 대원들이 마을을 둘러싼 긴 관개수로를 따라 포복해 올때부터 어둠속에서 숨을 죽인채로 그들의 움직임을 낱낱히 관측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레인저 대대는 순식간에 궤멸되었고, 이날밤 시스테르나로 향했던 800여명의 대대원중에서 생존자는 단지 6명에 불과했다 - 저 끔찍한 '안지오의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제3사단도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시스테르나 교외로 진출하여 '제7국도'로 불리는 아피아 가도의 차단을 시도했던 어느 대대는 30시간 동안이나 거센 포격에 휘말린 결과 대대병력 800명중에서 700명 가까운 장병들이 전사했다. 사흘간에 걸친 전투에서 6군단은 60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이 엄청난 피해에 놀란 알렉산더 장군은 모른 공격행동을 중지하고 교두보에서 대기할 것을 엄명했다. 그걸로서 이들이 이곰 안지오까지 달려온 목적자체가 사라져 버린 셈이었지만, 일은 그것만으로 끝나주질 않았다. 케셀링은 자신들의 배후에 자리잡은 이 껄끄러운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증원부대를 속속 안지오로 불러 들였고, 이들은 이제 해안의 연합군 교두보까지 위혔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이 안지오의 교두보를 "우리 발바닥 아래에박힌 종기"로 선언하고 한시바삐 그것을 '제거'할 것을 명령함에 따라 북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독일 제14군 사령관 '베른하르트 폰 막켄젠' 중장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2월3일부터 반격잔전을 개시한 독일군은 약 10일간의 전투를 통해 교두보로 통하는 주요도로와 방어거점 대부분을 확보했고, 이제 누가 보더라도 안치오의 제6군단 교두보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신세뎠다. 애초에 이 작전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처어칠조차 꼼짝도 못하고 못박혀버린 안지오 상륙부대를 이렇게 초조해진 심정의 일단을 피력했다. "들고양이를 던져 놓았더니 해인에 밀려 올라와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운 고래가 되어 버렸다." 사상 최대의 포로 수용소 2월 16일, 막켄젠은 총 12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안지오 교두보를 향한 공략의 포문을 열었다. 이 병력은 상륙군에 비해 거의 8만이 더 많은 숫자였기만 루카스 장군도 여기에 맞설만한 충분한 원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무렵 북아프리카에서 시실리와 사르디니아 섬으로 옮겨와 있던 연합군의 공군이 바로 그것이다. 영,미군의 전투기들은 총700회 이상의 출격을 기록하며 교두보를 완전히 둘러싼 독일군을 두들겨 대었고, 바다에 떠있던 2척의 해군 순향함도 지원포격으로 여기에 가세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로부터 쏟아지는 이 가공할 화력은 10만이라는 병력의 열세를 충분히 메워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군의 교두보는 바다쪽으로 다소 밀려나긴 했지만 굳세계 버텨내었던 것이다. 좁은 교두보에 2만에 가까운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자연 전,후방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부상을 입은 장병들은 해안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마침내 독일군의 포탄이 이 병원 텐트까지 날아오기 시작했고, 이 바람에 많은 부상병들과 의료요원들이 전사했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자 예전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숫자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 많은 부상병들이 차라니 일선이 더 안전하다며 부대로 복귀시켜 줄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안지오의 교두보가 이처럼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제6군단 장병들이 보여준 놀라운 투혼의 결과이지만, 그밖에 독일군 자신들로부터 기인한 몇가지 문제도 있었다. 워낙 급하게 서둘라대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부랴부랴 이 지역의로 파병된 독일군 부대들중에는 실제적인 전력이 의심스러운 2선급 부대도 꽤 많이 섞여 있었고, '슈판다우' 교도연대같은 것이 그 대료적인 존재였다. 이 연대는 전원이 슈판다우 보병학교의 교관들과 조교들로 구성된 부대였던만큼, 그야말로 모든 전술과 전기를 온몸으로 완벽하게 습득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모두가 큰 키와 준수한 용모,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티끌하나 없이 반짝이는 장화를 신고 있는 옷 매무새까지도 흠잡을데 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역시 교과서적 전술원칙은 '실전과는 영판 다르다느 ㄴ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들은 전투에 투입되자마자 노련한 미군 병사들에 의해 순식간에 풍지박산이 나버렸던 겄이다. 2월중순이 되자 독일군은 결군 교두보를 일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잠시 공격을 중단했고, 이때까지 양군에서는 거의 비슷한 숫자인 4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전투가 잠시 뜸해진 틈을 타서 교두보를 방문한 제5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루카스 군단장을 해임했다. 사정이 어찌되었건, "손바닥만한 교두보에다 2만의 병력과 1만5천대의 차량, 화포를 몰아 놓고서도 한반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무능한 지휘관"을 문책해야 한다는 여론이 너무 강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다. 그 후임으로서는 제3사단장 '트러스코트'소장이 임명되었지만, 물러나는 루카스 장군의 이런 술회는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남하를 포기하고 교두보를 사수하라는 것이 내가 받은 명령이었다. 만일 내가 그말에 따르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여 부대의 손실이 커졌더라면 그들은 나를 총살시켜야 한다고 아우성쳤을 것이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맡은 임무른 적극적인 공격이 아니라 독일군의 배후를 교란하는 양동작전이었고, 본격적인 공격을 속행하기에는 부대의 규모조차 너무 작았다."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독일군의 선전방송은 이 미군의 교두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큰 포로 수용소'이며, "게다가 이 포로 수용소는 우리가 밥을 먹여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급자족 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상당히 시니컬했지만 그 말은 상당부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상태로 제5군의 주력이 카시노 산을 넘어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달려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비록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