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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1월19일(월) 12시00분12초 ROK
제 목(Title): 안지오,안지오 22 - (2)


그렇다고 해서 독일군의 철벽 방어선을 공략하는 연합군이 싸움을 모두 이런 
유별난(?) 소수민족 전우들에게만 떠맡겨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군이 이 전투기간내내 충분한 우위를 유지한 전력은 화력이었다. 인간이 
바위산의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포탄은 그렇지가 않다.
제5군의 표병들은 11월 초순의 2주동안 거의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독일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수십만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미국의 유명한 종군기자 '어니파일'은 그 모습을 이렇고 묘사하고 있다.

"155mm 포가 줄지어 방열해있고 그 포들이 수초의 간격을 두고 교대로 포탄을 
토해내는 작업이 끝도 없이 계속 된다.
처음에는 고막이 터질 것처럼 요란하던 포성도 차차 귀에 익숙해질 수록 나중에는 
아무런 감동없이 덤덤한 상태가 된다. 포대의 뒤에는 쓰고 버린 탄피들이 큰산을 
이루고 있고, 거기에서 내뿜어지는 열기로 인해 포사격의 현장은 후끈한 열기에 
휩싸여 있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웃통을 모두 벗어젖히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포병들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단순한 작업을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임무교대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비번(非番)의 포병들은 심심해진 나머지 재미있는 
계산을 하나 해 보기도 했다.
한발에 50달러라고 하는 포탄의 가격, 대포의 원가와 감가삼각, 그리고 그것들을 
여기까지 운송해 오는데 필요한 경비, 자신들의 봉급 등등을 모두 합친 다음 
그것을 대충 어림잡은 독일군의 숫자로 나눠본 것이다.
그 결과 지금 눈앞에 있는 독일군을 이 포격만으로 모두 다 줄일 수 있도 하더라도 
한명당 2만 5천 달러의 거금이 들어간다는 계산이 나왔다. 캐롤라이나 농촌출신의 
병사들이 평생에 한번도 손에 쥐어보기 힘든 거금인 것이다.
그들중 어느 병사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의견을 내놓았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산위에 있는 독일놈들을 전부 불러모은 다음 그 돈을 
나누어 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거야. 놈들도 기꺼이 동의할게 틀림없어.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고양이 발톱'
구미에와 라지푸트족 병사들이 아무리 용감하고, 제5군의 대포들이 쉴새없이 
포탄을 쏘아대고 있다고 하지만 미냐노 협곡을 둘러싼 높은 산들은 너무나도 
험준했고, 마침내 11월15일이 되자 공격하는 쪽에서 먼저 진이 빠져 버렸다.
제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이 지역에 대한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하고 전 예하부대에 2주일간의 휴식을 허가했고, 이것은 연합군 지휘부에서도 
어느정도 예측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 대신 그들은 바다로 눈을 돌렸다.
만일 1개사단, 혹은 2개 사단정도를 배에 실어 훨씬 더 북방에 있는 '안지오'에 
상륙시킬 수 있다면, 독일군의 전력을 어느 정도 그쪽으로 분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로인해 약화된 방어선을 미 제5군이 뚫어내고, 로마에서 불과 50km 남짓한 
이곳에서 상륙부대와 주력부대가 합류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로마는 사실상 뻥 
뚫린 탄탄대로가 있을 뿐이다.
이 아이디어는 무척 매력적지었지만, 문제는 여기에 필요한 배가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이미 급속도로 진전되기 시작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해 대부분의 
함선들이 영국으로 소환되어 가버렸고, 이 이탈리아 전선은 어느새 '소득없이 
지루하기만한 전쟁'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설사 배를 구해서 약간의 병력을 안지오에 상륙시킨다 하더로도 주력부대가 
독일군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적당한 합류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상륙부대는 
적지 한복판에 내동댕이 쳐진 꼴이 되고, 무의미한 희생을 치르게 될 뿐이다.
하지만 제5군의 뒤를 이어 11월20일부터 새로 가세한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조차도 
베른하르트라인 근처에서 지쳐 떨어져 버렸으므로, 상륙계획은 자꾸만 연기되었다.
마침내 12월 중순이 되자 안지오 상륙계획은 흐지부지되어 버렸고, 연합군의 
유일한 당면과제는 눈앞의 독일군 방어선을 공략한다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모두가 잊어가고 있던 이 계획을 되살려낸 것이 영국의 처어칠 수상이다.
항상 쾌할한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이 사람은 모든 연합국 지도자와 군수뇌들의 
관심이 곧 다가올 노르망디 상륙잔전에 쏠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이 이탈리아 전선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처이칠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졸라대어 상당량의 LST 상륙함을 얻어내었고, 
안지오 상륙은 1944년 1월 14일로 결정되었다.
상륙부대가 LST에 타고 '티라니아'해로 나가는 것까지는 쉬운 일이다.
어쩌면 '독일군이 한명도 없이 텅텅 빈' 안지오에 상륙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일지도 
모를 일이며, 이것은 이미 두달이상 교착상태에 놓여있는 주력부대에게 더없는 
분발을 요구하는 결과가 된다.
그 결과 제5군은 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시바삐 
독일군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상륙군과의 합류지점까지, 정해진 시간안에 진격해야 
한다는 절대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강박관념이 마침내 2차대전중 연합군이 치른 최악의 실패라고 
불리워지는 '라피도 강변의 학살'이라는 참극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라피도 강변의 학살
전 이탈리아 전선을 통틀어 악몽처럼 끔찍한 경험을 맛보지 않은 연합군 부대는 
거의 없지만, 미육군 제36사단만큼 처절하게 찢기워진 부대도 달리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사단은 전시 소집된 '텍사스'주 방위군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부대원들이 전쟁 
전부터 서로 얼굴을 아는 한 고향 사람인 경우가 많았고, 그런만큼 사상자가 
발생했을때의 쓰라림도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산위에서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내려오면 우리는 모포 밖으로 빠져 나온 군화만 
보아도 그것이 누구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친구의 부모님들께 그 모습을 어떻고 
설명해 드릴까를 궁리하는 것은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말이다."
36사단은 이무렵 천신만고 끝에 미냐노 협곡을 돌파하여 라피도 강변에 도달해 
있었고, 이때 그들에게 도하명령이 떨어졌다.
라피도 강은 평균 강폭이 10m정도에 불과하여 얼핏보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았지만, 얼음같이 찬 물을 수심이 3~5m나 되었고 물살도 빨랐다.
게다가 강의 북쪽언덕의 바로 독일군의 최후 방어선 - 또한 가장 난공불락이라고 
일컬어지는  - 구스타프 라인이 건설되어 있고, 강의 양뚝은 몸을 숨길만한 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다.
도하작전이 개시될 남쪽 둑까지 도달하는 것도 문제였다.
때마침 범람한 홍수로 인해 높이 1m 정도의 강둑 아래는 질척한 늪지대로 변해 
있었고, 도하작전의 성공여부는 둘째로 하더라도 우선 폭이 5km에 달하는 그 
위험한 습지를 통과하는 것 자체가 난제중의 난제였다. 무거운 도하장비를 사람의 
손으로 운반해야 하는 것은 물론, 그 물구덩이 곳곳에는 독일군이 설치해둔 지뢰가 
가득차 일는 것이다.
게다가 강의 북쪽에서 이쪽의 움직임을 낱낱이 관측하고 있는 독일군이 이쪽에서 
도하용 보트를 물에 띄울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을 것인가? 박격포는 바로 
이럴때 쓰라고 존재하는 무기가 아니던가 말이다.
또 설사 요행히 강뚝에 도달하여 급류속에 보트를 띄우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보나마나 독일군이 퍼붓는 전 화력이 이 물위에 떠있는 
조각배들을 향해 집중될 것이 뻔한 것이다.
제36사단장 워커장군은 거의 절망적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이미 진 싸움이다. 강 건너편에서 적군이 우리를 빤히 지케보고 있는 중에 
이루어지는 도하작전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말단 병사들의 반응은 그보다도 좀더 직설적이었다.

"이건 우리더러 그냥 죽으라는 거야. 우리는 살레르노에서, 미냐노에서 이미 죽을 
고생을 치렀지만 그때는 몸을 숨길 돌멩이라도 있었어."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1월 20일 후, 도하작전이 개시되었다.
제141기, 제143 2개 연대의 병사들은 각기 개인화기와 함께 상륙용 보트를 끌면서 
강뚝을 향해 진창속을 헤쳐 나갔다.
다행하도 짙은 안개가 그들의 모습을 가려 주었지만, 이 행운도 그리 오래 
계속되질 않았다.
맨 선두에서 12인승의 목제 보트를 끌고가던 전투 공병대의 한팀이 지뢰에 
걸리면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날아가 버리는 것이 신호탄이었다.
아직 강뚝까지는 1.5km나 남아 있었지만, 이 폭음으로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챈 
강건너 편의 독일군이 박격포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앞서 전진하는 공병들이 
가까스로 지뢰를 제거하고 그 통로를 표시해둔 흰색 테이프개 포탄에 찢겨나가 
서렁속에 처박히면서 혼란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포탄을 피하기 위해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지뢰밭 속으로 뛰어 들었고, 그들이 
운반하고 있던 상륙용 보트는 풍지박산이 났다.
141연대의 병사들이 가까스로 강뚝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이미 이 도하작전이 
실패하고 있다는 징후가 확연했다.
강에다 배를 띄워 보기도 전에 절반 가까운 병사와 보트가 날아가 버렸고, 가장 
먼저 도하에 성공한 공병들이 후속 병사들을 위해 가설하도록 운반해왔던 베일리식 
가교는 이미 고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총알구멍이 숭숭 나있던 보트는 물에 띄우자마자 곧 가라앉아 버렸고, 도하를 
개시한 병력은 8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넓은 곳이라고 해야 15m 정도에 불과할만큼 강폭이 좁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고, 가까스로 북쪽대안에 닿은 병사들이 강뚝에다 참호늘 파고 
들어앉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점점 짙어가는 어둠과 안개 덕분이었다.
어둠과 추위에서 덜덜 떨면서 이들은 후속 부대가 건너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공병대가 마침내 엉성한 가교 하나를 설치하는데 성공한 것은 그 이튿날인 1월 
21일 새벽 7시경이었다. 이 다리늘 통해 300여명의 병사들이 더 건너왔지만, 날이 
밝자마자 독일군의 집중공격 목표가 된 그 다리는 곧 파괴되어 버렸다.전화선이 
절단되고 무전기까지 고장나자 강을 건너온 병사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 그들은 
먹이를 향해 잔뜩 벌린 맹수의 아가리 앞에서 오돌오돌 떨며 주저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날이 밝자 독일국의 전차와 자주포들이 도습을 나타냈고, 강변에 웅크리고 있던 
미군의 빈약한 교두보는 이들의 십자포화를 뒤집어 쓰고 전멸해 버렸다.
그날 오후늦게 다시한번 도하작전이 시도되었다. 이날은 안개조차 끼지 않았으므로 
포병대가 발사한 자욱한 연막속에 몸을 숨기고 도하 부대는 앞으로 나아갔다.
143연대의 '빌리 커비' 중사는 그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어떻게 강에다 보트를 띄우고 거기에 올라탔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강똑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맹렬한 포격에 완전히 정신이 빠져 있었고, 보트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지만 용케도 물위에 떠 있었다. 나는 강을 건너는 동안 
수많은 전우들이 빠른 물살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거리며 떠내려 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맞을편 대안에 도달했을때 발견한 것은 강기슭에 쌓여 있는 무수한 시체의 
산이었다. 살아있는 아군은 한명도 없었다. 독일군의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자 그 
시체들이 가랑앞처럼 데굴데굴 구라고 있었다."
느맀느맀한 포복으로 강뚝에 쳐진 철조망 지대를 통과하면서 커비중사는 악귀처럼 
집요하게 사격을 퍼붓고 있는 독일군은 저주했다. 그리고 그들을 이 지경으로 내몬 
지휘관들을 저주했고, 빌어먹을 놈의 강물을 저주했으며, 전쟁을 저주했다.

"그렇게 어둠속을 한참 기어가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문득 나혼자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바로 머리 위에서 독일군들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참동안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물컹하는 것이 
만져졌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 중대장의 시체였다.

그때 요란한 폭음이 울렸고, 커비는 거의 본능적으로 물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기었다. 강가에 도달한 그는 헤엄쳐 건너기 위해 군화를 벗으려 했지만, 그때 
자신의 양쪽발이 없어져버린 것을 발견했다.
전투는 그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다. 공병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라피도 강에는 
세번이나 가교가 건설되었지만, 세번 모두 독일군의 포격에 의해 절단되었다.
제36사단은 2개 연대의 대대장 6명중 4명이 전사했고, 1명이 중상을 입을 지경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간신히 강을 헤엄쳐 건넌 소수의 병사들이 벌벌 떨며 
돌아온 것을 제외한다면 도하작전에서 투입되었던 병력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날 밤 11시경이 되자 강 양편에서 총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고, 마침내 
끊어졌다. 강 건너편에서 고립되어 있던 미군 병사들은 남김없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약 48시간에 걸친 이 전투에서 36사단은 1000명이 넘는 병력이 전사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참극은 곧 '라피도 강의 대학살'노 알려지게 되었고, 종전후에는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청문회가 딜리기도 했다.
당연히 제5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에게 따가운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만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훗날 '로버트 페터슨' 육군 장관이 결론을 내린 것과 같이,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인간에게 치르기를 요구하는 당연한 댓가의 일부'였고, 안지오에 
상륙하는 연합군 부대를 위해 그 작전은 반드시 필요했으며, 클라크 장군은 
자신에게 지워진 의무를 다했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제5군은 라피도 강가에서 재난을 맞고 있을때 제5군 예하의 일부가 
안지오에 상륙했다.
그들은 예정되어 있던 지원군이 전혀 없는채로 적지의 배후에 떨어져 버린 것이고, 
그로인해 지옥과도 같은 안지오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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