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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w ] in KIDS
글 쓴 이(By): kelvin (정 상 희)
날 짜 (Date): 2001년 4월 15일 일요일 오후 02시 58분 28초
제 목(Title): 두 얼굴의 법 


 [권두시론] 두 얼굴의 법, 그 '배후'
 
 김 충 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정치에 있어서의 법이란 참 무력한 듯하면서도, 어떤 때는 유력하게 힘 을 
쓰는 두 얼굴의 존재다. 특히 한국 정치라는 특이한 씨름판, ‘정서와 목청’이 
승부를 가르는 이 무대를 통해 볼 때 법은 개밥의 도토리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법이 정치 마당에서 어느 한 순간에 솔로몬 대왕 같은 
존엄스런 대접을 받기도 한다는 점이다. 한 예로 민주 당의 이인제 최고위원의 
후원회장 문제로 여러 말이 나오고 결국 후원회 장이 물러난 케이스를 들 수 
있겠다. 경북대 총장이 이 위원의 간청을 받 아들여 회장직을 수락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것을 놓고 능히 ‘예상’하고 짐작할 수 있었던 사태가 
다가왔다.
   경북대 안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찬반으로 갈려 격론을 벌인 것이다. 말 이 
찬반이지 그거 잘했다는 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가늘었고, “총장이 경 북대 
간판을 팔아 곁불을 쬐려 한다” “총장으로서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이다”는 
등 반대 목소리가 압도했다. 총장은 이 위원의 청에 못이겨 이름 을 빌려준 
정도이지 업무에 무슨 지장이 있겠느냐는 항변이었지만, 결 국은 지역 정서와 
주변의 대세(?)에 밀려 후원회장을 사퇴하고 말았다. 
   교수나 학생들이 후원회장 취임을 반대하면서도 법을 어긴 것이라거나, 법에 
비추어 안 맞는 것이라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아무 런 문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곁불을 쬐려 한다는 추측성의 혐의(?) 역시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예를 들면 이수성 전총리의 경우 여러 여야 
의원(학연상의 동문 제자들이 대부분이지만)의 후원회장 을 맡고 있고, 숱한 
교육계 인사들이 후원회를 거들고 있으나 거기서 결 코 ‘곁불’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으나, 전남 광주의 한 대학 총장이 한나라당 부 
총재(역시 대권주자의 범위에 드는)의 후원회장을 맡을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대학에는 “지역을 팔아 일신상 의 출세를 
노린다”는 식의 대자보가 나붙을 법하지 않은가. 그 경우 총장 을 나무라야 
할것인가, 극렬 학생을 자제하라고 해야 할 것인가. 
   또 달리 예를 들어, 강원도나 제주도의 대학 총장이 한나라당 총재의 후 
원회장을 맡았을 경우 그 학내에 찬반 논란이 벌어진다면, 객관적인 입장 의 
사람들은 어떻게 진정시켜야 옳을 것인가. 그렇게 보면 경북대 총장 문제는 
어느 정도 선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원칙이나 상식, ‘룰’로서의 법은 감정과 목청에 휘둘려 설 자리 를 
잃고 만 셈이 아닐까. 법적으로 당당한 판단, 교육자로서의 명예를 건 자기 
선택이라 할지라도 지역 정서나 지역 여론에 부딪히면 도리없이 무너지는 것이 
정치 현실인 것이다. 물론 영남의 지역 정서가 첨예하게 된 배경, 역대 정권과 
현 정권의 책임, 이런 복잡한 것들을 종합해서 보 면 논의가 길어지게 
되겠지만, 합리와 이성, 과학보다는 감성과 정서, 우 격다짐의 목청이 우위인 
현실인 것이다. 
   정치인들이 수사에 응하지 않고 체포를 면하기 위해 이른바 ‘방탄 국회’ 
를 여는 것도 법을 조롱하는 행위다. 여기서 법은 딱하도록 무력하다. 어 떤 
변호사 자격이 있는 국회의원은 자기가 피소된 사건은 나가지 않고 다른 
의뢰인의 사건으로는 검찰, 법원을 들락거려 재판부의 분노를 사기 도 했다. 이 
경우 법은 부질없는 것이요, 무용지물 같기만 하다. 
   반대로 법이 정치에서 굉장한 위력(?)을 떨치는 수도 있다. 정치판의 싸움 
이 치열해지면 검찰에 쫓아가거나, 법원에 소송을 내는 상황을 보면 그 런 
생각이 든다. 이때는 아하, 법이라는 게 정치보다도 위에 있는 것이로 구나 
하고 실감하게 된다. 법이야말로 높고 높은 정치권의 분쟁까지를 해 결하는 
칼자루를 쥔, 참으로 위력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이 다.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 정치처럼 법을 향해 ‘고자질’을 많이 하는 정치도 
세계적으로 드물지 않을까. 지난해 낙천 낙선운동 와중에서 벌어진 숱한 
소송공방이 기억에도 선명하다. 이를테면 서울 지역의 한 의원은 총선연 대의 
낙천낙선운동에 자기가 포함된 데 대해 명예훼손이라고 총선연대 를 고소하고, 
총선연대는 “공익적 운동을 부정하는 의정보고서를 만들 어 뿌렸다”며 이를 
배포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던 것이 다. 강원도, 전남, 충북의 
전·현 의원, 전직 장관 등도 총선연대를 겨냥해 비슷한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그 무렵 야당이 모 경제연구소를 고발했다. “총선에서 여당이 지면 증시 가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증시전망 보고서를 낸 것이 야당에 불리하다 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식의 고소 고발이 넘치고 넘친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현 
정부 들어서서 제기된 정치인 관련 고소 고발 건수는 120여 건 을 넘기고 있고, 
그중 4분의 1 정도가 고소취하 혹은 검찰의 각하 및 기소 유예로 종결되었을 뿐 
대부분은 그대로 다툼거리로 살아 있다고 한다. 
   정치에서 비롯된 싸움을 법으로 끌어들여 확전을 꾀하거나, 정치 싸움에 서 
이득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법을 끌어들이는 사례가 수없이 많다. 더 러 
권리구제를 위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일단 저잣거리의 싸 
움질에서처럼 큰소리부터 치고 보자는 듯이, 소송부터 걸어 놓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다. 걸핏하면 법을 걸고 싸우고 법에 고자질하는 바람에 법의 
권위는 서는 게 아니라 그만큼 납작해지고 만다. 

   문제는 법이 무력하고도 한편으로 유력한 두 얼굴의 유령처럼 되고 만 것이, 
법을 배우고 익힌 고도의 기술자(?)들의 공이라는 데 있다. 역대 여 당이나 
야당에는 수많은 법조 출신 변호사들이 크고 작은 자리를 맡아 당을 이끌곤 
했다. 그런데 이분들 가운데 법조인의 초심(初心)을 간직한 채 법의 정신에 
충실해 가며 정치를 했다고 하는 분들은 별로 꼽히지 않 는다. 
   언제나 여당에서는 정치적 목적이 빤한 올가미를 야당 의원에 들이대면 서, 
“법치에 순응하라”는 호령이다. 야당에선 예외없이 “검찰이 편파수사 로 
법의 정신을 해친다”는 맞고함으로 대응한다. 더러 억울한 일도 없지 
않겠으나, 야당 의원의 명백한 범죄조차 정치화시켜 상계하려 하는 수 도 있다. 
   이런 여야의 법률 기술자들의 교묘한 논리 제공, 사실 호도 작전에 국민 은 
정작 무엇이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정치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 
법을 흔들고 무너뜨리며 망치는 데 일부 법조인들이 기여한다 는 결론인 
것이다. 정치의 땟국물이 법조를 흐리게 하고 법에 대한 신뢰 를 떨어뜨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법이 법다운 중립, 도덕성으로 빛나고, 법조의 맑은 양식이 
정치에 스며들 때 정치도 바로 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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