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5시09분25초 KDT 제 목(Title): 최상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權相老, 창씨명 安東相老, 1879∼1965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3년 {임전의 조선불교} 간행 불교계 최고의 문필가이자 편집자 1895년 4월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자 이를 주선한 일본승려 사노 (佐野前勵)에게 감사장을 준 경력이 있는 최취허(崔就墟)는 {조선불교월보} 창간호(1912. 2. 25)에 '한일합방'을 '일본천황의 성덕'이라 하고, 또한 사 찰령의 반포를 '총독의 밝은 정치(明政)'라는 등의 노골적인 친일발언을 하 였다. 또 전등사 주지 김지순(金之淳) 역시 [성은(聖恩)으로 사법인가(寺法認 可)]라는 글에서 사찰령 시행을 '천황의 성은'으로, 각 본산법의 인가를 '총독의 공적으로 치하하는' 몰지각하고 반민족적인 발언을 {조선불교월보} 제10호(1912. 11. 15)에 발표하였다. 최취허와 김지순 이 두 사람의 친일행각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들의 친 일적인 글을 게재한 {조선불교월보}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던 권상로에게도 상당 부분의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발행인이자 사장으로서 편집권을 가진 그가 민족적인 자각의식이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글을 싣지 않았을 터이지 만 권상로가 그들의 친일성향의 글을 게재했다는 것은 그가 '합방' 초부터 친일의식이 다분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출가 전 향리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공부하고 18세에 출가하여 김룡사 대 교과의 이력(履歷)을 마친 뒤 원종(圓宗)의 찬집부장(纂輯部長)으로 중앙무 대에서 활동을 시작하여(1909), 그 후 {조선불교월보}(1912. 2∼1913. 8. 통권 19호)와 {불교}지(1924. 7∼1933. 8)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던 유능 한 편집인이자 일제시대 조선불교계가 처음으로 조계종이라는 종명(宗名)을 확립하고 심혈을 기울여 건립한 총본산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의 상 량문을 비롯해 근래 우리나라 불교계 최대의 호한한 문장을 남긴 최대의 문 장가였던 권상로.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낸 것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 였다. 권상로는 1937년 8월 6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주 최하여 열린 첫번째 시국인식 친일강연에서 2300여 명의 청중들에게 '선각 자로서'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소리 높여 외쳤 다. 총독부 시국강연반의 연사가 되어 권상로는 부민관의 첫 친일강연 이후 총독부 시국강연반의 불교측 연사로 서 8월 7일 경북지방으로 시국강연 여행을 떠나 1주일 동안 일제의 국체(國 體)에 투철하여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경북지방의 친일 강연에서 돌아와 8월 20일에는 총독부의 시국회의 에 참석한 뒤 오후에는 용산역으로 나갔다.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벌써 일본군의 유골이 속속 조선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던 용산으로 오고 있었다. 권상로는 중앙교무원의 간 부 이종욱*, 황금봉 등과 함께 용산역에 도착하는 출전장병 유골 영접차 조 기(弔旗)까지 들고 용산역 구내에 출영하여 유골행렬과 함께 계행사(偕行 社)에 가서 전사한 일본군의 영전에 독경·분향하였다. 시국인식강연회의 불교측 연사로서 총독부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은 그 는 이번에는 함경북도 지방으로 순회강연을 떠났다(1937. 9. 5). 이리하여 함북 고무산(古茂山)에서 시국강연중이던 권상로는 '불교측에서도 시국 삐 라를 제작·배포하고, 시국순회강연을 개최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중앙교무 원으로 보냈다. 친일승려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행동이었다. 권상로가 행한 이 두 번의 시국순회강연은 총독부가 중일전쟁이 발생한 직후인 1937년 7월 15일에 임시지사회의를 소집하여 전쟁과 관련한 시국에 대해 조선민중에게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논의하여 총독부 학무국이 결성 한 1, 2차 전조선 순회시국강연반의 일원으로서의 친일활동이었던 것이다. 그의 친일 강연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승려와 불교신도들 대상으로도 행하 여졌다. 1938년 7월 20일 법주사와 보은군청이 합동으로 주최한 시국강연회에 연 사로 나가 150여 명의 불교신도들에게 '시국과 불교'라는 제목으로 친일 강 연을 하였고, 7월 22∼31일에는 법주사 승려들에게 전쟁시국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그의 친일 강연 행각은 8월 7일부터는 건봉사로 이어졌다. 건봉사 와 본말사가 연합하여 주최한 시국인식 순회강연회 연사로 초빙된 권상로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杆城), 양양읍, 고성읍 등지에서 '시국과 불교', '불교 의 호국주의' 등의 제목으로 600여 명의 청중에게 시국강연을 하였다. 권상로는 9월 6일에는 경북 영주읍 김룡사 포교당과 각사 연합 시국강연 회에 참석하여 영주와 풍기의 심상소학교에서 역시 앞서와 유사한 제목으로 친일강연을 하였다. 그의 시국강연은 다음 해에도 이어져 1939년 7월 24일 심원사(深源寺)에서 개최한 강연회에 연사로 나가 철원군 신서면 대광리에 서 250여 명의 청중들에게 '불교의 시대성'이라는 제목으로 시국강연을 하 였다. 승려들에게도 지원병을 권유 1938년 2월 2일 조선인 병력자원화정책의 일환으로 총독부가 '육군특별지 원병제'를 실시하자 중추원 참의 최린*, 관동군 고문 한상룡*, 1급 친일파 박춘금* 등의 친일분자들이 앞다투어 '내선일체 정신으로 보아서 경하할 일'이니, '조선인으로서의 진로에 일대 광명'이라고 환영하고 나서자, 불교 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친일학승 권상로도 [승려 지원병에 대하 야]({불교시보} 제57호, 1940. 4. 1, 1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이에 적극 호 응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에는 징병제가 실시되지 않아 병역의무를 행하고 하 는 자가 있으나 그 길을 얻지 못하야 장지(壯志)를 품고 차탄(嗟嘆:슬프게 한탄함)하는 자를 위하여 부득이 지원병 제도가 생기었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 그가 정녕 조선 승려인지 의아스러울 지경이었다. 조국을 강제로 빼앗고 탄압을 일삼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 치려는 어떤 얼빠진 조선 사람이 있다고 감히 권상로는 이런 억지논리를 함 부로 교계신문에 발표했을까? 자기 나라를 위한 애국전쟁에도 목숨이 아까 워 몸을 도사리는 예가 없지 않은데,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의 침략전쟁에 나 가 개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더구나 권상로는 전쟁을 금기시하는 불교승려로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사 실이었을까 하는 의아스런 얘기를 부끄러움 없이 늘어놓았다. 금반 제3회의 모집에는 지원병수가 6만을 초과하게 되고 그 중에는 청 년 승려로서 지원하는 자도 있어서 설봉산(雪峰山) 귀주사(歸州寺:함경남 도 함주군에 있는 31본사의 하나)를 필두로 하여 오대산 월정사와 내금강 장안사(長安寺)에서 모두 4, 5인씩의 지원자가 있다 하니 그외의 다른 사 찰에도 없지 아니한 듯하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불교자로서의 탈선적이 아닌가 하지마는 아니다. 이 역시 불교의 본령(本令) 중의 하나이다.…… 백제의 도침(道琛)대사는 국망(國亡)함을 분개하야 의병을 일으키어서 복 국(復國)을 꾀하였고, 이조의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泗溟)대사의 여러 법형제(法兄第)는 판탕(板蕩)을 당하여 장검입공(仗劍立功)하였고 벽엄 (碧嚴)대사는 병자의 난에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고……그 밖에도 남북 한(南北漢)에 치영(緇營:승군이 주둔하던 병영)을 두고 승군을 양성하던 것이 아직 어제인 듯하니 금일과 같은 초비상시국을 당하여 의용(義勇)이 있고 지개(志槪)가 있는 청년 승려로서 분연히 일어나서 지원병에 응모하 는 것은 불교의 본령을 잊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이 조선불교의 고유한 색채를 실(失)치 아니한 자이다.({불교시보} 제57호, 1940. 4. 1, 1면) 조선 승려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가 살인을 하는 것이 불교의 본령이라 는 주장도 조선의 대표적인 학승의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노릇이지만, 임 진왜란시 사명대사가 왜군을 상대로 일으킨 의병을 예로 든 것은 실소를 금 할 수 없다. 한때는 조국산하와 동족을 짓밟는 왜군에게 정의의 칼을 들고 항거한 조 선 승려가 이제는 형세가 바뀌어 그들의 침략야욕을 위하여 총검을 들고 죄 없는 중국인들을 살상하는 만행에 동참해야 한다고 선두에 서서 부르짖은 권상로의 자가당착적인 행각은 참으로 가소로운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1940년 5월 25일 권상로는 김태흡*과 함께 양주(楊州)군청이 주최한 시국 좌담회에 참여하였고, 10월 10일에는 왕십리 무학(舞鶴)학교에서 1500명의 청중에게 시국강연을 하였으며, 10월 12일에는 홍제정(弘濟町) 향상대(向上 臺)에서 3000명의 군중에게, 이틀 뒤인 10월 14일에는 창의(彰義)학교에서 1600명에게, 그 다음 날(10. 15)은 돈암정(敦岩町) 광장에서 1400명에게, 16일에는 만세교 광장에서 1500명의 청중에게 시국인식과 불교에 대해 친일 강연을 하였다. 또 그는 총독부의 어용신문 {매일신보}에 [응징성전(膺懲聖 戰)과 불교]라는 친일 시사문을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성전'(聖戰) 으로 미화하였다.({매일신보}, 1941. 9. 6∼9) 그는 이 글에서 "현하의 성전이 대동양주의에 완항(頑抗) 또는 불용명(不 用命)하는 자를 응징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중일전쟁이 중국 국민 당 세력이 너무 커지기 전에 화북과 내몽고를 될수록 많이 뜯어먹자는 목적 에서 일본 군부가 일으킨 침략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권상로는 "성전이 토지 등 야욕에 있지 아니하고 은원(恩怨)이 없이 공존공영하자는 대동아공영권 을 건설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이어서 "반야지혜(般若智慧)----대원만 제일의(大圓滿第一義)----를 체득한 자에게 는 삼계(三界) 일체 중생을 살해할지라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이것이 불교의 대승적 견해이며 근본적 교리라고 부연하여 중일전쟁에 지원한 조선 청년과 승려들이 일제(日帝)의 팽창야욕을 충족시키고자 무고한 중국인을 살해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는 논리를 폈다. 승려로서, 특히 조선의 대표적인 학승으로서 이렇듯 붓다 의 정법(正法)을 일제의 가공할 전쟁과 살상의 명분으로 오용하였다는 것은 정녕 불보살(佛菩薩)과 진실한 불교도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망동을 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간부가 되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미일관계마저 틈이 벌어지자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엄한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일제는 종전의 국민정신총동원조 선연맹을 해체하고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재출발시켰다. 권 상로는 이 총력연맹에 안토우(安東相老)라는 창씨명으로 임원인 참사가 되 어 일제의 총력전시체제에서 황민화운동에 앞장을 섰다. 총력연맹의 간부가 된 권상로는 그 직책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친 일행각이 한층 극렬해졌다. 1941년 2월 23일부터 6일간 전북도청 주최로 황도불교선양을 위한 도내승 려강습회가 전주부 완산정 조선불교연합포교당에서 개최되었을 때 권상로는 총력연맹 참사(參事)와 혜화전문학교 강사(당시 그는 일본인이 교장으로 취 임하면서 학력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에서 강사로 강등되었다)의 직함으로 전북도내 각 본말사 주지와 포교사 50여 명에게 '국민총력운동과 승려의 각 오', '시국과 조선불교' 그리고 '불설선생경'(佛說善生經)을 강의하였다. 총독부는 전쟁의 장기화와 확대에 따른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 해 근로동원과 보국을 결부시키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권상로는 이 방침에 호응해 정무총감 오노(大野綠一郞)의 논설 [국민생활 쇄신과 노력봉사]가 실린 {춘추} 1941년 11월호에서 박인덕*, 신흥우(申興雨), 이종린(李鐘麟), 최린*과 같이 '국민개로운동의 실천요항'을 논의하였다. 격렬하다 못해 광적인 권상로의 친일논설들 권상로의 친일논설은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매일신보}에 1편, {신 불교}에 8편, {불교시보}에 3편 등 도합 12편이 있으며, 따로 19편의 친일 논설을 엮은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라는 단행본이 있다. 이처럼 많은 그의 논설들을 지면의 제한을 받는 이 책에서 그 모두를 자 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고 그 내용과 어조가 격렬하고 아주 광적인 것만 간 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권상로는 태평양전쟁 발발(1941. 12. 8) 직후인 1942년 1월에 {신불교} 제32집(1942. 1. 1)에 [대동아전쟁과 대승불교]라는 글에서 전쟁의 상대국 인 미국과 영국 등을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안토우(安東相老)라는 창 씨명으로 발표한 이 글에서 "미·영의 동양에 대한 야욕은 품어온 지가 오 랠 뿐만 아니라……침침한 눈과 음험한 심장은 동양 전부를 몰탄(沒呑)하려 는 획책을 가지고 혹은 종교로 혹은 물질로 혹은 채권으로 혹은 무력으로" 동양을 호시탐탐 노려왔다고 매도하면서 "동양의 공영을 위하고 질서의 신 건(新建)을 위하여 일억일심(一億日心)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불굴불요 결사 (決死)의 매진(邁進)"하자고 부르짖고 있다. 그는 8대 조선총독 고이소(小磯國昭)가 부임하자 재빨리 그의 총력전체제 에 적극 호응하여 [전시(戰時)의 전책임을 맡으라]({신불교} 제42집, 1942. 11. 1)고 외치고, 대동아전쟁 1주년에는 전쟁의 발발 시점과 석가모니의 성 도일(成道日)을 결부시켜 다음처럼 진리를 왜곡·오도하기도 했다. 보라. 12월 8일, 곧 여래의 성도하시는 성절(聖節)에 성전(聖戰)의 대 조(大詔:일왕 쇼와의 선전포고)가 내리시며 그 순간에 대동아의 마왕 파 순(波旬)의 궁전인 미·영의 근거지가 함락되었으니 이 어찌 석존의 성도 하시던 찰라에 항마(降魔)하심을 실현함이며 12월 25일 곧 크리스마스에 피(彼)의 사수하던 소남도(昭南島)가 함락되었으니 이 어찌 석존의 성도 하신 후에 모든 외도의 마멸상(磨滅相)을 실현함이 아니랴. 이것은 절대 인위적으로 일부러 그리한 것이 아니요 자연적으로 그렇게 주합(湊合)된 것인즉, 이 수 점(數點)으로만 보아도 금번 대동아의 성전은 틀림없는 여 래의 사명인 것이 분명하다.({신불교} 제43집, 1942. 12. 1, 8면) 전쟁이 점차 장기화되자 일제는 조직적으로 조선의 각종 물적 자원을 수 탈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금속류 회수'였다. 그래서 조선사찰에서 놋그 릇, 촛대, 범종, 쇠종 등을 총독부에 헌납하였는데 경성 일대에서만 태고 사, 안양암, 봉은사, 수종사(水鐘寺), 사자암(獅子庵) 등에서 범종을 떼어 일제에게 바쳤다. 권상로는 [불상(佛像)의 장행(壯行)]({신불교} 제48집, 1943. 5. 1)이라 는 글에서 "대동아의 성전은 유유히 결전기(決戰期)에 임박하였다"고 서두 를 뗀 뒤 조선에 진출한 진종(眞宗) 서본원사파의 3000여 신도들이 지성으 로 모은 3000여 철제 불상을 헌납했다는 신문보도를 소개하고는 아주 절절 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감격하며 얼마나 황송하며 얼마나 장쾌하냐. 전승(戰勝)을 위하여 교주의 성상(聖像)까지 내어바친다는 것은 불교가 아니면 없을 것 이요 일본이 아니면 없을 것이다. 체적(體積)이 분촌(分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출동하셨으니 듣기에 얼마나 감격하며, 중량이 치수 (★銖:아주 가벼운 무게)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헌납이라니 보기 에 얼마나 황송하며, 국가를 위하여서는 불상까지 응소(應召)하다니 참으 로 비할 데 없이 장쾌한 바이다. 불교신도가 대다수인 일본이 오죽 다급하였으면 신앙의 경배대상인 불상 까지 회수하여 무기를 만들었을까? 이런 처절하고 안타까운 정경에까지 감 격하고 황송해 하고 장쾌하게 여긴 권상로의 친일심리는 광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적절한 어휘가 없을 듯하다. 1943년 8월 6일 권상로는 고양군 숭인면 경국사에서 징병제감사기도법요 를 근행하고 '국민개병의 보은감사'라는 제목으로 친일강연을 하였다. 권상로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는 1944년 9월에는 오히려 일제의 전시체 제에 더욱 친일의식을 강화하여 결연한 어조로 '결전체제와 조선불교'에 대 해서 이렇게 외쳤다. 시국은 날로 긴박하고 결전은 하루가 바쁘다. 기기(器機)로 경제로 사 상으로 다방면에 긍(亘)하여 우리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의 결심으로 대동 아공영권을 실현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제국(帝國)의 안위가 염려되는 터 인즉 차시를 제(際)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정신이 통일되어야 할 것은 재언을 요할 필요까지도 없다.({신불교} 제64집, 1944. 9. 1, 6∼9 면) 그는 이어서 재삼 "죽음으로써 나라에 갚는다는 마음을 철두철미하게 가 질 것"을 강조하면서 "적 미·영을 타도하자"고 절규하고 있다. 시간이 흐 를수록 가열된 그의 친일의식은 위의 글을 발표한 바로 다음 달에도 태평양 전쟁을 위해 "용맹정신으로 가행하라, 황은보답이 정히 금일에 있다"고 열 렬하게 부르짖었다. 또한 그는 조선"반도 2600만이 메이지 천황의 일시동인 (一視同仁)으로 일본의 적자(赤子)가 된 지도 벌써 35년이 되었다"면서 "천 황의 황은에 목욕하여 낙토안거"하였으니 "국가유사의 추(秋)를 당하여 진 충보국하자"고 역설하고 있다. 권상로의 친일불교 가운데 하일라이트의 하나는 단행본으로 {임전(臨戰) 의 조선불교}(만상회, 1943, 문고판, 91면)를 간행한 일일 것이다. '성불은 전승(戰勝)이다', '계(戒)는 전투훈(戰鬪訓)이다' 등 친일로 윤색된 불교관 이며 일본에의 충성을 역설하는 그의 이 책은 다른 친일논설과 함께 근년에 발간된 그의 방대한 유고집 {퇴경당전서}(退耕堂全書) 전10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마디 참회의 말과 단 한 번의 포살(참회의 불교식 용어) 행위라도 있었 다면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 공과 잘못을 모두 기록하는 것이 전 모를 파악하고 역사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인들 은, 특히 어떤 사람을 기리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일면, 흔히 장점이나 업 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만을 집대성하는 경우가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 다. 필자는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퇴경당(권상로의 호)의 그 유려한 문장과 호한한 작품의 분량에는 존경을 보내지만 또한 그가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일 제에 적극 협력하여 생애의 많은 시간을 친일학승으로 탕진한 것을 안타깝 게 여긴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가 일제시대의 친일행적에 대한 단 한 번의 포살 행 위도 없이 후안무치하게 해방 후 불교대학의 최고위직에 앉은 점과 1962년 에는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진정한 승려, 참 다운 구도자였다면 한국불교를 위해 광복 후에 은인자중하고 제불제조(諸佛 諸祖)와 이 땅의 불자들에게 진실한 참회를 하였더라면 한국의 불교가 이토 록 소란하고 황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 임혜봉(불교사연구가) 주요 참고문헌 {朝鮮佛敎月報}. {佛敎時報}. 權相老, {臨戰의 朝鮮佛敎}, 卍商會, 1943. {退耕堂全書}.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