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5시10분43초 KDT 제 목(Title): 김태흡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金泰洽, 창씨명 金山泰洽, 1899∼1989 ·1935년 {불교시보} 발행인 1937년 이후 친일포교사로 맹활약 총후보국지 {불교시보} 발행 불교도와 일반인들에게 김대은(金大隱) 혹은 석대은(釋大隱) 스님으로 알 려져 있는 김태흡은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이수하고 10년 동안 독학으로 일 본 도쿄에서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한, 일제 시기의 대표적인 엘리트 승 려였다. 김태흡은 일본 유학중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수만 명이 살육되 는 재난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는 체험을 하고, {불교} 제35호(1927. 5. 1) 에 [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부가 삭제되는 등 반일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28년 귀국 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초대 중앙포교사로 활동 하다가 1935년 8월에 {불교시보}를 창간(1944년 4월 종간)하면서 급격하게 친일파로 전락해 갔다. {불교시보}가 창간된 시점은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의 전개와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김태흡은 {불 교시보}에 중앙교무원의 서무이사 김정해(金晶海)가 쓴 [심전개발의 3대 원 칙에 취(就)하여]를 비롯한 심전개발의 목적과 실행사항 등을 자세하게 보 도하여 일제의 조선민족 동화(同化), 즉 일본화와 순량화(順良化) 정책의 실천에 적극 동조·협력하였다. 우가키 총독 시대에 진행된 심전개발은 ① 주체관념의 명징 ② (일본식)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과 신앙심 함양 ③ 보은·감사·자립의 정신 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일제의 군국주의로의 변신 을 반영한 식민통치의 이론적 집대성이었다. 김태흡의 {불교시보}에는 이러 한 시대상황에 재빠르게 영합하는 심전개발운동에 관한 기사가 가득했다. {불교시보}에는 본산주지들의 심전개발사업, 김천·동래·군위·임실·전 주군의 각 군청과 사찰에서 행하는 심전개발운동에 대하여 자세하게 보도하 였다. 또한 {불교시보}는 경성방송국에서 행한 불교측 심전개발강화(講話) 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게재했다. 즉, {불교시보} 제3호(1935. 10. 15, 7면) 에는 불교측의 이지광(李智光), 박성권(각황사 포교사), 김경주(金敬注:佛 專, 즉 불교전문학교 學監), 박윤진(불전 강사, {불교시보} 직원), 김태흡 (불전 강사, 불교시보 주간·발행인), 권상로*(불전 교수) 등이 1935년 4월 7일부터 9월 17일까지 16회에 걸쳐 행한 심전개발 방송에 대하여 방송날짜 와 연제 및 연사에 관하여 게재한 것이다. 당시 김태흡은 {불교시보}의 발행인이자 봉은사의 상임포교사이며 불교전 문학교의 전임강사이기도 했는데, 그는 봉은사 주최의 심전개발 순회포교와 전등사, 개풍군, 강원도 등에서 개최한 심전개발 순회강연에도 적극 참여하 여 수많은 강연을 행하였다. 예를 들면 심전개발 제2기에 해당하는 1936년도에 김태흡은 4월 12일부터 7월 31일까지 세 차례 22회에 걸친 심전개발 강연을 하였다({불교시보} 제 13호, 1936. 8. 1, 7∼8면). 조선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은 강원도만이 아니라 경상·전라·충청·함경 도 등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경쟁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에 관해 {불교시보}는 미주알고주알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자세하게 보도하여 일제의 조선민족 황민화정책에 크게 일조하였던 것이다. 김태흡은 일본 유학시절 조선불교 일본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 {금강저} (金剛杵)의 창간과 편집에 참여하여 모두 10편의 글을 이 잡지에 발표했다. 또한 그는 고학을 하면서 인력거 발판과 공원 벤치 등에서도 집필을 하고 귀국 후에도 열심히 글을 써서 {불교}가 창간(1924. 7)되어 종간(1933. 8) 될 때까지 산문 88편과 운문 17편, 희곡 11편, 소설 7편 등의 방대한 양의 글을 {불교}지에 게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일제시대 초기 이광수*와 김동인*이 2인 문단시대를 형성하였듯이 1920년 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불교계에는 김태흡과 권상로가 쌍두마차 처럼 당대 불교언론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작품의 양으로서도 그러했고 권상로가 {불교}의 통권 108호 의 대부분을, 그리고 김태흡이 {불교시보}를 10년 동안 단 1호의 결호도 없 이 통권 105호를 편집·발행한 업적 등에서도 쌍벽을 이루었다. {불교시보}는 창간사에서 '심전개발운동의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어 서'라는 말을 했듯이 출발부터 친일성향을 드러냈고, 중일전쟁(1937. 7. 7) 과 태평양전쟁(1941. 12. 8) 기간에는 열성적인 총후보국지(銃後報國誌)의 역할을 하였다. {불교시보} 통권 105호 중 현존하는 것이 95개호인데 이를 중심으로 친일 성향의 행적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불교시보}에는 전94편 사설 중 시국을 언급한 친일 사설이 39편, 무기명 친일 기사와 총독의 훈시 따위가 30여 편이었고, 기명 친일 기사로는 김태 흡이 19편, 이종욱*(31본사주지대표, 1941년 조계종 종무총장, 월정사 주 지)이 4편, 권상로(불전 교수)가 2편이며, 김영수(金映遂:불전 교수), 김경 주(불전 학감), 방한암(方漢岩:초대 조계종 종정) 등 12명이 각 1편씩의 글 을 게재했다. 시국에 관한 전37편의 기명으로 {불교시보}에 발표된 글은 거 의 대부분이 적극적인 친일성향의 글들이었다. 특히 발행인 김태흡은 전체 의 반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양의 친일 일색의 글을 집필·게재함으로써 당 시 유일했던 조선불교계의 신문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리고 {불교시보}는 '천황부처'의 사진이나 일본 궁성의 사진, [황국신 민의 서사], '신앙보국 내선일체' 따위의 광고문 등 전적으로 친일적인 게 재물도 다수 실었다. 조선 최고의 친일 연사 김태흡 김태흡은 {불교시보}를 계속 발간하는 한편, 봉은사의 순회포교사로서 각 지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 순회강연도 촉탁 연 사로서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태흡은 전쟁에 대한 시국인식 친일강연으로 더욱 바빠졌다. 그 첫번째 친일강연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미처 한 달도 안 된 1937년 8월 6일에 이루어졌다. 김태흡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개최한 적극적 친 일행사인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및 '시국대응강연회'에서 일본국 기요배와 의미심장한 이종욱의 개회사에 이어 '입정안국'(立正安國)이라는 제목으로 중일전쟁에 따른 시국인식에 대해 열변을 토하여 2300여 청중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김태흡의 친일강연은 {불교시보}와 {신불교}가 종간되는 1944년 말까지 끊임없이 지면을 메우게 되는데, 그의 친일강연과 각종 친일 시사문, 일본군 전사장병의 영령에 대한 독경소향 등 그의 친일행적은 다양 하고 화려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그의 친일강연 행적을 우선 중점적으로 점검하면서 그 내용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1937년 9월 말부터 경기도와 강원도를 시작으로 시국강연을 하였다. 11월에는 강원도청의 초청을 받아 평강(平康)과 이천(伊川)군에서 '지나사 변과 입신(立信)보국', '시국과 불교', '지나사변과 국민의 각오' 등의 제 목으로 8회에 걸쳐 2160명의 청중에게 친일강연을 하였다. 그는 이어 12월 에도 강원도의 초빙으로 금화군, 철원군, 영월, 정선 등지에서 15회에 걸쳐 3730명의 청중에게 중일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추켜세우며 조선인들에 게 일제를 위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사명을 다 하라고 부르짖었다. 김태흡의 강연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시키는 내용으로 일관하였음은 강연제목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벽사항마와 영겁의 행복', '동양평화와 국민의 사명', '국방인식과 의용 봉공(義勇奉公)', '시국과 반성', '성전과 각오', '시국인식과 지은보덕', '신애협력과 황도선양'……. 김태흡은 일제의 억지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물리쳐야 하는 사악한 세력' 또는 '항복받아야 하는 악마들'로 지칭하고, 이들을 물리쳐야 일본인과 조선인들에게 영겁의 행복이 다가오고 동양평화가 달성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또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는 국방에 대한 인식을 보다 철저히 하고 국가(일본)에 멸사봉공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일제의 황국신민화운동에 충실하여 황 도(皇道)를 선양해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김태흡의 시국강연은 1938년에도 계속되어 3월에는 울진, 삼척, 춘천, 양 구, 인제, 화천 등지에서 18회, 4월에는 경기도 파주군에서 2회, 6월에는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서 3회 강연하였다. 그는 그 해 7월에는 만주 펑 톈(奉天) 관음사의 주지 겸 포교사로 부임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발행하 는 {불교시보}(제19호, 1938. 2. 1)에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내선일체·선 만일여(鮮滿一如) 정책에 호응하는 노골적인 친일 시사문 [선만일여의 대정 책과 불교도의 각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김태흡의 친일강연은 쉴사이 없이 계속되어 1939년, 1940년에도 이어졌는 데, 1940년에만도 2월에는 평강군에서 '흥아성전(興亞聖戰)과 정신총동원' 을, 5월에는 경기도 광주면(廣州面)에서 '불교와 정신총동원' 따위의 강연 을 했다. 그의 수많은 강연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므로 대표적이고 인상 적인 것만을 언급한다면 1940년 10월과 1942년 11월 만주에서 행한 친일강 연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김태흡이 만선척식회사(滿鮮拓植會社)의 촉탁을 받아 북만주의 선 농개척민(鮮農開拓民) 부락에 위문 겸 포교차 '보은감사와 신앙생활', '수 신제가와 진충보국' 등의 제목으로 13회에 걸쳐 강연을 한 것이다. 후자는 김태흡이 만주 펑톈 관음사의 주지 자격으로 만주국 정부 민생부 와 만주제국협화회(滿州帝國協和會) 중앙본부의 초청을 받아서 1942년 11월 26일부터 12월 8일까지 기독교 목사 1인과 함께 짝을 지어 만주국의 종교교 화보국강연반에 참가하여 순회 친일강연을 한 것이다. 그는 지린(吉林)성, 사평성, 펑톈성, 안둥(安東)성 등지에서 10회에 걸쳐 2750명의 청중에게 '종교보국과 황민화운동', '성전필승과 경신숭불(敬神崇佛)', '시국인식과 국체명징', '정의필승과 황민화운동', '성전완수와 독경삼보(篤敬三寶)', '성전필승과 황민화운동', '국체본의투철과 황도선양' 따위의 전적으로 친 일적이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총력전체제에 적극협력하 는 내용으로 친일강연 하였다. 만주국 민생부와 만주제국협화회에서 이 강연반을 조직한 것은 태평양전 쟁 전시체제하에 시국인식, 국책협력, 증산출하 등의 3대운동을 철저케 하 기 위한 것이었다. 즉, 종교단체를 총동원시켜서 만주의 조선민중(일본·만 주·몽고·러시아·중국인 등을 포함하여)을 각성시켜서 측면적으로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다. 만주국 민생부와 만주제국협화회는 만주국에 현존하는 불교, 기독교, 도교, 홍만자교(紅卍字敎) 등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8반으로 나누어 만주 전지역에 파견하여 유세케 하였다. 여기에 조선족측에서도 불 교와 기독교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4개 반으로 나누어서 만주 거주 조선인 (150만 명)들에게 종교를 통하여 시국인식, 황민화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김태흡의 남만주 종교교화보국 강연도 그 일환의 하나였던 것이다. 김태흡은 1941년 1월에도 철원, 금화, 평강, 회양, 이천 등지와 전북 지 역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고도국방체제 확립에 따른 국민총력운동을 선 동하는 시국인식강연을 행하였다. 재단법인 조선불교협회라는 일제 어용단체에서도 태평양전쟁 시국이 긴박 하게 돌아가자 1942년 9월 일본승려와 조선승려가 2인 1조가 되어 5개 반으 로 나누어 전 조선 각 지역을 순회강연하였는데 김태흡에 관한 부분만 언급 하면 이러하다. 김태흡은 가네야마(金山泰洽)라는 창씨명으로 조선에 있는 일본사찰 호국 사의 일본승려 구로다(黑田惠海)와 함께 9월 2일부터 7일까지 이리, 전주, 남원, 여수, 순천, 광주 등지에서 '불교에서 보는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철 원(哲願)'이라는 제목으로 '시국에 즉응(卽應)하야 황도불교'의 선양을 위 해 '내선불교(內鮮佛敎)가 상호 제휴하여 대동아의 민중 속에 들어가서 황 도정신(皇道精神)의 앙양에 기여하고자' 전라남북도 지역을 일본승려와 합 동으로 시국강연을 한 것이다. 김태흡은 1943년 3월에는 '종교보국·포교보국의 직역봉공(職域奉公)의 임무를 가진 불교도로서……국체관념을 투철히 하여……황도불교를 선양'하 고자 설립된 불교문화보급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태평양전쟁 제2차 연도인 1942년 5월 8일 일본 각의가 조선인들의 징병제 실시를 공포하자 김태흡은 {불교시보}에 [광영의 징병제 실시]라는 친일 시 사문을 게재하고, 경성의 근교 5개 사찰이 연합하여 봉행한 징병제실시 감 사법요식(1943. 8. 6)에서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 및 혜전(惠專)교수 권 상로*와 함께 '생사초탈과 진충보국'이라는 제목으로 축하강연을 하였다. 김태흡이 쉴 새 없이 벌이던 친일강연은 이것을 끝으로 {불교시보}와 {신불 교}가 종간됨으로써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왕성한 활동력으로 보아 친 일강연이 이로써 멈춘 것은 아니겠으나 불교 언론이 전무하므로 다만 기록 이 남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친일 불교언론을 주도 김태흡은 수많은 친일강연 외에도 다수의 친일 논설 내지 친일 시사문들 을 발표했다. {불교시보}에 18편, {신불교}에 3편, 총독부의 어용신문인 {매일신보}에 5편, 강원도청에서 출판한 {심전개발병(??) 시국에 관한 순회 강연집} 제1호(강원도, 1937)라는 단행본에 11편 등 도합 37편이 남아 있 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태흡은 자신이 발행하는 {불교시보}에 [적군의 응 징과 국민의 지구력](제27호, 1937. 10. 1), [연전연승 함락의 축하](제28 호, 1939. 11. 1) 따위의 사설(社說)을 통하여 친일활동을 본격화하고, 한 편으로는 기명(記名)으로 중일전쟁에 관한 친일 시사문 내지 논설들을 발표 하여 조선인과 조선불교도들에게 일본에 충성하고 애국할 것을 부르짖었다. 그는 1937년 10월 1일자 {불교시보}에 실린 [애국사상과 경신숭불]에서는 "서구의 백인들과 야합하는 중국인을 응징하는 일본과 일본군대인 황군에게 충성과 지원을 하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당국에서도 애국일을 별정(別定)하고……엄숙한 식전을 행하여 애국심을 환기시키는 것"이라면서 일본신사에 안치된 아마데라쓰 오 미카이(天照大神) 등의 여러 일본신(日本神)들을 열거하면서 "아국 영토 내 에 있는 자는 어떠한 종교·국체며 외국인이라도……신사참배를 불긍(不肯) 하면 용서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김태흡이 주장하는 애국사상은 일본에 대한 충성이었으며 그 사상의 기저 는 천어중주신(天御中主神) 따위의 일본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신도(神道)사 상이었다. 그는 엄연한 조선승려이면서 일본의 성무천황(聖武天皇)과 쇼도 쿠태자의 불교신앙을 통한 일본적인 불교사상과 애국 신조를 고취하는 반민 족적인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애국적인 실천방안으로 신사참 배를 적극 권장하고 일본인처럼 가정 안에 일본 신(神)들을 모시는 신단(神 檀)과 불단(佛檀)을 설치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김태흡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전시하의 애국운동, 내선일체, 총후보국 등 총력체제 비상시국 아래의 조선인들을 부일(附日) 내지 친일화로 내모는 것 이었다. 서기 1940년은 일본에 있어서 황기(皇紀) 26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였다. 김태흡은 이 해를 맞이하여 {불교시보} 신년호(제54호, 1940. 1. 1)에 일왕 쇼와(昭和) 부처의 사진을 1면 상단에 게재하였다. 또 [흥아성업(興亞聖業) 건설의 신춘, 천은(天恩) 사해팔굉(四海八紘)에 보점(普霑)]이라는 글에서 는 마침 '즉위 15년을 맞이한 40세의 일본천황과 황후 및 황태자, 제2 황자 등 일본황실의 중요 인사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축하를 드리고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에도 서기(瑞氣)가 충만하다'는 아부를 하였다. 그는 이 기사의 말미에서 "장기건설인 흥아성업이 순조롭게 완수될 것을 확신무의(確信無疑)케 되니 차(此)는 오직 세계무비(世界無比) 만세일계(萬 世一系)의 국체와 윤문윤무(允文允武)하옵신 금상 폐하의 어능위(御稜威)에 기(基)한 바이라 사해팔굉에 보점(普霑)하는 천은을 첨암하매 일억적자(一 億赤子) 너무도 감격하야 오로지 공구감읍(恐懼感泣)할 뿐이라 신년을 당해 서 삼가 황실의 어번영(御繁榮)을 축(祝)하야 마지 않는 바이다"라는 최상 의 경어로 최고의 아첨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 기사 바로 아래의 연두사(年頭辭)를 통하여 '신동아건설과 내선일체'에 대해 역시 노골적인 친일발언을 되풀이했으며, 또한 {불교시보} 1940년 2월호(제55호. 1940. 2. 1)에 실린 [신생(新生)의 도(道)]라는 글에서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정책을 동조·찬양하였다. 창씨개명에도 앞장 서다 1940년 2월 총독부가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김태흡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에 동조하여 재빨리 가네야마(金山泰洽)로 이름을 갈아치웠다. 그의 창씨명 이 처음 등장한 곳은 {불교시보} 제58호인데 그 발행일이 1940년 5월 1일로 되어 있는 만큼 원고집필과 인쇄기간 등을 감안하면 김태흡은 1940년 4월 혹은 그 이전에 창씨개명을 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조선승려로서는 이렇듯 가장 먼저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국민정신과 씨창설(氏創設)]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창씨 개명을 통한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불교시보} 제59호, 1940. 6. 15, 1면). 그런데 그 내용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친일화되어 있어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김태흡은 국민정신으로서 ①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임을 확실히 깨닫고 ②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신념을 가질 것이며(내선일체) ③ 직업봉공에 충실하여 황도선양에 노력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조선인들의 국민정신이라 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것을 "반도동포 가 황은을 입은 지 30년이나 되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태고의 역사를 살펴 보면 일본과 조선은 이미 3000년 동안이나 한 집안이어서 2, 30년이라는 것 은 우리가 내지(일본)를 떠나 있다가 다시 본집(?)으로 돌아온 연수에 지나 지 않는다"는 해괴한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새로이 황국신민이 된 것이 아니라 벌써부터 황국신민으로 있었다"고 김태흡은 억 지 주장을 하였다. 또 이러한 연고로 반도동포(조선인)는 겨우 30년 전에 황국신민이 된 신부(新附)의 백성이나 가봉자, 서자(庶子), 계자(繼子)가 아니라 일본의 적자(嫡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내선동포가 동일 한 씨(氏)를 갖게 된 것은 가출한 자식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속받을 자 격을 얻은 것과 같다고 김태흡은 강변하였다. 그는 한술 더 떠 창씨개명만 으로 황국신민이 되기에는 부족하므로 일본식 씨창설과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정신을 단련하고 실질을 높여야 한다고 조선인들을 설득하였다. 그 는 아울러 이러한 국민정신의 연마는 스스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 속에서 저절로 일본국가(國歌) 기미가요가 솟아나오고 일장기(日章 旗)를 볼 때마다 감격한 생각이 일어나야 된다"는 황당한 궤변을 부끄러움 도 없이 늘어 놓고 있다.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일제의 징병제도를 찬양하며, 황도불교(皇道佛敎) 를 주창하고, 적국항복의 기도를 역설하고, 총력결전체제에 앞장 서서 일제 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등의 김태흡의 일련의 반민족적인 행위는 약 관 20세에 전통적인 승가교육인 법주사 대교과를 이수한 조선승려의 행동이 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김태흡은 경남 밀양의 무봉사(舞鳳寺)로 잠 시 피난을 하였다가 이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일제시대의 그 광적인 친 일행적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참회도 없이 대장경 번역위원이 되어 한글대장 경 번역에 종사했다. 그리고 그가 끝내 자신의 열렬한 친일행위에 대해 아 무런 참회의 고백도 없이 1989년 4월, 서울 상도동의 사자암에서 훌쩍 입적 (入寂)하고 말았다는 것은 한국불교에 잔존하는 왜색불교가 청산될 또 한 번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쉬운 일이 었다. ■ 임혜봉(불교사연구가) 주요 참고문헌 {佛敎時報}. {新佛敎}.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