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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5시08분27초 KDT
제 목(Title): 이종욱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李種郁, 창씨명 廣田種郁, 1884∼1969
·1937년 총본산건설위원회 31본산주지대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항일투사에서 골수친일파로 전락

월정사 강원(講院)에서 불교 내전(內典)을 강의하며 감무(監務)의 소임을 
보고 있던 이종욱이 항일투쟁에 뛰어든 것은 1919년의 3·1 독립만세운동 
때부터였다.
그는 파고다공원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3월 3일에는 이탁(李鐸) 등과 
함께 '27결사대'의 대원으로 매국역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월 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4월에는 상하
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동참하여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체포는 되지 않은 채 궐석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이종욱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강원도 대표)이 되어 활동하다가 의열단원 김상
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서 3년여의 옥고
를 치렀다.
이종욱은 이 공적으로 훗날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1977). 그리고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국가보훈회, 1988, 746면)에 의하면 그는 출옥 
후에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
하며, 지하에서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종욱은 출옥({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에는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라고 되어 있어 그의 복역 사실도 
현시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직후라고 여겨지는 1923년부터 월정사의 사
채정리위원이 되어 이 난제를 무사히 해결하고는 그 공로가 인정된 탓인지 
1926년에는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이 되었고, 1927년에는 월정사의 감무로 복
직하였으며, 1929년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 중 1인으로 선정되었고, 대회 부의장으로 피선되기도 했
다.
월정사 부채문제를 정리하고는 일제 당국의 신임을 얻어 강원도 대본산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에 취임하였다. 이렇듯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 이종욱
을 독립공훈록에서 월정사에 은거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사실과 진실의 왜곡
이 아닐 수 없다.
이종욱은 1930년 3월에 종회(宗會)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5월에는 일
제당국이 항일투사 출신의 이종욱을 회유하고 조선불교에 은덕을 입혀 마음
대로 조정하려는 의도로 제1급 친일파들인 후작 박영효*, 남작 이윤용, 자
작 민병석*, 자작 윤덕영*, 자작 권중현* 등의 중추원 고문들을 역원으로 
앉히고 조선총독 사이토(齊藤實)와 정무총감 등의 고관들과 열렬한 친일명
사 이완용*, 친일승려들인 31본사주지들을 발기인과 평의원 및 회원으로 하
는 '오대산 석존정골탑묘찬앙회'를 발족시켰다.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자신들이 통치하는 식민지에서 한낱 불교신행단체
의 회원으로 가입한 것은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한 이 사실을 
보더라도 식민통치당국이 조선불교와 이종욱을 회유하고자 얼마나 고심했는
가를 역력히 알 수 있다.
이종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서히 친일파로 경사되어 갔고 그의 직접
적인 친일행적은 제7대 조선총독이 부임할 때 공공연하게 밖으로 드러났다.
1936년 8월 26일 미나미(南次郞)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자 이종욱은 종회 
의장 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이사인 김상
호와 황금봉 그리고 보현사 주지 김법룡, 사간정(司諫町) 유점사포교소 대
표 박대륜, {불교시보}의 발행인 김태흡* 등과 함께 경성역으로 마중을 나
가 미나미의 총독 부임을 축하하였다.
이종욱은 1937년 31본산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어 총본산 설
립을 의결하고 그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산주지대표로 취임하였
다. 그는 강원도 대본산 월정사의 주지로서 31본산주지대표가 되자 실질적
인 조선불교의 종권을 한몸에 장악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조선불교의 교권
을 좌우하게 되자 총본산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의 전시체제에서 불교계의 친일기수가 되어 일제당국의 황민화정책에 적극
적으로 호응·협조하면서 젊은 날의 항일투사에서 전적으로 변절하여 골수 
친일파로 전락하였다.

총독부 출입 잦았던 친일 전향자

강석주 스님의 {불교근세백년}(중앙일보사, 1980)에 의하면 이종욱의 총
독부 출입은 월정사의 부채정리 때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어 총본
산 건설을 추진하면서 1937년에도 4월부터 7월 초 사이에 8회나 총독부에 
출입하였고, 중일전쟁 발발(1937. 7. 7) 후에는 9월까지 무려 15회나 총독
부를 방문하였다({신불교} 제3집, 1937. 5. 1에서 제10집, 1938. 2. 1까지
의 종합).
또한 그는 1938년에 전반부에만도 12회나 총독부를 출입하였는데 중일전
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주로 당국과의 시국대처에 관한 일로 총독부를 부지
런히 드나들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종욱은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7월 15일에는 총본
산건설위원이자 송광사 주지인 임석진과 교무원 재무이사인 황금봉을 데리
고 국위선양·무운장구 기원제 참례차 조선신궁(일제가 설치한 조선 최고의 
일본신사)에 다녀왔다. 그 이틀 뒤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에 협력
하기 위하여 국위선양·무운장구 기원제를 조선 사찰에서도 시행하는 건에 
대해 총독부를 방문하여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와 협의하였다.
이 날의 협의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비상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 
31개 본사는 7월 25일과 8월 1일 2회, 각 말사와 포교소는 8월 1일 1회 오
전 5시를 기하여 일제히 국위선양·무운장구 기원제를 봉행하기로 결정, 조
선의 모든 사찰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을 위하여 일본군의 무운
장구를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종욱은 이 때 이후에도 31본사주지대표로서 조선불교계의 실질적인 종
무사암과 포교소에 소집통문을 특사배달하였다. 그리하여 8월 3일 오전 9시 
교무원 포교사실에서는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및 시국대응강연회' 
개최에 대한 타합회를 열었다. 이 회의 참석자는 30명이었으며 제반사항을 
논의·의결하였다. 이종욱은 이 결의내용을 취합하여 조선총독부에 보고하
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주최:조선불교 중앙교무원.
후원:경성 각 사암 및 포교소.
기원(祈願)은 개운사(開運寺)에만 한함.
강사는 제1일 김경주(金敬注), 박성권(朴聖權), 김포광(金包光).
       제2일  권상로*, 김태흡*, 최남선*.

이렇게 결정이 되자 이종욱은 효제정(孝悌町) 최남선을 방문하여 출연을 
간청하였으나 최남선은 거듭 고사하여 결국 그의 출연은 이루어지지 않았
다.
이종욱은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 갖는 이 중대한 친일 행사를 제대
로 잘 치르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8월 4일 한성훈을 데리고 총독부 
사회교육과(강사건), 부민관(대강당 냉방장치 및 영화실건), 경성일보사 및 
오사카 아사히신문사(중일전쟁 뉴스건), 동대문경찰서(개운사 청중의뢰건) 
등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종욱이 추진한 이 친일 행사로 교무원 직원들도 프로그램 인쇄, 입간
판, 마이크로폰 따위의 물품을 준비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또한 행사허가를 얻기 위해 본정(本町)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에 집회신고
를 하고 총독부 학무국장에게도 보고를 하였으며 강사와 연제도 결정하였는
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개운사에서의 기원법요 후의 강연에는
  박성권:세계평화를 위하여
  김경주: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다(爲國不爲身)
  김영수:동양평화를 위하여
부민관에서의 강연에는
  권상로:선각자로서
  김태흡:입정안국(立正安國)

이런 갖가지 준비 끝에 8월 5일 저녁 8시 개운사에서는 대일본제국 무운
장구 기원법요(竝在滿在支將兵 및 在留同胞安寧幸福祈願) 및 박성권, 김경
주, 김영수의 강연회가 개최되어 밤 10시에 폐회하였다. 청중으로 승려 100
명, 남자신도 150명, 여신도 350명 등 도합 600명이나 참가하여 성황을 이
루었다.
또한 8월 6일 오후 7시 부민관 대홀에서 이종욱의 사회로 시국강연회가 
열려 국기요배(일장기) 및 삼귀의 등의 일본과 불교적인 국민의례를 한 후 
이종욱은 시국에 대해 의미심장한(?) 개회사를 하고는 권상로와 김태흡 두 
스님의 열변으로 친일강연이 행해져 무려 2300여 청중들에게 많은 감명(?)
을 주었으며, 이어 북지사변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끝으로 이종욱이 주도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친일행사는 막을 내렸다.

조계종의 실권자 되어 친일화 주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지 꼭 한 달 만인 8월 7일, 이종욱은 교무원 재무
이사 황금봉을 대동하고 총독부를 찾아가가 각 불교단체 연합으로 중일전쟁 
전병사자 위령법요에 대해 논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앙교무원에서는 중국
으로 파견되는 일본군대를 송영(送迎)하기 위해 간부와 직원들이 번갈아 경
성역, 용산역, 군부대 등으로 나갔다. 이종욱은 8월 8일부터 일본군대의 송
영을 나가 10월 2일까지 13회 전송하였으며, 역시 그 해 10월 17일 이종욱
은 교무원 이사인 김상호, 황금봉과 부원 한성훈을 대동하고 국위선양·무
운장구 기원제 참석차 조선신궁 및 경성신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종욱은 이와 같이 그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을 위한 무운장구 기원제
와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을 송영하는 등의 
행동으로 조선불교계의 친일기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불교 언론에 친일 시
사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시보}에 4편, {신불교}에 7편의 친일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그 목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시보}에 실린 이종욱의 친일 시사문
  [총본산의 실현과 조선불교의 장래](제42호, 1939. 1. 1, 2면).
  [조선불교도의 새로운 각오](제54호, 1940. 1. 1, 2면).
  [성전필승과 불일증휘](제90호, 1943. 1. 15, 3면).
  [징병제실시에 대하여 검선일여(劍禪一如)에 투철을 바라노라](제97
호, 1943. 8. 15, 2면).
{신불교}에 실린 이종욱의 친일 시사문
  [종정 유시를 봉(奉)하여](제33집, 1942. 2, 4∼5면).
  [전첩(戰捷)의 춘(春)](제36집, 1942. 5, 4∼5면).
  [징병제실시의 영(榮)을 예대(譽戴)하고](제38집, 1942. 7, 4∼6면).
  [개병주의](皆兵主義)(제43집, 1942. 12, 3∼5면).
  [연두감](年頭感)(제44집, 1943. 1, 5면).
  [연두감](제56집, 1944. 1, 4∼5면).
  [훈시](제66집, 1944. 11, 5∼6면).

이와 같이 이종욱은 도합 11편의 친일논설들을 발표하였고, 1940년 6월에
는 중일전쟁(1937) 당시 일본 근위내각의 외무대신 히로타 고우키(廣田弘
毅)의 성을 취하여 히로타 쇼우익(廣田種郁)으로 창씨개명 하였다.
한편, 그는 전시체제의 중압 속에서도 총본산의 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
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 종명(宗名)을 조계종(曹溪宗)으로 확정하고 
1941년 4월 23일에는 총본사태고사법을 총독부로부터 인가받은 뒤 그 자신
은 종무총장으로 취임(1941. 8. 18 종무총장 인사발표, 9. 29 총독부인가, 
10. 8 사령장 교부)하여 명실공히 조선불교의 대표가 되어 종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종욱이 이렇게 신설된 조선불교 조계종의 실권자가 되기 위해 총독부를 
쥐가 뒤주간 드나들 듯이 뻔질나게 출입하고, 게다가 '선학원(禪學院) 문
제'가 얽힌데다, 전적으로 친일로 전향하자 당시 스님들로부터 비난이 자자
했다(강석주, {불교근세백년}, 180면).
이종욱은 1940년 12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이 되었다. 또 그
는 임전대책협의회(1941년 8월 결성)에 참여하여 일제가 전쟁비 조달을 위
해 매출하였던 1원짜리 꼬마채권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채권가두유격대가 되
어 거리로 진출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 이종욱은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
터'라는 슬로건을 내걸로 종로4가대(동일은행 앞)의 일원이 되어 행인에게 
일제의 전쟁채권을 팔았던 것이다.
이종욱은 1941년 10월 22일에 설립된 조선임전보국단이 그 해 12월 4일에 
개최한 '조선임전보국단 전선대회'에 참석하였고, 12월 9일에도 역시 임전
보국단 회의 참석차 부민관에를 갔다.
이종욱의 친일행각은 그의 휘하에 있던 조선불교 조계종의 친일화로 직결
되어, 전조선 사찰과 7000여 승려들이 힘을 짜내서 비행기 1대를 일본군대
에 헌납하고자 5만 3000원을 모았다. 1942년 1월 30일, 종무총장 이종욱은 
총본사의 서무부장 김법룡(金法龍), 교무부장 임석진(林錫珍), 재무부장 박
원찬(朴圓讚)을 대동하고 용산에 있는 조선군사령부로 가서 5만 3000원은 
97식 전투기 1대의 대금으로, 526원은 국방헌금으로 헌납하였다. 이들이 헌
납한 돈으로 구입한 육군전투기는 '조선불교호'로 명명되었다.
일제가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위해 조직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매월 8일을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로 정하였다. 이 대조봉대일은 태평양전쟁(1941. 
12. 8)을 기념하는 날이었는데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1942년 2월 3일 
전국 31본사 주지들에게 대조봉대일의 식순을 공문으로 발송하였다. 그 내
용을 살펴보면, ① 경례 ② 궁성요배 ③ 국가(일본국가) 합창 ④ 조서봉독
(詔書奉讀) ⑤ 필승기념(必勝祈念: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필승의 기원) ⑥ 
훈화 ⑦ [황국신민의 서사] 제송 ⑧ 경례(옥외에서는 마지막 경례 앞에 '천
황폐하만세봉창'을 할 것) 등인데 행사의 식순이 황민화를 위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는 같은 해 2월 6일에는 신도(神道)·불교·기독교 연합 간담회에 참석
하여 '종교보국'을 의논하였고 2월 10일에는 임전보국단 상무이사회에 참석
하였다.

"황은에 보답하고 출정장병의 노고에 감사하라"

이종욱은 일왕의 태평양전쟁 선전포고에 맞추어 종정 방한암(方漢岩)이 
내린 '유시'(諭示:종정사서 허영호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됨)를 받들어 중국
침략에 이어 동남아와 영·미 각국을 상대로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제에게 
전조선의 불교도가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종정유시를 봉(奉)하여'라는 제
목 아래 다섯 가지 실천요목을 {신불교} 제33집(1942. 1, 4∼5면)에 발표하
였다. 즉, '위로 황은에 보답하고 아래로 출정장병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
에서' ① 저축실행의 적극화 ② 필승기도법회의 개최 ③ 민중사상 선도의 
적극화 ④ 근로보국의 실행 ⑤ 시국에 순응한 시설의 급속실현 등 다섯 가
지 실천요목을 철저하게 시행할 것을 전조선 불교도들에게 시달하였다.
1942년 3월 25일 임시종회에서 이종욱은 "대동아 건설과 한가지로 아제국
(我帝國)의 전첩(戰捷)의 봄을 봉영하여 시시각각으로 세계인류로 하여금 
시명(時命)의 시정(是正)을 하게 하고 그 분(分)에 자안(自安)해서 신의대
도와 불타의 본회를 심체(深體)하게 하는 것은 우리 황도불교(皇道佛敎)의 
종도(宗徒)된 직분이며 또한 제국신민으로서의 보국에의 적성(赤誠)"이라는 
요지의 개회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이 회의에서 국방자재헌납을 결의하고는 
전국 사찰의 철, 동, 청동, 황동 등의 모든 금속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하
여 모든 조선사찰의 범종, 촛대, 불기(佛器) 등이 일본군대에 헌납되었다.
또 1942년 5월 5일 종무총장 이종욱은 일본어 상용을 종용하는 일제의 정
책에 호응하여 '국어(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
문을 전국 본사에 발송하였다.
1942년 5월 8일 일본각의가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시행을 결의하자 이종
욱은 전조선의 사찰에 '조선 징병제도 실시에 즈음한 기원(祈願) 행사에 관
한' 공문을 시달하고, 또한 {신불교}지에는 [징병제 실시의 영(榮)을 예대
(譽戴)하고]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인들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데 
앞장 섰다. 그는 징병제 실시를 영광이라고 기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만반 조직에 간발의 실(失)이 없이 총체적 진행을 여실히 보이고 
있음은 동아의 공영과 제국의 다행으로 보아 민초(民草)의 대망(待望)이 
날로 높아가는 때 황화(皇化)의 역내(域內)에 동인(同仁)의 혜(惠)를 시
(施)하게 된 쇼와(昭和) 13년(1938) 칙령 제95호 육군특별지원령이 발표
되고 5월 8일 각의에서 쇼와 19년도(1944)부터 징병제 실시를 행하게 될 
것을 준비 진행중이라 하니 내선일체 동아공영이 명실구전(名實俱全)으로 
실시됨이라 하겠다. 이 영(榮)에 욕(浴)한 반도대중은 비로소 이기(利器)
를 들고 가장 효과적인 동아개척의 제1실추(實(金+秋))로 일제히 나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국의 일 여수(一黎首)로 동아의 일 민초(一民草)로
서 천의(天意)에 존(遵)하고 성명(聖命)에 전(全)해서 반도인의 남김없는 
천자(天資)를 발휘하게 됨이 아닐까?……메이지 천황의 조서환발(詔書渙
發) 후로 33년을 지나 이제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이 당초의 성지
(聖旨)대로 여실히 실현됨은 시이무의(恃而無疑:믿어 의심치 않음)임은 
지명(至明)이었지만 쇼와 19년을 기하여 반도청년을 동일한 병제(兵制)에 
수(收)하게 되는 희열은 실로 공구감격(恐懼感激)하여 불감(不堪)하는 바
입니다.({신불교} 제38집, 1942. 7. 1, 4∼6면)

이종욱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43년 8월 6일에는 고양군 숭인면 경국사(慶
國寺)에서 숭인면 관내 5개 사찰의 연합징병제실시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
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하여 "7000여 승려와 아울
러 반도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軍門)에 달려가 젊은
이의 지성과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종욱은 조계종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이라는 직책으로 불교도들에
게 '황위팔굉(皇威八紘)에 찬연히 빛나며 혁혁한 전과(戰果)를 올리는 대동
아전쟁' 시기에 '광대무변한 황은(皇恩)에 감분흥기(感奮興起)하여 청사(靑
史)에 빛나는 황국의 일원으로서의 영예를 뼛속에 깊이 삭여서 성전필승(聖
戰必勝)을 완수하자'고 외쳤다.
그는 1944년 12월 7일에는 태고사에서 대조봉대(大詔奉戴) 3주년을 기념
하기 위하여 대동아전쟁 전몰장병 위령법요를 근행하였는데, 국민총력연맹 
임원들과 경기도의 고위 관료들, 그외 관민 및 신도 유력자들이 참례하였
다.

변절한 친일파가 건국훈장을 받은 불가사의

그는 이렇게 친일행각에 동분서주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8월 17
일 3부장과 함께 총사직을 하고 9월 22일에 소집된 전국승려대회에서 부일
협력자 제1호로 지목되어 승권정지 3년이라는 징계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
는 징계 기간 동안에도 추호의 반성도 없이 김동진(金東振)이 위원장으로 
있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강원도 대표(1945. 12. 31)가 되
었고, 1946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회장 이시영) 총무부장이 되어 활동
하였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그가 승려의 몸으로 정치활동을 한 것도 그러하지만 
3년의 승권정지 징계가 풀리지도 않는 1947년 1월에 이미 강원도 교구원장
이 되어 그 이름이 당시 복간된 {불교}지의 축하광고란에 게재되었다는 점
이다. 더더욱 기괴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가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
민장'을 받은 사실이다.
3·1 운동 때 항일투쟁을 하였다지만 그는 끝가지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극렬한 친일파로 전락하
여 조선불교의 종권을 완전 장악하였고, 이 땅의 불교를 왜색불교, 황도불
교로 몰아넣었으며,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전적으로 협력하였던 조선불교계 
제1급 친일파인 이종욱이 건국훈장을 받은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의 공훈록에는 '1945년 7월 23일에는 이종린, 안정식<인정식???확인요
망>, 정인익, 학전헌(鶴田憲) 등과 국민동지회조직에 참여한 일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지암(이종욱의 승명) 화상평전}에는 '1944년 강태동, 유석
현 등과 함께 무장봉기를 위한 유격대 조직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 18일을 
거사일로 삼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1992년 7월 3일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백범회관에 가서 이 부분을 확인하고자 독립운동관계 사료들
을 조사하였으나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현시점에서 이종욱이 1919년경에 행한 항일투쟁은 인정되나 1944∼45년의 
지하 항일 행적은 그 자료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1920년대 중반
부터 광복 때까지 행한 그의 철저한 친일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결코 수긍하
기 어렵다. 더구나 이렇게 변절한 친일파 이종욱이 건국훈장을 받았다는 것
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임혜봉(불교사연구가)

주요 참고문헌
국가보훈회,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1988.
강석주, {불교근세백년}, 중앙일보사, 1980.
{新佛敎}.
{佛敎時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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