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4시54분55초 KDT
제 목(Title): 김기진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金基鎭, 창씨명 金村八峰, 1903∼1985
·1944년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 부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기적적인 회생

1950년 7월 2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아침, 
서울 세종로 부민관(옛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6, 7백 명의 군중이 모인 가
운데 '인민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40대 후반의 한 사내가 군중들 앞으로 
끌려 나왔다. 곧이어 '좌익활동의 변절자', '일제 경찰의 밀정' 등의 죄목
으로 그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몽둥이가 
그의 뒷머리를 두 번 내리쳤고 그는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런
데 갑자기 쓰러진 사내가 일어나 앉아서 잠시 앞을 바라보다가는 나무 막대
기 하나를 집어 들고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로 또 
다시 몽둥이가 내리쳐졌다. 사내는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의 시신은 줄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몇 시간 뒤에 한 내무서원에
게 인계되었다. 나흘 후인 7월 6일 오후, 그 사내는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
에서 눈을 떴다. 기적적인 회생이었다. 팔봉 김기진의 또 다른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무나 극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 사건은, 한국전
쟁중 인민공화국 치하의 '잔학상'을 증명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것인데
(당시 인민재판의 사진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단죄의 폭력성과 무모함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잔인한 
우리 현대사의 우여곡절과 역사의 격량에 휩쓸린 한 지식인의 삶을 압축적
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카프 2차 검거사건 이후 전향

식민지 치하의 조선 문단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씨를 뿌리고 그 운동을 
이끌었던 팔봉 김기진의 친일행위는, 현재 남아 있는 기록과 자료를 종합해 
볼 때 1938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그
는 그 때에 이미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회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이미 그 전에 카프 탈퇴 선언을 한 박영희*도 기소되는 형편에 그가 
기소되지 않고 풀려난 데에는 아마도 그의 이러한 직책이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렇다면 그가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한 1934년에 이미 친일행
위를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다. 적어도 1935년 초 무렵까지의 팔봉은 계급문학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문필활동을 통해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1
월에 쓴 [조선 문학의 현계단]이라는 평론에서 그는 민족문학파의 역사소설
이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현재의 조선문학을 
일으킬 사람들은 "중압을 뚫고 일어서는 현실적이요 진취적이요 그리고 유
물적인 사상가와 시인"임을 역설한다. 그러니까 1928년 이후부터 카프의 해
산을 전후한 시점까지의 김기진은 비록 카프를 주도하는 소장파 이론가들과
는 분명히 미학적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지만, 그 기본이념에 있어서는 여전
히 중요한 이론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
다.
1934년까지의 왕성한 문필활동과는 달리 1935년에 들어서 그는 [조선 문
학의 현계단] 외에 한두 편의 단평을 쓰는 것 말고는 일체의 문필활동을 중
단한다. 이 침묵은 1938년 5월 {삼천리}지에 [문예시평----'작가'와 '현실'
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발표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 글은 예전의 투철한 
의식이 거의 탈색된 것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노골적인 친일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김기진의 친일활동은 1938년 7월 3일 일제가 조선의 좌익전향자들을 규합
하여 만든 친일단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결성준비위원으로 참가
하면서부터였다. 이어 그 해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매일신보}에 게재된 
수필 [미나미(南) 총독 수행기]는 그의 친일 문필활동의 시작이었다. 이것
은 물론 {매일신보}의 기자로서 조선총독의 지방시찰을 수행하면서 쓴 취재
기이지만, 그 이전에도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혹시 
익명으로 쓴 기사가 있어서 그것이 확인된다면 몰라도 그렇기 전에는), 이 
글을 그의 친일 문필행위의 첫 출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이
야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총독의 선정과 황민화정책을 찬양하고 홍보하는 것
이었다.
이상의 사례를 종합해 보건대, 김기진의 경우는 대체로 1935년 이후 약 3
년간의 침묵 혹은 '투항기'를 거쳐 1938년 중반 이후 친일의 행로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로부터 약 1년간 김기진의 친일활동은 그렇게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위의 '보국연맹'의 준비위원으로 이름을 내건 것
과, 1939년 1월 {삼천리}지 주최의 '전쟁과 문학과 그 작품'이라는 좌담회
에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참석한 것, 그 해 4월 이른바 '황군위문작
가단'의 장행식에서 개회사를 한 것, 그리고 10월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 그리고 1939년 8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한해대
책 현지보고]라는 기사를 쓴 것 등이 이 기간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친
일행위이다. 물론 소극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 행위 자체를 덮을 수 있는 것
은 아니지만, 문인으로서의 일차적인 행위가 글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볼 
때, 그리고 같은 시기의 다른 문인들의 행위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 시기 
그의 행동이 훨씬 소극적이고 미약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40년 무렵부터 친일활동 적극화

그러나 1940년 무렵부터 팔봉의 친일활동은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다. 
1940년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매일신보} 지상에 ㅂ표된 평론 [문예생활의 
지표], [장래할 역사의 파악], [재출발의 기본선]과 같은 글을 시작으로, 
1941년에는 [대아세아주의와 김옥균 선생]을 비롯한 수필 3편, 1942년에는 
[국민문학의 출발](평론), [역사적 명령](수필), [신세계사의 첫장](시), 
[향항 함락](시), [마닐라 점령](시), [신세계사 첫장 쓰던 날](수필), 
1943년에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시),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시), [나도 가겠습니다](시), 1944년에는 [탄환과 충언](수필), 
[신전의 맹서](수필), [조선영화의 신출발](평론, 일문), [이 길로 가자]
(수필), [경산시첩](시조), [의기충천](시), 1945년에는 [근감단편](수필) 
등을 씀으로써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이러한 문필활동 외에도 그는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단체를 통하
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문인보국회는 1939년에 결성된 조선문
인협회를 확대 강화한 조직으로서 1943년 4월에 결성되었다. 팔봉은 조선문
인협회에는 발기인으로 참여한 정도였으나, 조선문인보국회에서는 평론 수
필부회의 평의원으로 있으면서(1943. 6), 1944년 2월 8일부터 3월 31일까지
의 '미·영격멸국민궐기대회'의 행사로써 기획된 보도특별정신대의 일원으
로 강원지방에 순회강연을 다닌 바 있고, 1944년 4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의 파견으로 증산전선(增産戰線)을 시찰하고 [길주 펄프공장에서]라는 수필
을 썼으며, 6월에는 재선문학자총궐기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
편 그는 1944년 6월 18일에 열린 조선문인보국회 정기총회에서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부 회장으로 선임됨으로써 일제 말엽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이
었던 이 단체의 중추적 인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8월 1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적국항복문인대강연회'에서 팔봉은 이광수*, 유진오, 주
요한* 등과 함께 '문화인에 격함'이라는 강연을 하였고, 1945년 6월에 결성
된 조선언론보국회에는 이사로 재직하면서 그 해 7월에 그 단체가 주도한 
전국순회강연회에 경북지방 연사로 활동하였다. 한편 조선문인보국회의 상
임이사로서 그는 1944년 11월에 중국 난징(南京)에서 열린 이른바 대동아문
학자대회 제3차 회의에 참석하여 문인보국회의 기금 모집에 진력하다가 다
음해 1월 9일 귀경하였다.

"독립을 위한 비밀공작을 했다"는 궤변

일제 말엽의 친일행위에 대한 그 자신의 훗날의 기록은 다른 친일문인들
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없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나의 회고록](1964∼66), [일제 암흑기의 문단](1970)과 같은 글에서 그
는 조선문인보국회의 상무이사를 맡게 된 사정을 매우 소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가 되기 전, 그러니까 1944년 6월 이
전까지 자신은 문단과는 담을 쌓고 살았으며, 조선문인협회 회원도 아니었
고, 그것이 조선문인보국회로 바뀐 것도 몰랐으며, 매일같이 술이나 마시면
서 지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의 말대로라면 그의 친일활동은 단지 조
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맡은 것뿐이다. 그 어느 회고에서도 그는 그 이전
에 자신이 문인으로서 쓴 글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맡게 된 동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게 설명하
고 있다.
또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패망이 임박한 일제가 물러간 뒤에 민족의 
독립을 준비할 신간회와 같은 민족기간단체를 꾸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정무총감의 비서로 있던 김영돈(金永敦)이라는 자를 
통해서 일본 정부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인 민족기간단체를 결성할 
요량으로 보국회의 상무이사직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동아문학자
대회에 참석한 것도 그 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정치자금'을 마련하려는 것
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문인보국회의 상무이사를 맡은 것 외에는 일체의 친일활동을 한 
바 없으며, 보국회에서도 전혀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독립을 위한 '비밀공
작'을 했다는 것이 그가 훗날에 남긴 기록들 속에서 되풀이 주장하는 내용
이다.
그의 회고록은 이러한 과정을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도대체 일
본 정부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대표적인 친일단체의 책임자가 꾸미는 
'독립 준비 조직'이라는 것의 정체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일본 관헌
의 협조와 도움으로 단시일에 100만 원(지금의 1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거
금을 조성하는 것을  과연 독립을 준비하는 민족단체의 정치자금이며 비밀
공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1950년 7월의 인민재판 이후 팔봉은 1951년 5월에 조직된 육군종군작가단
에 입대하여 1952년에는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기
도 하였다. 이후 그는 남한 문단에서 가장 극렬한 반공작가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고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으로 취임하기
도 하였다.
                                     ■김철(한국교원대 교수·국문학)

주요 참고문헌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김병걸·김규동(편), {친일문학작품선집} 1권, 실천문학사, 1986.
홍정선 편, {김팔봉 문학전집}, 문학과지성사, 1988.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