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4시56분25초 KDT 제 목(Title): 박영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朴英熙, 창씨명 芳村香道, 1901∼?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장.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총무국장 얻은 것은 친일이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 아마도 회월(懷月) 박영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얻은 것은 이 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라는 유명한 글귀일 것이다. 이른바 백철*의 [비애의 성사]와 더불어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약 칭) 전향선언의 가장 대표적인 글로 손꼽히는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동아일보}, 1934. 1. 2∼11) 속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카프의 이론적 맹장이 스스로 유물사관의 이데올로기만 얻고 예술 자체를 잃어 버 렸다고 폭탄선언함으로써 프로문학 전반에 대한 부정을 감행한 것이다. 그 에 따라 프로문학 진영에서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게 터져 나왔지 만, 다른 한편으로 이후 이 말은 정치적 의미를 갖는 사회참여적 문학형태 에 대한 비판의 도그마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문학적 구호가 되었다. 문학사를 보면 우리는 간간이 위대한 문학적 변신을 목도하게 된다. 가까 운 예로 시인 1960년대의 김수영, 1970년대의 고은의 변신을 상기하는 것으 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커다란 문학적 전환 상을 들라 하면 낭만주의 문학의 요람이었던 {백조} 동인 중 일부가 가장 현실적이고 투쟁적인 문학흐름이었던 신경향파문학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점 과 8·15 해방 직후 과거 상호대립적이었던 구인계 모더니즘 문인들이 카프 계 문인들과 합류하여 진보적인 문학진영인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한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전자를 대표하는 문인들 중에는 단연 박영희와 김기진*이 손꼽힌다. 이들은 배재중학 동창생으로, {장미촌}에 뒤이어 {백조} 동인으로 활약하던 박영희의 도움으로 김기진 역시 {백조}의 동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당시 도 쿄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기진이 프로문학에 동조하여 이를 박영희에게 전 파함으로써 이들은 {백조}를 와해시키고 국내에 프로문학을 소개·보급하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박영희는 1927년을 전후하여 자신에게 프로문 학의 길을 열어 주었던 김기진과 논쟁하면서, 목적의식적으로 카프가 방향 전환을 할 때 가장 강경한 계급이데올로기자로 나서며 카프의 지도적 인물 로 부상한다. 그런 그가 1934년 이른바 '신건설사' 전주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카프 제2 차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약 1년 동안 복역한 후 저 유명한 전향선언을 하 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기실 그 자신의 몸짓은 각종 친일모임(전향자대 회, 북지종군, 대동아문학자대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친일문학단체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의 간부로서 가장 현실정치적인 활약을 함으로써 굴곡 많은 문학적 삶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8·15 해방 직후에는 반민족자 명단에 오르는 치욕을 당하고 한국전쟁중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납북되고 만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옮겨간 삶의 저울추 이처럼 박영희의 문학적 삶을 되돌아볼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자신의 삶의 저울추를 선택하였다는 사실이다. 극도의 개인주의에 기반한 낭만주의의 요람이었던 {백조}의 동인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정치적 이었던 카프의 대표적 이론가로 갑작스런 변신을 도모한 점이나, 다시 1935 년을 전후하여 가장 먼저 과감하게 카프로부터의 전향을 선언한 사실이나, 그리고 다시 1930년대 말무렵부터는 반민족적인 친일문학을 스스로 주도해 나간 점에서 이를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백조}에서 카프로의 변신은 혈 기왕성한 20대 초년기의 일이라 무시한다 하더라도 카프로부터의 전향과 친 일문학으로의 길은 식민지 치하 우리 문학사가 뱉어 낸 불행한 자국임에 틀 림없다. 결국 박영희가 스스로 친일적 행동을 하게 된 배후에는 카프에서 전향함 으로써 초래되는 정치적·의식적 인간의 자기파멸이란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문학과 친일문학은 사실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요소가 강한 문학경향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결합할 수 없는 대척 적인 정치성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희에게 있어 이것이 하나로 연 결된 데에는 바로 극단끼리는 통한다는 비극적 무대장치가 가로놓여 있다. 1934년 카프 2차 검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35년 12월 집행유예로 출 옥한 박영희는 사상범보호관찰법이라는 밧줄에 묶여 있었다. 1936년 11월에 공포된 사상범보호관찰법에 의거, 같은해 12월 발효되어 설치된 경성사상범 보호관찰소에는 약 150여 명이 수용되었는데, 박영희도 여기에 속해 있었 다. 1938년 일본 도쿄에서는 일제가 기치로 내건 '국민정신총동원'을 위해 시 국대응전국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로부터 박영희가 참여하는 시국대응전 선사상보국연맹이 출발하게 된다. 1938년 6월 경성보호관찰소 회의실에서는 재선(在鮮) 전향자들이 모여 조선전향자 대표로 박영희와 권충일(權忠一)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경성관찰소 보호사 요코다(橫田伍一)의 인솔하에 경성 을 출발, 1938년 6월 20일부터 3일간 도쿄에서 열린 전향자전국위원회격인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로써 박영희는 공개적인 친일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귀국 후 박영희를 비롯한 참석자를 중심으로 시국대응전선위원회를 조직 하기 위한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1938년 7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이 결성된다(박영희는 경성지부 간사). 이 연맹은 이후 관찰대상자의 취직 알 선 및 비전향자 포섭에 노력하고, 장병 위문과 물품 헌납, 유가족 방문 등 의 활동을 하였다. 이 때 박영희는 1939년 7월 경성부내(京城府內) 분회 결 성식에서 제1분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다음해인 1939년 4월에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박영희는 황군위문 작가단으로 북지에 파견된다. 1939년 3월 14일 부민관에서 문장사를 비롯한 14개 출판사의 협력으로 예비회의가 소집되어 문인 50여 명이 모였다. 이광 수*의 사회로 박영희를 의장에 천거한 다음, 위문사 후보로 김동인, 백철, 임학수, 김동환*, 박영희*, 주요한*, 김용제, 정지용이 뽑혔다. 이들 중 최 종 위문사로 박영희, 김동인, 임학수가 뽑혔고, 이 때 박영희는 일어로 쓴 [성전의 문학적 파악]({국민신보}, 1938. 4. 16)을 통해 위문길에 나선 마 음가짐을 피력하였다. 그 해 4월 12일 부민관에 80여 명이 모여 환송모임을 가지고, 3일 뒤인 4월 15일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한 다음 열차편으 로 황군위문의 길을 나선 것이다. 당시 그와 절친했던 {매일신보} 기자 백 철은 그의 친일의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내게는 선배, 같은 평론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 와 나 사이는 가까웠던 편이어서 이 때의 그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 다. 춘원도 그렇지만 회월도 성격이 퍽 약하고 생에 대한 애착 같은 것 때문에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 정세에 대한 근시안 적인 도취도 되기 쉬웠다. 회월이 종군을 떠나기 전날 나와 둘이서 점심 을 부민관 식당에서 할 때에 그는 춘원이 내게 하던 이야기와 꼭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시기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 바에는 먼 저 해서 생색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 사람의 특권을 얻어내야 한 다고 했다.(백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하여간 이들의 일행은 베이징을 거쳐 석가장, 태원, 임분지역 등을 강행 군으로 한 달 가량 돌아 5월 13일 경성에 다시 도착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북지여행기]({국민신보}, 1939. 6. 4), {전선기행}(박문서관, 1939. 10) 및 영화 [지원병]의 원작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문학의 길로 들어선 다. 친일문학계의 선봉장 1939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되자 박영희는 간사장으로 선출된다. 약 24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한 조선문인협회는 명예총재에 총독부 학무국장 시 오와라(鹽原時三郞)가 앉고 회장 이광수 밑에 12명의 간사(조선인으로 백 철, 유진오, 모윤숙*, 이태준, 최정희, 정인섭, 김동환 등 7명)를 두었다 (박영희는 1941년 8월 확대개편된 체제에서 간사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942년 기구혁신 때에도 간사장으로 선출된다). 이처럼 박영희는 친일단체 의 주도적 인물로 부상하면서 그 자신의 친일행위는 바로 그 자신이 간부로 있었던 친일문학단체의 활동과 궤를 하게 된다. 이들은 첫 사업으로 자작 위문문을 담은 위문대를 모집하여 전선에 발송 한다. 또한 조선문인협회는 결성 1주년을 맞아 1940년 11월 15일 오후 부민 관에서 간사회를 열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 아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시국강연회를 연다. 4개 반 중에서 박영희는 제1반(경부선) 강사를 맡아 김 동환, 유진오 등과 함께 그 해 11월 30일 출발하여 부산, 마산, 진주, 대 구, 청주, 공주 등을 순례한다. 최근 한일간에 여자정신대 문제로 논란이 많았는데, 당시 친일문인들이 시국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문학정신대'란 이 름의 친일행위였다. 문인협회 주최로 조선문인 20여 명이 전선(全鮮) 각지에 문예보국강연 대로 행각의 길을 떠났다는 것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거니와, 이것은 조선서 처음 보는 문학정신대라 사회각층에 비상한 감명을 주었던 것이 다.…… 그러나 단순한 시국인식만으로써는 도저히 이 난국을 타개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정세가 긴박하였다. 이러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내기 구의 전면적 재편제를 목표로 하는 신체제가 실시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 각 부분도 새로운 전진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 때에 문학은 직역봉공(職 域奉公)의 정신을 체득하여 우수한 작품생산에 매진할 것이나, 그러나 문 인의 직역을 다만 사색과 집필에만 국한다는 것도 편협의 비방을 면치 못 하리라. 문인은 다만 작품을 통하여 미지의 독자와 상대할 뿐만 아니라 직접 청중과 상대하여 같이 국민적 공기를 호흡하며 국난타개를 꾀하는 데서 또한 새로운 사명을 발견할 것이다.([문학정신대], {인문평론}, 1941. 1, 권두언) 그렇다면 조선문인협회는 그 외에도 어떤 일을 했는가. 필자의 설명적 서 술보다는 당시의 기록을 있는 대로 보여 주는 것이 보다 적합하리라. 객년(客年) 11월 3일 명치절(明治節)을 기하여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조 선신궁 대전에서 문장보국 기서식(祈誓式)을 거행하였다. 참집한 자 조선 문인 30여 명, 엄숙리에 이 획기적인 식은 끝났다. 사변(事變) 이래 조선문인은 그 시대적 임무를 자각하여 작년 초에 북 지에 문단사절을 파송한 것을 시초로 동년 말엔 문인협회가 결성되고, 이 래 전선위문품과 위문문 발송, 문인의 강연대 파견, 각종 군사적 행사 참 여 등 꾸준히 시국을 걸어오던 중 금번 이 장거를 보게 된 것이다. 황기 (皇紀) 2600년을 맞이하는 명치가절에 문인, 그 국가적 봉공을 신전에 맹 서하였다는 것은 실로 의의 깊은 일로서 경하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문 장보국], {인문평론}, 1941. 2, 권두언) 한편, 일제 말기 친일조직으로 가장 방대했고 또한 그 해악이 가장 심했 던 단체가 다름아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다. 1940년 10월 16일 "국체의 본의에 기하여 내선일체의 실을 거하고 각 그 직역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여 협심육력(協心★力) 함으로써 국방국 가체제의 완성, 동아 신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내걸 고 재출발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0년 11월 산하 사상부를 이분하여 문화 부를 설치한다. 여기에 박영희는 김억, 백철, 유진오 등과 함께 문화위원으 로 선임된다. 또한 이광수, 유진오와 함께 '제1차 대동아문학자대회'(1942. 11)에도 다 녀오는 등 친일적인 문학가의 대표로서 각종 정치·사회적 단체활동을 활발 하게 전개하였다. 몇몇 예만을 간단히 들면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 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받잡자는 취지로 발기된 황도학회 이사, 조선임전보 국단 평의원 등이다. 문예 분야와 관련해서 일제 말기 가장 거대한 조직은 조선문인협회 등의 발전적 해산에 따라 결성된 조선문인보국회(1943. 4)이다. '조선에 세계 최 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하자'는 기치하에 결성된 조선문인보국회에는 1000여 명이 참여한 방대한 조직이었다. 회장 야나베(矢鍋永三郞), 이사장 ★★★ (辛島驍) 밑에 상무이사, 이사를 두고 실무부서로 사무국장, 총무국장과 출 판부장, 사업부장, 심사부장 그리고 소설·희곡부, 평론·수필부, 시부 등 6개 부서를 두었다. 박영희는 여기서 총무국장이라는 막강한 직책을 맡았 다. 각종 친일적 문예행사를 주도하고 또한 홍보정신대 파견, 출진학도격려 대회와 결전태세즉응(卽應)재선문학자총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박영희가 해방 이전에 마지막까지 맡았던 직책은 총력연맹 홍보부 주필, 조선문인보국회 평론부 회장 직이었다. 박영희와 요시무라 고도의 거리감 박영희는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라고 누구보다도 빨리 창씨개명하여 이 를 필명으로까지 사용함으로써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와 여러모로 유사한 점을 보여 준다. 친일단체의 감투를 많이 둘러쓰고 있었다는 점이나 각종 친일행사의 단골손님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창씨개명한 방식에서도 그러하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경우 한 자를 추가 하거나 성씨를 두 자로 분리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들은 성과 이름자를 전부 바꾸어 버렸다. 백철에 따르면, 필명에까지 창씨개명한 이름을 사용한 이유를 박영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하라고 하니까 호적의 이름은 개명할 수밖에 없다 해도 글을 쓰 는 데까지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라고 써야 하느냐고 했더니 회월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그야 누가 오랫동안 쓰던 자기 필명을 버리고 싶겠 소. 하지만 이름 하나 고집하다가 큰 오해를 당하면 어떻게 하겠오, 이런 판국에……" 하고 대답을 해서 우리는 다시 더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백 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친일문사들 혹은 부분적으로 친일행위에 몸담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 대다 수는 친일의 동기를 생존문제로 끌고 간다. 박영희의 문학활동에 대해서 상 세한 연구를 한 바 있는 김윤식은 1938년 이후 회월의 친일활동은 그의 문 학상에서 볼 때, {백조}파와 함께 한갓 허상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것은 박영희의 문학활동 전반을 볼 때, 그의 문학적 본질과 어긋나는 피할 수 없는 외도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1941년 {문장}지에 연 재한 문학원론 [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들고 있다. 이러한 점을 두고 임종국도 {친일문학론}에서 "일본 정신을 파악하고 나 서 친일 한 것이 아니라, 친일 하고 나서 일본 정신을 파악하려 한 탓이라 고 생각된다. 정신의 전향보다 행동의 전향이 앞섰고, 스스로 우러난 친일 전향이 아니라 외부적 압력에 의한 그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복원불가능하게 흔적 없이 우리 앞에 사라졌겠지만, 그에게는 아울러 수많은 친일적 글이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머무르고 있 다. {인문평론} 전쟁특집호에 실린 [전쟁과 조선문학](1939. 10), {매일신 보}에 실린 [국민문학의 건설](1940. 1. 1), [문장보국의 의의](1940. 4. 25), [문학운동의 전시체제](1940. 7. 6), [포연 속의 문학](1940. 8. 15∼ 20), [신체제를 맞는 문학](1940. 11. 6∼7), [국가이상의 문학](1941. 1. 1), [문학의 새로운 과제](1941. 4. 11∼15), [국민적 신문화의 제안] (1941. 7. 6), [대동아문학자대회 출석을 앞두고](1942. 10. 29), 그리고 {국민문학}에 실린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1941. 11. 일 문) 등이 그것이다. 이들 글은 이미 제목에서 당시 일제가 친일단체를 통해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느낄 수 있다. 박영희는 국민문학, 이른바 신체제문학론을 활발히 펼침으로써 스스로의 덫에 걸린 친일문학가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국체의 이념을 떠난 작가 개인의 인생관이나 국가관이나 세계관은 있을 수 없다, 국민총력 운동의 일익으로서 문학의 임전체제로까지 고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 앞에서 시대의 아픔으로 모든 것을 떠넘길 수는 없다. 다른 누구보다도 변혁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하려 했다가 탄압의 고통 속에서 그 이념을 벗어던지자 탄압의 회피를 위한 또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족쇄 를 차지 않을 수 없었던 박영희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 임규찬(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주요 참고문헌 백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 박영희, [문학정신], {인문평론}, 1941. 1, 권두언. ______, [문장보국], {인문평론}, 1941. 2, 권두언.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