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4시53분21초 KDT
제 목(Title): 유치진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柳致眞, 1905∼1974
·1941년 현대극장 대표
  1942년 이용구를 찬양한 장막희곡 [북진대] 발표






근대연극사 제일의 희곡작가

대한민국 국민치고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유치진을 모르는 이는 없
을 것이다. 아직도 연극문화가 일반대중의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서 연극 한 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면서도, 희곡 
작가 하면 으레 유치진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서 3·1 운동에 참여한 학생 정도와 그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 [조
국]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는 김유신의 아들 원
술화랑을 주인공으로 한 [원술랑]을 누구나 한 번 쯤은 읽었을 것이기 때문
이다.
유치진(아호 동랑)은 1905년 경남 통영에서 아버지 유준수(柳俊秀)와 어
머니 박우수(朴又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에 도일하여 호우야
마(豊山)중학에 편입한 이후 1931년 릿교(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기까지 
10년여 동안을 일본에서 지낸 그는, 1931년 귀국하자마자 신극운동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이후 그는 [토막](1932), [소](1935)를 
비롯하여 [조국](1946), [흔들리는 지축](1947), [나도 인간이 되련다]
(1953)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근대연극사 제일의 희곡작가
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그는 1974년 고혈압으로 운명하기까지 연극 연출을 
비롯하여 연극평론 발표, 극단 운영, 드라마센터 건립 등 다방면에서 연극
문화의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이다.
이렇듯 근대연극의 발전에 공로가 크고, 그것도 3·1 운동을 희곡화한 작
가 유치진에게 친일 작가 운운하는 것은 얼른 보면 부당하게 생각될지도 모
른다. [조국]만을 읽고서 자란 세대에게 유치진은 민족적 양심을 지닌 작가
로서만 기억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조국]은 해방 이후, 
즉 이 땅에서 일제가 물러간 후 누구나 애국을, 독립을 운운하던 바로 그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다.

[왜 싸워]를 두고 왜 싸워?

이 말은 1957년 말 지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왜 싸워 사건'을 다룬 한 신
문 기사의 제목이다. 이 '왜 싸워 논쟁'은 흔치 않은 연극계의 논쟁이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지금도 아슴프레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
다.
희곡 [왜 싸워]는 1957년 당시 한국연극학회 회장이던 유치진이 전국남녀 
대학생 연극경연대회에 상연하고자 제출했던 작품이다. 학생극 진흥을 위해 
좋은 창작극을 선보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자유문학}지에 1차 발표를 하
고, 동시에 대학생들에게 작품을 주어서 무대에 올리도록 준비를 착착 진행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자유문학}를 주관하고 있던 
김광섭(金光燮)이 [왜 싸워]는 친일작품 [대추나무]의 개작이므로 경연대회
에 상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유치진과
는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 시절 활동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동지이던 
김광섭에 의해서 '친일작품'을 상연하려 한다고 갑작스럽게 매도를 당하니, 
유치진으로서는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간지에 두세 차례 
설전이 있고 나서 사태는 흐지부지 진정이 되었지만, 유치진에게는 다시 한 
번 '친일작가'라는 낙인이 찍히는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구미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유치진이 돌아오자마자 
벌인 첫 사업에서 하필이면 [대추나무]의 개작을 들고 나섰는지 어지간한 
상식인이라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시대에 '친일' 작품이 필요했던 
것은 절대로 아닐 터이고, 그렇다면 그만큼 그 작품에 작가로서의 애정이 
간절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밖에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많고 많은 작품 가
운데 하필이면 [대추나무]였을까.
훗날의 자서전에서 유치진은 이 [왜 싸워]를 선택한 이유를 나름대로 밝
히고 있다.

[대추나무]는 1941년 내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현대극장을 주재하던 
무렵에 쓴 작품이었다. [대추나무]는 이렇게 일제의 강압하에서 쓴 작품
이지만, 그 무렵에 쓴 [흑룡강]이나 [북진대](北進隊)와는 달라 아첨하는 
구석이 없다.……작품상으로 [대추나무]는 그대로 재미 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는 데 서슴지 않는다. 이
렇게 내가 작가적 양심으로 아끼던 작품이라 [대추나무]만은 친일작품으
로 도매 취급당하는 것이 몹시 언짢았다. [대추나무]는 나의 작가적 고충
이 적잖이 서려 있는 유달리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다. 내가 대학 연극 콩
쿠르에 내놓은 [왜 싸워]는 이러한 [대추나무]를 개작한 것이었지 친일성
이 강한 [흑룡강]이나 [북진대]를 개작한 것은 아니었다.({동랑자서전})

유치진은 친일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흑룡강]이나 [북진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대추나무]는 작가적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일 뿐더러, 대
학생 연극대회에 [왜 싸워]를 내보임으로써 [대추나무]에 씌워져 있던 친일
의 굴레마저 벗어 던질 수 있다는 자못 거대한 욕심까지 가지고 있던 것 같
다.
그런데 [대추나무]는 1942년 가을 당시의 관제 연극단체인 조선연극문화
협회 주관의 제1회 (친일)연극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
는 전력이 있는 친일연극이다. 그럼에도 [대추나무]가 외형의 경력은 그렇
더라도, 내면에 있어서는 당시 민족의 현실을 우회적으로나마 다룬 작품이
라는 작가 자신의 평은 견강부회적 변명에 가깝다.
[대추나무]를 {신시대}라는 잡지에 발표하였던 1942년 10월, 유치진은 
[창성둔(昌城屯)에서]라는 기행수필을 {국민문학}지에 발표한다. 이 무렵 
희곡 발표 외에도 [싱가폴 함락을 축하하며]({매일신보}, 1942. 2. 19)라는 
일본의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일반 시사 수필까지 틈틈히 발표하던 그는, 
그 해 여름부터는 직접 만주지방을 기행하면서 보고서 형식으로 쓴 수필 
[개척과 희망]({매일신보}, 1942. 7. 30∼8. 5)을 발표한다.
[창성둔에서] 또한 만주지방의 기행 수필 가운데 하나이다. 그 내용은 평
북 창성군이 수풍 수력발전소 건설로 수몰되자 마을 주민 전체가 만주에 입
식(入植)하여 새로운 마을 창성둔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말이 수필이지 만
주에 와서 갖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창성둔이 모범 개척촌으로 자리 잡기까
지의 사례담을 통해 한국인의 만주 입식을 선동하는 성격의 글이었다. 이러
한 사례담의 형식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발표를 떠올리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이 수필은 공교롭게도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일제
가 강행하던 만주로의 '분촌운동'(分村運動)의 실상을 실감 나게 보여 주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대추나무]야말로 바로 이 창성둔 사례를 그대로 희곡화했다는 오
해를 받을 만큼, 당시 한국 농촌이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 그리고 좁은 땅덩
어리에서 이웃 간에 아웅다웅하고 살 일이 아니라 광활한 만주로 이주해 가
면 넓은 농토에 자작농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하는 분촌운동 
선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유치진은 분촌운동에의 독려 부분은 
살짝 빼 버리고 살기 힘든 농촌현실에서의 인간들의 삶의 애환을 그렸다 하
여 내심 작가적 애정을 보이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구한말 친일의 선봉 이용구를 찬양----장막희곡 [북진대]

그런데 [대추나무]의 친일성이 이 정도라면 작가 자신이 친일작품으로 인
정하는 [흑룡강](1941)과 [북진대](1942)는 어떠했겠는가.
[북진대](4막 5장)는 대추나무를 발표하기 반 년 전인 1942년 4월 4일부
터 7일까지 경성부민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현대극장 배우들이 
출연한 가운데 경성대화숙(大和塾:일본정신 교육기관) 주최로 상연된 작품
이다. 이 작품은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년 8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사
이에 일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위해 경의선 군용철도의 부설에, 
혹은 군수품의 수송에, 혹은 러시아 국내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색하
는 등, 일부 배일파(排日派)의 치열한 박해와 매도 속에서도 과감하게 일한 
양국의 합병에 헌신하는 모습"과 '대동합방론'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가지
고 일진회를 이끌었던 이용구*야말로 "한국을 열국의 세력쟁탈장에서 구하
고, 동양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 친
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선각자"로 인식시키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일종의 역사극이다.([북진대], {삼천리}, 1942. 7)
이 공연을 기획한 경성대화숙은 "이 연극은 내선일체의 심화철저를 기하
고, 대동아전쟁하에 있어서의 반도청년의 궐기를 촉하려고 한 작품으로, 내
선일체의 철저는 일한병합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의도
로 기획된 것으로서, 이 연극을 보면, 당시 조선반도가 남진하는 러시아의 
호구(虎口)에 놓여 있었던 것과, 반도민중이 일한병합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또한 일한병합이 무력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도민중의 자발
적 열망을 일본이 용인한 것이었음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라고 높이 평가하
고 있다.([북진대를 기획하고], {국민문학}, 1942. 6)

'국민연극'의 대표주자 현대극장을 주도

이처럼 당시에 훌륭한 국민연극으로 평가받던 [북진대]가 상연된 표면적 
계기는 경성대화숙의 기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 창작에 있어서는 유치
진 스스로 몇 개월에 걸쳐 작품 구상을 한 결과라 한다. 그 사연인즉, 1941
년 여름, 유치진이 이끌고 있던 극단 현대극장의 사무실이 견지정(堅志町)
에 있는 시천교(侍天敎) 교당으로 옮겨 왔는데, 그 곳은 다름아닌 대동일진
회(일진회의 후신)의 본산이었다.
그 곳에서 유치진은 러일전쟁 때 철도부설에 참여하였던 구일진회 간부들
로부터 직접 당시의 추억담을 듣곤 하였는데, 그에 감동을 받고서, 들을 때
마다 "존경스러운 체험담을 주제로 작품을 쓰고자 욕망"(유치진, [북진대 
여화])하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집필에 들어가기에 앞서 {원한국 일진회 
역사}(전4권, 문명사), 이선근(李宣根)의 {조선근세사} 등 15권 정도의 역
사책을 참고하여 상세한 조사까지 했다 한다. 결국 [북진대] 상연을 계기로 
보았을 때, 대동일진회와 극단 현대극장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나 하는 것
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현대극장은 어떻게 만들어진 극단인가. 1937년 중국을 침략하면
서 전시체제로 돌입한 일제는 문화예술부문에 있어서까지 전쟁동원체제를 
강화시킨다. 그 결과, 이동연극 등을 통한 일선 위문공연을 비롯하여, 후방
에서도 징병이나 징용에 대한 선전, 내선일체나 국민(사실은 일본 국민으로
서의)정신의 선전 등에 나서도록 적극 독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1년 3월 총독부 연극담당 사무관 나라데(星出壽雄)가 
주도하여 직접 만든 극단이 바로 현대극장인 것이다. 그 진용은 유치진을 
대표로 함대훈(咸大勳), 서항석(徐恒錫), 주영섭(朱永涉), 이원경(李源庚), 
함세덕(咸世德) 등과 이백수(李白水), 강홍식(姜弘植), 전옥(全玉), 김양춘
(金陽春), 김동혁(金東爀), 마완영(馬完英), 이해랑(李海浪) 등 "전일의 극
예술연구회와 동경학생예술좌, 토월회, 그리고 일부 상업극단과 영화인들로 
구성되어 마치 예술계 전반의 대동단결로 보여진다"(박영호, [예술성과 국
민극], {문장}, 1941. 4)고 하였다.
현대극장의 창립공연은 유치진 작 [흑룡강](5막)이었다. [흑룡강]은 "만 
2년에 걸쳐 5차의 퇴고를 거듭한 조심루골(彫心鏤骨)의 야심작"으로서, "소
박하고 거칠고 야성적인 것을 리얼한 면에서 취하여 대륙기질의 다이나믹한 
박진력을" "비열(沸熱)된 이념의 승화"로 이끌고자 하였다는 것이 작자의 
말이다(유치진, ['흑룡강' 상연에 제(際)하여, {매일신보}, 1941. 6. 5). 
만주에서의 조선 농민이 일본영사관의 보호 아래 복지 만주(福地滿洲)의 터
전을 닦아 나가는 것을 내용으로 한 [흑룡강]은 본격 '국민연극'으로서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현대극장은 함세덕 번안의 [흑경정](黑鯨亭, 1941), 유치진의 [북진
대](1942)와 [대추나무](1942), 함세덕의 [에밀레종](1943)과 [남풍]
(1943), [황해](1943), [청춘](1944), [백야](1945), 조천석(朝天石)의 [셔
어멘 호](1944) 등 '유수한' 국민연극을 상연하였다. 유치진은 희곡 창작보
다 연출을 위주로 활동을 했는데,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에도 약초
(若草)국민극장(지금의 스카라극장)에서 박재성(朴在成) 작 [산비둘기](4
막)를 공연중이었다 한다.
그런데 유치진은, 현대극장을 조직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총독부
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유치진은 현대극장이 창립되기 이전에 이미 국민연극 지도기관인 
조선연극협회(1940. 12)의 이사로서 국민연극의 주요 사업을 제안할 정도로 
국민연극에 적극적이었다.

문화단체로서 연극인협회가 앞으로 연극을 위해서 해야 할 사명은 실로 
크다. 문화단체로서 해야 할 사업의 범위를 적어본다면,
(1) 우선 새로운 국민극 수립을 위해서 연극인 양성을 목표로 한 연극
학교는 가까운 장래에 하나쯤 설립되어야 하겠고,
(2) 극본감독부라는 부서를 협회 내에 두어서 당국에 제출하기 전에 협
회로서 우선 극본의 사전검열을 행하여, 당국에서는 주로 극본의 치안상 
검열을 한다면 극본감독부에서는 문화적 내지 예술적인 검열을 하게 함이 
어떨까 한다. 연극의 질적 향상과 국민극의 방향을 건전케 함은 무엇보다
도 극본이 먼저 그 성과의 열쇠를 가졌으니, 좋은 극본의 생산을 위한 격
려와 감상은 그 책임을 당국에서보다 연극의 전문단체인 협회에다가로 분
담시킴도 일 방책인 듯하다.
(3) 협회에서는 잡지를 발행하여 협회가 내포하는 극단 내지 회원 상호
간의 소식전달과 국민극 수립에 대한 이론적 확립과 희곡의 활자화와 관
객층의 교도와 지상 개척을 책(策)해 봄도 좋을 듯하고,
(4) 연극상제도(상금은 많을수록 좋음)를 제정하여 연 1회 그 해에 가
장 우수한 업적을 남긴 연극인(협회에 소속된 극작가나 배우나 무대미술
가나 기타 연극종업자)에게 상을 정여(呈與)하여 연극기술의 장려와 연극
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으면 좋겠고,
(5) 연극종업자의 공제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실업한 혹은 병환에 신음
하여 일하지 못하는 협회원의 생활개척의 일조를 삼으면 어떨까 한다. 
(유치진, [신체제하의 연극----조선연극협회와 연관하여], {춘추}, 1941. 
2)

그리고 그는 "연극협회가 조직되어 문화통제의 일익으로서 연극통제가 실
시되게 되자", "연극은 종전과 다른 의미에서 진흥의 기운을 보이고 있다"
는 점을 언급하면서, "세계연극사를 들쳐보더라도 연극이 국가적인 보호를 
받았을 때에 보다 왕성했던 전례를 지적할 수 있다"며 국민연극이야말로 연
극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강변하고 있기도 하다(유치진, [원칙적인 것과 구
체적인 것], {조광}, 1941. 6).
이로 보면, 유치진은 조선연극협회의 결성에 대해 문화신체제라는 시국적 
요구에 대한 대응 외에도, 연극 부진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 지원
·장려의 기회로까지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치진에
게는 조선 신극사에서 처음으로 당국의 탄압 없이, 나아가서는 당국의 '지
원' 아래 연극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 인식되었기 때문에, 
'암흑기'의 사업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연극학교, 연극잡지, 연극상 제도, 
연극인 공제회의 조직 같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업 구상을 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선연극협회와 현대극장의 결성이 단지 일제 당
국의 강압과 강요에 의한 것만은 아니고, 당시 연극인들의 '자발적' 참여 
과정과 결부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에 남은 친일연극의 청산 문제

유치진이 친일연극 활동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유치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극예술연구회(1931)를 조직하여 신극운동을 전개하던 초기
에는 [토막], [소], [버드나무 동리에 선 풍경] 등 비교적 일제하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던 가난한 농촌의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희곡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가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 프롤레타리
아 연극운동을 하던 작가들보다 저항성이나 민족의식의 토대가 강했던 것도 
또한 아니다. 그의 민족의식이 허약했기 때문에, 일제 말이 되자 앞에서 살
펴본 대로 '국책연극으로서의 국민연극'의 진흥에 앞장 섰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극'에 관해서라면 비록 유치진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치진
만이 유별나게 나서서 설친 것도 아니고, 신파 배우든 좌익 출신이든 할 것 
없이, 어떤  면에서는 한결같이 '국민연극'의 각본을 쓰고,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하고, 무대장치를 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일일이 거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거의 모든 연극인이 국민연극에 종사했다. 일제의 탄압이 
가장 심해진 1940년대에 들어서 그 많은 연극인 가운데 한 사람도 투옥되거
나 심지어는 상연금지된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를 잘 웅변해 준다. 따
라서 유치진의 친일연극은 그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비극적이
지만 전체 근대연극사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다(이 때문에 연극
계는 해방공간에서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 문제를 
훗날의 과제로 남겨 놓게 된다).
일제하에서 활동하던 지식인치고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식민지하에서의 연극인 또한 우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서 연극을 해야만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 
그러한 고충을 우리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 그러나 아무리 개개
인의 면면과 고충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국민연극'으로 근대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역사적 과오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개인의 친일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친일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 연극 문화가 주체적·자주적 문화로 자
리 잡지 못하고,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오늘
의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 연극의 잘못된 뿌리에 대한 진지한 점검 한 
번 없이, 유치진과 관련된 것이라면 친일도 괜찮은 것이라는 안이한 사고방
식 자체에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연극 [격정만리]의 사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현재의 한국연극협회가 연극계 선배들의 친일문제는 그저 덮어 
두려고만 하면서 건전한 민족연극의 발걸음을 붙잡으려고 한다는 데, 그 심
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해방 직후 일제 잔재의 청산
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 있을 것이며, 그 이후로도 계
속하여 교과서나 일반인의 인식 속에 무감각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우리 연극사의 큰 위치를 가지고 있는 유치진에게 일단의 욕이 
되는 내용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덮어 둔다고만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냉엄
한 지적만이 그에게 덧씌워진 역사의 굴레 또한 바르게 벗겨 내는 길일 수
도 있다. 죄가 밉지 인간이 미운 것이 아니라는 상투적 표현을 빌리지 않더
라도 유치진의 친일행각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연극이 바른 방향을 찾아나가
는 데 타산지석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박영정(연극평론가, 건국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주요 참고문헌
유치진, {동랑자서전}.
      , [북진대], {삼천리}, 1942.7.
      , [신체제하의 연극----조선연극협회와 연관하여], {춘추}, 1941. 
2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