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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6월02일(일) 05시01분43초 KDT
제 목(Title): 80년대 학생 운동 야사  #6



번호:119/174  등록자:KWITONG  등록일시:95/02/06 22:39  길이:106줄
제 목 : 80년대 학생운동 야사(6)

학생운동 야사 여섯번째..

                - 참세상에서 퍼온글입니다..
       

노무현 의원의 의식화(?) 과정


   학림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것도 6월 무렵이었다.   81년 상반
기 들어 학생시위는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  등을 넘어서 70년대에
는 시위가 없었던  경희대, 외대, 동국대 등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으므
로 공안당국은  무림 이외의 또  다른 조직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때마침  불온서적을(?)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던 도서출판  광민사 
대표 이태복씨를 중심으로  꼼그룹이 형성되고 있다는 첩보에  접한 수
사당국은 이태복씨 주변을  집중 수사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광
민사 편집부장  이선근씨와 부산대  6.12 시위관계  수배자 김진모씨가 
함께 있다가 잡힘으로써  공안당국은  뭔가 있다 는 감으로  수사에 박
차를 가하게 된다.결국 이선근씨 방에서  학림 중앙위원회 회의 자료가 
압수되고 회의를 하러 그곳에 왔던  박문식, 민병두, 이덕희씨 등 중앙
위원들이 몽땅 연행됨으로써 학림사건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당국은 이 사건 관계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치기 위해 무척 고
심했다.  심지어  이들의 공소장에는  영국의 공산주의자  E.H. 카아가 
지은  역사란 무엇인가 를 탐독하고 라는  구절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카아는 소련주재 영국대사를 역임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는데 이같이 황
당한 공소사실 때문에 사법부는  영국대사관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
다.
   아무튼 학림조직은  스스로 제기한 정치노선과 조직의  문제에 대해 
일정한 성과를 내기  전에 깨졌지만 81년 상반기에  학생운동이 침체에
서 벗어나  민주화 시위를 일상적으로 벌일  수 있게 한 데  기여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학림이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적의식적인 노력의 소산이었다고 
한다면 학림의 여파로 그 해 8월에  터진 부림사건은 완전한 조직의 산
물이었다.
   부산대 학생운동  출신의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여  국가보엌, 반공
법, 집시법  등으로 옭아맨 이  사건은 그동안  부산지역 민주운동권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5공의 싹쓸이  작전이었다.  부림사건과 거의 같은 
시기에 터진  오송회   금강회   아람회  사건들을  볼 때 이 무렵 5공
은 지방의 민주운동권을 전반적으로  정리하려는 스케쥴을 가지고 있었
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여간 이  사건은 부산 민주화운동권을 쑥밭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또 한 사람의 운동가가  탄생했다.  노무현 변호사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당시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김광일 변호사는 부
산지역에서 민권운동에  참여해온 죄목으로 걸핏하면  부림사건의 공소
장에 이름이 나오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변호사가  아니라 피고 비슷
하게 돼버린 김광일  변호사는 그때까지 시국사건을 맡아본  일이 없었
던 노변호사에게 이 사건을 맡을 것을 권유하게 된다.
   대학을 나오지 못했던  노변호사는  대학까지 나온 이  사람들이 왜 
사서 고생을  할까  하는 궁금증에서  변론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노무현씨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기를 이루게  된것이었다.  자신이 담
당한 피고 송병곤씨를   연애하듯  자주 만난 노변호사는  공소장에 나
온 책들을 거의 독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침내 의식화(?)가  된 그가  재판정에서 변론중 
알리하고 포먼하고  권투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편을  들었을때 
피고인들도 알리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행위냐 고 따져  묻자 당시 
최병국 검사는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삼가해 주십시오 라고 소리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10.23 동해백주 사건


   81년 2학기가 시작되던  무렵 색다른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당시 
연세대 신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영창씨가   무림파천황 이란 무
협지를 썼다고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된 것이다.박씨는  당시 아르바이
트로 무협지를  쓰고 있었는데 자신이 쓴   무림파천황 에다가  무림의 
세계에서는 정파와 사파가 나뉘어  싸우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지배계급
과 피지배계급이  투쟁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
과 노동자계급이 투쟁하다가 싸움이  발전하면 자본자계급이 타도된다 
라는 구절을 써넣었다.   그런데 한 만화가게에서  이책을 보던 독자가 
   간첩 나타났다 고 신고를 한 것이다.  박영창씨는 이일로 꼬박 징역
2년을 살았다.  현재 박영창씨는  무협지에다 그런  구절을 써넣는다고 
무협지 독자의 의식이 바뀔리가 없으니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두기를  당부하고 있다.
   무림, 학림의 연이은  검거로 학생운동이 적잖게 위축되어  있을 때 
서울대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 날 시위가 성공하는데 크
게 공헌한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동해백주  였다.  
   81년 10월 23일에는 때이른 첫눈이  왔다.  아침에 학생식당에 모여
있던 공대, 가정대 연극반원 10여명은  순간 환호성을 올렸다.  공대의 
한 친구가 당시 새로나와 인기가  있던  동해백주 를 가방에 몇병 사넣
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첫눈이 날리는  아크로폴리스에 둘러 앉
아 동해백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연극반원들의 술자리에 노래가 빠질
수 없었다.   81년 5월  노비문서  공연을 통해  박치음씨 작곡의 전진
가를 보급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짭새들이 이제나 저제나 시위
가 터지나를  감시하고 있던 삼엄한  상황이었다.   연극반원들이 시위 
발발의 본거지인  아크로폴리스에서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자  이것이 
무슨 조짐인가  하고 궁금해 한  학생과 직원들이 쫓아올라왔다.  티격
태격 시비가 붙자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별 수  없이 동해백주 팀은 
쫓겨났는데 그로부터 10분후 시위가 터졌다.   주동은 지영근, 이상대, 
박상영씨 등  사범대팀이었다.  결과적으로 동해백주  때문에 모여들었
던 학생들이 몽땅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날 시위에는  똥물병과  이단옆차기 가 등장했다.   9월달의 시위
가 문교부의 엄명을 받은 일부  보직교수들의 진압(?)으로 번번이 실패
하자 이날 주동  학생 중 지영근씨(체육교육과 77학번)가  교수들 가운
데 가장 악질적이었던 학생처장을 이단 옆차기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하여간 이들은 스승에게 똥물을 퍼붓는가  하면 구타까지 하는 패륜
아들로 대서특필되었다.   하지만 이후 서울대 시위에서   교수들의 진
압 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 시위에 이어진  일주일 간의 축제 거부 시
위에서는 주동없이도 공연하러 온  연예인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대중행
동이 이어졌다.   국풍 '81식의  관제 향락 문화로부터  학원을 지켜야 
한다는 결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위후  동해백주팀은 박한석씨(당시 도시공학과  대학원 1학년)
가 제명되고 학부생들이  정학을 당했다.  죄명은  학교에서 술 마시고 
고성방가를 했다는  풍기문란  혐의였지만  시위 성공에 기여한데 대한 
보복임과 동시에  성장하는 문화운동쪽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도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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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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