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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6월02일(일) 04시59분06초 KDT
제 목(Title): 80년대 학생 운동 야사  #5



번호:118/174  등록자:KWITONG  등록일시:95/02/06 22:39  길이:121줄
제 목 : 80년대 학생운동야사(5)

학생운동 야사 다섯번째..

                - 참세상에서 퍼온글입니다..


국풍 '81과 가수 이용


   5공은 학생운동에 철퇴만을 가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들의 문예
활동을 친정부적인  것으로 이끌려는 문화정책도 구사했다.   허문도씨
의 작품으로 알려진 국풍  '81의 개최전 그는 전국대학생탈춤반연합(이
하 연탈) 대표자들을 만나 협박과 회유를  계속했다.  국풍 '81에 참여
하면 돈도 주고  활동도 보장하겠지만 그려 않으면  몽땅 깨버리겠다
는 것이었다.  연탈지도부로서는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광주항쟁 1주기를 맞는 5월에  여의도에서 놀자판을 벌이겠다는 정권측
의 의도를 빤히  알고 있었던 연탈지도부는 전국을 돌며  각 대학 문화
팀에 국풍 '81 거부를 권유했다.
   이래서 1백개에 달하는 전국 탈춤반 중  국풍 '81에 참가한 팀은 영
남대 하나 뿐이었다.   아울러 춤, 노래, 연극 등  문화팀의 활동이 가
장 활발했던 서울대에서도 갤럭시라는 그룹사운드  하나 만이 국풍 '81
에 참가하게 된다.   갤럭시 멤버 중 한 학생의  아버지가 현직 장관이
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풍 '81 가요제 참가자 중 누가  봐도 제일 노
래를 잘한 가수 이용(당시는 데뷔  전)을 제치고 서울대 갤럭시가 그랑
프리를 차지한 것도 국풍 '81의 정치적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학생운동권이 국풍 '81에 전혀  참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풍이  열리고 있는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인파  중 상당수는 
운동권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이들은 구경대신  살인정권 타도 
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래서  당시 국풍 '81
을 중계하던 TV  화면에는  여의도에 인파가 몰리고  있으니 집에서 시
청해 주십시오 라는 자막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해 5월은 전국적으로 각  경찰서 전투경찰들이 매우 바빴던 달이
었다.   5월 6일에는  연세대와 동국대에서  동시에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동국대의  노세극씨(행정학과 78학번,  현 노동운동가)는  도서관 
앞 은행나무에 올라가  시위를 주동하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현
재 동국대생들은 이  나무를 응봉지목이라 부르고 있다.   응봉은 노세
극씨의  호 였던 것이다.
   또한 5월 12일에는 성균관대생들이 학내시위  후 종로4가 전매청 앞
까지 진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날 시위를  주동한 김 안씨(사학
과 80학번)는 사범대  옥상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들을 들고 있던 
빨래방망이로 두들겨패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지상에서도 마찬가
지였다.  1천여명의  학생들이 학내를 휩쓸고 돌아다니며  시위를 벌였
다.   학생들을 뒤쫓아 경찰병력과  페퍼포그차가 학교  깊숙히 들어간 
뒤 학생들은 슬금슬금 교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사히 교문을 
통과한 성대생들은 종로4가에서  80년 5.15 이후 첫  가두 시위를 벌였
던 것이다.                                                
   전투적인 학생운동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성균관대.  이들의 전투성
의 근원은 무엇일까?   성대인들은 그 원인을  안정된 조직체계와 항상
적인 교육, 훈련과정에서  찾고 있다.  80년대 초  성대 학생운동 조직
은 1-2학년 때부터  학생들에게 여러가지 훈련들을 시켰다.   낙서, 스
티커,  유인물 살포작업들이  그것이었다.   물론 실패하기  일쑤였다.  
김현수씨(사학과 80학번)는  당시를 돌아보며   나이론 끈에  유인물을 
묶어서 담배불과 함께  매달아 두고 멀리서 유인물이  살포되기를 기다
려도 함흥차사라 가보면 담배불이 꺼져있곤 했다. 고 말했다.
   이와는 달리 자금난으로 실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즉 담배개
비에  타도 전두환 등의  구호를 써서 강의실에 뿌려두는  것도 훈련프
로그램의 하나였는데 당시 가장 좋은  담배인 거북선이나 솔의 경우 학
생들이 잘  주워갔지만 돈이 없어  청자나 환희를 뿌려두게  되면 호응
(?)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전두환 X   국풍 X 


   5월 27일에는 광주학살을  규탄하며 한 젊은이가 자신의  생명을 내
던졌다.  그의  이름은 김태훈(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광주태생으
로서 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때문에 한 해 동안 고민해  왔다. 김태훈씨는 운동권 학생이 아
니었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는 이  사건으로 연 3일간  시위를 벌인다. 이후  84년 복학생협의회는 
김태훈씨를 비롯한 민주열사들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는데 짭새들은 이
것마저 훔쳐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태훈 열사가 도서관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진 날 외대 도서관에서
는 재미있는(?) 유인물들이  떨어져내렸다.   전두환 X    국풍 '81 X  
라고 갱지에 볼펜으로 쓴 유인물들을  쓴 장본인은 이재현씨(영문과 78
학번).
   5월 26일 저녁 유인물을 밀기  위해 등사용품 일체를 가지고 여관에 
투숙한 이재현씨는 시간이 갈수록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한번도 
등사기를 사용해 본일이 없는 그는  선배들에게 들은 대로 열심히 원지
를 긁어 롤러로 밀었으나 끝내 유인물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새벽녘 등사를  포기한 이재현씨는 가지고 간  백지들에다 볼펜으로 
성명서를 쓰기 시작했다.  40-50장 정도  쓰다 팔이 아파진 그는 1백장 
가량은 구호만 쓰고 나머지 1백장엔  전두환  X   국풍 X 란 초미니 구
호를 적어 넣었다.  현장에서  연행된 이재현씨는 경찰서에 가서도, 자
신은 중학교 때부터  등사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는 한  경찰관에게 설
움을 당했다.  너는 애가 왜 그렇게 무식하냐? 등사기도  밀 줄 모르고. 
   81년 들어 학생운동의 투쟁력이 급격하게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사
실이지만 곳에  따라서는 지진아들도 있었다.   전남대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들은 광주항쟁때 전남대  학생운동권이 맥없이 도
망치고 말았던 원인을  과학적인 이론 의  부족에서 찾으면서 81년의 1
차적인 목표를 체계적인  사회과학 학습에 두었다.   이러다 보니 광주 
항쟁 1주기에도 정작  현지인 전남대에서는 시위 한  건 없이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5월이 저물어 갈 무렵  전남대 교정에는 다량의 유인물이 뿌
려졌다.   아카시아  향기가 흩날리는 5월 이란 매우  문학적인 문장으
로 시작되는  이 유인물은  사회과학한다는  년놈들아 정신차려라 라는 
욕설로 끝을 맺고  있었다.  재학생들의 미온적인  태도에 울화통이 터
진 시인 박몽구씨와  몇몇 전남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81년 학생시위에 나타난 새로운 양상  중의 하나는 여학생들의 적극
적인 참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권측은 이러한  현상에 내심 당황
해 하면서도 이것을 비방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향신문 에 
81년 12월부터 1월까지  연재됐던 학생운동 관계 연재물   대학가의 음
영 (특별취재반 명의로 되어 있으나 실제  필자는 박 순식기자)은 이화
여대에서 6월 4일  시위를 주동한 조기숙씨(무용과 78학번)에  대해 이
렇게 쓰고 있다.

c 양(조기숙씨)의 보이프렌드 k 군이 데모를 주동하기 직전  c 양에게 남
긴 말은 c 양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 같은  남자는 사랑만이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일치하고 고난의 길을 
같이 걷겠다는 여자라야 일생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애 
몇일을 고민한 끝에 c  양은 k 군처럼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형기를  마치
면 k 군과 결합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80년 5월 당시   4.19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대  선배들의 전철을 되
밟지 말자 는 각오로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던 이대 학생운동권은 81년 
당시 상당한 수준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조기숙씨는 이러한 조직
과 후배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시위동기를   남자친구의 영
향 으로 진술했던 것이다.   이대 운동권의 제 1의  목표는  이대는 데
모 안 하는 애들, 시집 잘  가려고 간판 따러온 애들 이란 인식을 극복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경찰 역시 그러한  이대관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에서  시위가 일어나도 배후  조직을 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이대 운동권은 더욱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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