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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6월02일(일) 05시06분34초 KDT
제 목(Title): 80년대 학생 운동 야사  #7



번호:120/174  등록자:KWITONG  등록일시:95/02/06 22:40  길이:94줄
제 목 : 80년대 학생운동야사(7)

학생운동 야사 일곱번째..

                - 참세상에서 
퍼온글입니다..                                                


없어진 총 2자루와  109인 사건  


   11월 7일은 고려대와  외대 1학년생들 문무대 입소일이었다.   학
생들은 군사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의  의식을 획일화시키려는 의미를 충
분히 알고 있었지만  80년 병영집체훈련 싸움의 실패를  교훈삼아 일단 
입소에 응하기로 하면서  나름대로의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즉 획일
적인 군사문화를 주입하려드는 것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
다.
   학생들은 문무대에  도착하자마자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며 광
장을 돌았다.   그러자 대령 한 명이 법대학생  1-2명의 명찰을 뜯더니 
끌고가려 했다.  주변에서 보고만  있을리가 없었다.  이래서 몸싸움이 
벌어져 대령이 떠밀려 넘어졌다.   이것이 고대  109인 사건 의 발단이
었다. 
   다음날 아침 12중대 1내무반에서  소위  애국가 거부사건 이 벌어졌
다.  조교가 아침점호를 한다고  학생들을 부동자세로 세워 놓고  애국
가 제창 을 명령하였다.   학생들은 조교의 고압적인  상명하달식 태도
가 부당함을 지적하며   우선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 
고 요구했다.  물론 학생들이 그  이유를 굳이 듣자는 것 보다는 분단, 
안보, 구국의 논리로 학생들의 비판적  의식을 윽박지르려는 문무대 입
소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보안대원
이 어챰릿 없게도 이들이  빨갱이다 라고 상부에 보고한 것이었다.
   다음날 문무대로 달려온 고대 대학원장  등 4-5명의 교수가  이야기 
좀 하자 며 12중대 1내무반을 찾아왔다.   그런데 뒷날 109명의 강제징
집된 학생들은 이  날의 대화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보안대에 보관
돼있음을 알게된다.   불순분자(?)의 체크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
이다.   고대생들이 문무대에서 돌아오자마자 학교에는  제적설이 떠돌
기 시작했다.   결국 82년 1월  말부터 2월 초 사이에  제적, 지도휴학 
등으로 109명의 학생들이  강제 징집됐다.  외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약 50명의 학생들이  강집되었다.  핑계는 이들이 퇴소한  후 총이 2자
루 없어졌다는 것이다.   2-3개월 후 이 총을  훔쳐간 도둑을 잡았지만 
(학생들이 아닌) 강집된 학생들은 학교로 돌려보내지지 않았다.
   심지어 문무대에서 영화로  본 북한 어린이들의 노래   김일성 수령
님 감사합니다 를 흉내내며  교문앞에서 놀고 있던 고대  의대생 7명까
지 경찰서로 끌려가 두들겨 맞고 바로 강집되기까지 했다.
   82년 3월 24일과 4월 9일  고대와 외대에서는 강제징집을 거부한 한
대희씨(외대 독어과 81학번)등에 의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이 뿌린 
유인물은  남한산성 반독재 투쟁선언 이라는 제하의 것이었다.
                                                       

부미방으로 상금 탄 사람들  


   82년 3월18일  남한에서 30년만의 반미투쟁이 전개됐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하 부미방)이 일어난 것이다.
   광주의 경험  이후 운동권 내에서는  미국을 보는  시각이 올바르게 
자리잡혀 가고 있었지만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시기상조 
라는 생각들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국민들의 미국관은  더 말할 나
위도 없었던 것이다.
   부미방의 주도자들이  잡힌 것도  반미=간첩 이라는  부산 시민들의 
인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부식씨가 휘발유를 담을 물통을 맡
겼던  한영식당   아주머니는 자주 들르던 문부식,  김은숙씨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건 후  그는 신고를 하고 경찰과 함께 고
신대학에 가 학적부를 뒤져 두 사람의  사진을 지목했다.  더욱이 방화
자 중의  한 사람인 이미옥씨의  옆집 주인은 이미옥씨가  밤중에 책을 
장독대에 숨기는 것을 보고  신고를 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각기 1
천만원과 8백만원의  상금을 받았지만  이웃의 정리 는  그들을 용서하
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동네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타지로 떠났
다고 한다.
   부미방팀의 예상보다 불이  크게 번진 것은 김은숙씨의  말대로  휘
발유를 무식할 정도로  많이 사용한 탓 이었다.   김은숙씨와 이미옥씨
는 각기 양손에  벌건 휘발유가 든 물통을 들고   저게 뭔가 싶어 쳐다
보는 사람들을 헤치고  문화원을 향해 50미터 가량이나  걸어서 문화원 
현관에 4통의 휘발유를 쏟아 부었던 것이다.
   방화 직후  도망친 김은숙씨등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안절부절을 
못했다.  불이 꺼져야 되는데 계속 타고 있다는 뉴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사건 때문에  장사를 망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호철씨(부산대 77학번 현 노무현 의원 보좌관)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씨는 학림사건이 터지고 그 여파로  부산 지역에 부림사건이 일어
나자 학림과 부림의 연결고리인  자신이 도피하면 사건이 축소될것으로 
판단, 장기간의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81년 6월맺터 약 3개월간 시
골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그는 9월 경부터 서울에  올라와 명동에 있는 
별셋 주점 에 취직한다.  아라이(접시닦기)에서  시작한 그는 몇달 후 
실력을 인정받아 주방장 바로 밑  서열인 큰칼잡이까지 승진하게 된다.  
그 후 주방 밖으로 나롸 웨이터 중  서열 2위인 지배인 바로 밑의 홀장
으로 보직을  옮겨 3월 경까지  근무하던 이호철씨는  장기적인 은신을 
위해 친구와 남대문 시장에서 넥타이  장사를 하기로構 오랫동안 못 
볼 부산의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3월  18일, 부미방이 일어난 날이었던 것이
다.  시내 중심가에 전경이 쫙  깔려 있어 깜짝놀란 이호철씨는 후배들
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부산을  빠져나왔는데 경찰은  바로 이호철씨를 
찾기 시작했다.  이호철씨가 학림, 부림의  잔당이라는 점, 81년 6월 1
2일 부산대  시위 때 나무밑에 불을  질렀다는 점, 그리고  3월 18일에 
이호철씨 비슷한 사람이  현장에 나타났었다는 점 등이  그의 혐의들이
었다.
   전보대에 몽타쥬가  나붙는 상황이었으므로 서울로 올라와  다시 주
방으로 들어간  이호철씨는 끝내  넥타이 장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별셋 주점 을 덮친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3월 18일 내려갔을 때 신
변이 위험하게 된  후배에게 만약의 경우 찾아올 곳을  알려준 것이 결
정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
퍼오기 끝.

위의 내용은 하나비의 빨간장미님이 천리안에 다시 올라왔던 것을 다시 퍼온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잠이 들고파..
Till the rivers flow up stream       |        Love is real      \|||/   @@@
Till lovers cease to dream           |        Love is touch    @|~j~|@ @^j^@
Till then, I'm yours, be mine        |        Love is free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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