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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6월02일(일) 04시57분28초 KDT
제 목(Title): 80년대 학생 운동 야사  #4



번호:117/174  등록자:KWITONG  등록일시:95/02/06 22:38  길이:72줄
제 목 : 80년대 학생운동야사(4)

학생운동 야사 네번째..

                - 참세상에서 퍼온글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조직  무림 


   12월 11일 12시 경 서울대 학생식당  앞, 돌연 4명의 학생들이 나타
나  반파쇼 학우 투쟁 선언 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무림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이날의 상황은  남충희(철학과 77학번),  남명수(언어학과 77학번), 
김회경(교육학과 76학번),  윤형기(토목과 77학번)씨가  주동한 유인물 
배포를 목적으로 한  시위에서 그쳤다.  그러나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경찰이  배포조가 직접  유인물을 쓰지 않았다 는 단서를  잡으면서 확
대되기 시작했다.
   사실 5.17  이후 구속된 학생회 간부들은  수사과정에서 학내조직이 
노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5.17 이후에도 서울대 학생운
동 조직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상
황은 표변했다.   서울대에서 조사를 받은 사람만  2백50여명에 달했고 
구속,강제징집당한 사람은  유인물 내용 검토자인 최영선,  현무한, 박
남운(약대 77학번)씨와  유인물 작성자 김명인씨를 포함  70-80명에 이
르렀다.  워낙  예상외로 많은 인원이 수사선상에  떠오르자 수사 당사
자인 검찰조차 당황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조직이 도무지 종잡을 수
가 없는 안개 속의 조직이라 해서 무림이라 이름붙였다.
   최영선씨 등 당시  무림의 지도부가 이 유인물의  배포를 결정한 의
도는 이른바 무,학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학기 개학 후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이  무엇을 잘못했으
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란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돼 경
찰의 첩보망에 조직이  노출될 위기에 까지 이르자  무림지도부는 자신
들의 입장을  공개 선언함으로써  그간의 논쟁의  난맥상을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근로대중의 의식이 낮고 지도력도  부재한 현재 학
생운동은 전체운동을  진행시키는 주도체이다.  따라서  학생운동은 시
위만능주의를 버리고  내적 준비를 충실히  해야 한다 는  것이 선언의 
내용이었다.  어쨌든 무림사건을 담당했던  보안사의 한 분실장은 수사
가 마무리 된  시점 쯤에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은  일망타진됐다.  앞
으로 짧으면 3년, 길면 8년은  서울대에서 시위가 없을 것이다 라고 호
언장담했다.  과연 그랬을까?
                                                                  

서울대에 출현한 눈사람과 타잔


   81년 3월  19일은 한국의  공안당국자들에게는 악몽같은  날이었다.  
80년 말 서울대 무림 조직을  일망타진했다고 믿은 그들은 적어도 향후 
3-8년간 대학가에는 시위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개강 후 2주일이 채 되지도  않은 이 날 바로 서울대에서 대
규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 날 시위의  주동자는 유기홍씨(국사학
과 77학번)와 문용식씨(국사학과  79학번) 등 5명.   이들은 5공치하의 
삼엄한 대학에서  시위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공전 의  기법을 도입했
다.  학생회관 3층의 한 방을  점거하여 플래카드를 내걸고 한 손엔 횃
불을 들고 창틀에  올라서서  반파쇼 민주화 투쟁선언 을  낭독한 것이
다.
   기습을 당한  학내 상주 경찰(이하  짭새)들이 도끼를  들고 달려왔
다.  이들은 걸어잠근 나무문을  때려 부순 뒤 두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후 횃불을  휘두르며 짭새들과 싸우던 문용식씨가  소화기 분말을 
하얗게 뒤집어 쓴 눈사람이 되어  잡혀가는 순간 유기홍씨는 창틀에 매
어 둔  자일을 타고  학생들 속으로  내려와 대열을  이끌기 시작했다.  
타잔작전 이 성공한 것이다.
   이 날의 시위는 양동작전이기도 했다.   학생회관 맞은 편의 도서관 
난간에는 박태견씨(국문학과 78학번)가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뒷날 학교측은 아크로폴리스에 는 장미꽃을  잔뜩 심고 도서관 창에
는 철망을 둘러쳤다.  그러나 이것은  시위를 막는데 별다른 효과를 보
지 못했다.  학생들은 장미꽃은 훌쩍  뛰어넘고 철망은 칼로 찢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날 저녁  인문대 여학생 휴게실에서는 1학년 여학생 
모임이 열렸다.   모임의 목적은   민중과 지식인 이라는  책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모여든 여학생들은 기왕의 프로그램
은 제쳐두고  그 날 시위를 본  소감들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모두들 
호의적인 반응들이었는데  유독 한  여학생이  시위학생들의  배후에는 
불순 세력이 있다 며 끈질기게 시위를  비난했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주소록을 작성하기  위해 백지를 돌리던 모임의  주관자 석미주씨(종교
학과 79학번)는  이 학생이 쓴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전두환씨의 딸 전효순씨였던  것이다.  몇일 후  총장을 통해 종교학과 
과장에게 석미주씨를  조심시키라 는 얘기가 내려왔다고 한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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