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6월02일(일) 04시56분03초 KDT 제 목(Title): 80년대 학생 운동 야사 #3 번호:116/174 등록자:KWITONG 등록일시:95/02/06 22:37 길이:142줄 제 목 : 80년대 학생운동야사(3) 학생운동 야사 세번째.. - 참세상에서 퍼온글입니다.. 운명의 5.15 서울역 회군 5월 13일 가능한 한 최대의 힘을 모은 후 가두진출 이라는 재학생 들의 노선에 반대하는 각 대학의 복학생들이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가 두진출을 성공시켰다. 연세대를 주축으로 한 시내 각 대학의 수천명 학생들이 세종로 일대에서 1시간반동안 야간시위를 벌인것이다. 각 대학의 재학생지도부는 아연실색했다. 아직 나갈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서울대 비공개지도부는 이때 시민여론조사 라는 문 건을 만들고 있었다.여론조사를 빙자(?)한 시민홍보물을 전국 총학생 회 조직을 통해 4-5백만장 규모로 보급하고 나면 가두시위=혼란이라는 당시 언론의 선전에 사로잡혀 있는 여론의 방향을 어느 정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던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가두진출을 요구하 는 학생대중들의 열기는 드높았다. 가두진출=군개입이란 등식이 깨진 것이다. 더욱이 가장 필요한 것은 전 대학의 행동통일이었다. 이에 5 월 13일밤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는 이후부터의 가두진 출 을 결의하게 된다. 5월 14일에 이어 5월15일은 최대규모의 시위대(당시 언론도 10만 인파라 보도)가 서울역에 모여든 날이었다. 특히 고려대 시위대는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성북서에 들러 그곳에 잡혀있던 고려대생 안희대,신태식씨 구출담판을 진행했다. 이 두사람 은 긴급조치위반으로 투옥됐다가 80년 복학했는데 몇일 후 구속될 것 이 확실했던 것이다. 당시 성북서장실에 협상(?)대표로 들어갔던 박계 동씨(고대 정외과 72학번, 현 진보 정당을 위한 준비모임 대변인)는 성북서장에게 두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서울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위대가 성북서에 들를것 이라 공갈(?)을 쳤다. 실제로 15일 저녁 시 위대를 인솔하고 고대로 돌아오던 박계동씨는 성북서장에게 지금 간 다 는 전화를 3번 한 끝에 두사람을 구출하게 된다. 이윽고 수십만의 시위대가 서울역 광장에서 계엄철폐, 유신잔당 퇴진 을 외치고 있는 가운데 광장 중앙의 서울대 스쿨버스 안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5.15는 유인물조차 준비하지 못할 정 도로 급작스럽게 계획된 가두시위였다. 그러나 막상 집회시간이 되자 지도부의 예상을 엄청나게 뛰어넘는 인파가 서울역 광장에 모여든 것 이었다. 비공개지도부는 물론 총학생회장단도 난생 처음 경험하는 대 규모 대중집회였다. 계속 밀어부칠 것인가, 철야농성할 것인가,해산할 것인가. 기로에 서 있는 이들 앞에 심상찮은 제보는 계속 날아들었다. 계엄군이 인근 효창운동장에 진주했다는 것이다. 어둠은 점차 광장 에 깔리고 처참한 유혈사태에 대한 우려가 이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오늘은 해산한다 는 결정이 내려졌다. 인파틈에 섞여 있다 달려 온 신계륜씨(당시 고대 학생회장)가 해산에 반대하며 주먹다짐까지 했 으나 대세를 뒤엎을 수는 없었다. 비공개지도부도 인파틈에 묻혀 이 결정을 바라보고만 있을수 밖에 없었다. 현재 이 결정에 대한 대체적 인 평가들은 5.15회군이 5.17쿠데타를 불러 일으켰다 라는 것이다. 대중의 단결된 힘 앞에서는 군부도 꼬리를 감추게 된다. 최소한 열기 높은 철야농성이라도 하면서 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유혹에 찬물을 끼 얹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심재철씨는 80년 5.15 회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당시 저는 긴급조치하에서 형성된 사고 방식을 가지고 80년 봄이 라는 열린 상황에 대처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수년간 그때의 잘 못된 판단에 대한 괴로움으로 속만 태우로 있었습니다. 현재는 내가 과거에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 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작으 나마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5월 15일 밤 전국총학생회장단 회의가 고대에서 열렸다. 이때는 12 시 통금이 있을 때, 이때만 해도 심재철씨가 통금에 걸려 회의에 참석 하지 못하게 되자 당시 경찰서장이 경찰 백차를 내줘 이를 타고 고대 에 도착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후에 성북서장은 안희대,신태식씨 석방 건, 백차건으로 인해 파면조치 됐다. 당연히 5.17을 예상하지 못한 이 들은 전국적 봉기를 위한 전국적 학생조직의 결성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16일 밤 이대에서 속개돼 17일 아침까지 계속됐다. 전국 적 봉기일자를 놓고 서울측은 빨리 지방측은 조금 늦추자 는 논의 들이 오가고 있던 오후 3시경 경찰이 이대에 투입됐다. 5.17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경찰이 들어오자 회의장 밖에 있던 백여명의 보도진들이 이를 취재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 나갔는데 경찰은 이를 학생들이 저항 하려는 것으로 판단, 방독면을 착용하고 전투대형을 벌이는 등 부산을 떨었다. 이 틈에 학생회장들은 이대 뒷담을 넘어 도망쳤고 즉각 이 사 실을 각 학교에 알려 막상 5.17조치가 발표된 밤 12시에는 많은 학생 들이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합수부의 데모자금 배정 광주의 전남대에서도 5월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5월 14,15, 16일에 걸쳐 전남대생들의 가두시위가 전개됐다. 단지 서울과의 차이 라면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였다. 박관현 학생회장이 도경국장 과 담판한 결과 평화적 시위를 전제로 경찰이 시위를 막지 않은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14-16일에 걸친 가두시위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지 지도는 대단했다. 일반시민은 물론 교수,고교생들까지 집회,시위에 참 여했고 대학생 자녀를 둔 아주머니들조차 자식의 데모참여를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서울과 마찬가지로 광주에서도 5.16 회군이 있었다. 16일 도청앞 광장에서 화염병을 만들어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는 광주지 역 사회운동가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열기에 사태를 낙관한 전남대 지도부는 5월 17일의 휴식 을 결정한 것이다. 흔히 광주항쟁때 학생들은 달아나고 민중들은 싸웠다 고 말해진 다. 대체로 맞는 말이나 불충분한 말이기도 하다.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5.17 휴식 을 결정할 때 박관현 회장은 쿠데타가 일어나 면 10시에 교문앞에 집결할 것 을 선언했다. 과연 5.17이 일어난 다음 날인 5.18, 전남대 일반 학생들은 교문 앞에 모였다가 시내로 진출하 면서 열심히 싸웠다. 18-19일에 걸쳐 학생들은 광주천까지 가서 돌을 담아와 던졌고 맨 몸으로 돌진해 잠바를 벗어 페퍼포그의 화구를 틀어 막기까지 했다. 또한 전남대 학생운동의 선배 그룹인 복학생들은 화염병을 만들고 투사회보를 발간하면서 항쟁에 끝까지 참여했다. 녹두서점에 자주 모 이던 김상윤씨 그룹, 전대 문화팀을 지도하던 전영호씨 그리고 들불야 학을 중심으로 한 윤상원 열사 그룹이 바로 그들이었다. 항쟁이 일어나자 피신한 그룹은 바로 80년 봄 전남대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사람들이었다. 70년대 말 최루탄 구경도 해보지 못한 채 80 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합리적인 대중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광주항 쟁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전남대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정씨(전남대 79학번, 현재 연극평 론가)는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우리는 이건 데모도 아니고 우리가 나 설 계제가 아니다.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나와 운동을 하자는 정도의 인식 수준이었고 도망가는 것이 잘 하는 일인줄 알았다 고 말한다. 한편 이무렵 서울에서는 민주운동세력을 뿌리뽑기 위한 혹독한 수 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계륜씨는 이때를 자라면서 엄마한테 맞고 친구들한테 맞고 군대가서 맞은 것을 모두 합친 것의 10배는 맞은 시 기 라고 표현했다.이때 학생간부들은 김대중씨에게 데모자금 받았다고 인정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이때 수사(?)를 전담한 계엄사 합동 수사부 의 취조 방식중의 하나를 살펴보자. 우선 군인들이 복도에 2열로 마주 보고 늘어선다. 그다음 학생간부로 하여금 그 사이를 통과하게 한다. 통과하는 동안 무수한 주먹,워커발들이 날아온다. 복도끝까지 가서 돈받았나 해서 안 받았다 하면 뒤로 돌앗 앞으로 갓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때 경찰과 계엄사는 자금문제를 조작하기 위해 일대 소동을 벌였다. 5월 17일 학교에서 연행된 류시민씨의 경우를 보자. 우선 관 악서로 간 류시민씨는 수사관들과 실갱이를 벌였다. 너 돈 받았지. 안 받았어요. 임마 신문에 니가 김대중이한테 돈하고 볼펜하고 메달 받았다고 났는데 왜 거짓말 해. 무수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관악서의 구타는 견딜만 했던지 류시민 씨는 버텼다. 하도 버티니 형사들간에 그 놈이 돈 받았을까 안 받았 을까 하는 논쟁이 붙을 정도였다. 이 통에 궁금해진 관악서의 전경들 까지 류시민씨에게 돈 받았는지를 물어보러왔다. 어쨌든 그는 얼마 후 치안본부 특수2대로 이첩됐는데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관악서 형사가 쏘아붙였다. 임마 가서 돈 받았다고 하면 죽어. 치안본부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류시민씨는 마침내 항복을 하고 20만원 받았다 고 진술했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주고 받은 돈의 합계가 안 맞았던지 검사가 류시민씨의 20만원 을 공소장 에서 빼버렸다. 80년 2학기 개학 직후 학생운동권은 극도로 침체되어 있었다. 광주항쟁을 목격한 학생운동권에는 다시 데모를 하면 전두환 정권은 공수부대를 투입할 것 이란 공포감조차 떠돌았다.그러나 이것 도 몇일 뿐이었다. 9월 9일 경희대 김경양씨가 동맥을 끊고 투쟁 선언 문을 낭독한 것을 시발로 다시 데모는 시작됐다. 그런데 이 시기 시위 의 특징은 시위주동자의 대부분이 학생운동권 출신이라기보다는 80년 봄의 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을 지켜보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수 없어 저항을 결심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 계속 --,--`-<@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잠이 들고파.. Till the rivers flow up stream | Love is real \|||/ @@@ Till lovers cease to dream | Love is touch @|~j~|@ @^j^@ Till then, I'm yours, be mine | Love is free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