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6월02일(일) 04시53분11초 KDT 제 목(Title): 80년대 학생 운동 야사 #2 번호:115/174 등록자:KWITONG 등록일시:95/02/06 22:36 길이:117줄 제 목 : 80년대 학생운동야사(2) 80년대 학생운동 야사 두번째.. - 참세상에서 퍼온글입니다.. 영화 리벤저 와 전남대 방화사건 이 무렵 지방대학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지방 대학 중 가장 민주 화의 열기가 드높았고 후일 광주항쟁을 촉발시키게 되는 전남대의 상 황을 살펴보자. 10.26 사건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 지도부 모두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광주지부 보호실 안에 있었다. 이른바 전남대 상담지도관실 방 화사건 때문이었다. 상담지도관실이란 전남대 내에 있는 형사들의 집무실의 명칭이었 다. 79년 10월 17일 유신헌법공포일을 맞아 정권측의 경계심과 학생들 의 반발심이 함께 드높아져 가고 있을때 이 상담지도관실에 불이 난 것이다. 불을 지른 장본인은 고희숙씨(당시 영어교육3,현 전교조 해직 교사)였다. 그는 리벤저 라는 영화를 보다가 물에 적신 손수건을 유 리창에 붙이고 유리를 깨면 소리도 안 나고 잘 깨진다는 장면을 목격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어쨋든 중정 광주지부는 전남대 불순분자들을 발본색원하겠다고 학 생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였다. 여기서 한술 더 뜬 것이 당시 전남대 총장의 발언이었다. 그는 30분간에 걸친 교내 방송을 통한 담화에서 신성한 학원에서 폭력학생들은 일망타진됐다. 학생들은 안심하고 학 업에 열중하라고 전남대생들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슬 퍼렇던 중정도 김재규의 체포와 함께 풀이 죽기 시작 했다. 이에 따라 중정보호실에 있던 전남대 지도부 27명은 보호실 안 에서 상황평가를 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다가 얼마후 대부분 석 방되었다. 이들 보호실 팀에 의한 첫 시위가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대통 령 선거일인 11월 30일 시위였다. 몰려든 학생들만 수천명.경찰이 출 동해 최루탄을 쏘았는데 그때까지도 전남대생들 중 최루탄 구경을 해 본 사람이 드물었다. 몰려든 학생중에 전남대 깡패써클로 유명한 아 인 의 멤버 장호걸씨도 있었는데 경찰쪽에서 노란깡통이 휙 날아오자 그가 이를 손으로 탁 잡았다. 그 다음에 빚어진 상황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80년 4월 9일 전남대에서도 학생회가 출범하게 된다. 학생회장은 지난82년 옥사한 박관현 열사. 그는 79년까지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 학인 들불야학의 강학(배우면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했었다. 그는 학생회장으로 나서는 것이 노동자들을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다 가 80년 상황에서 학생회가 중요함을 깨닫고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선거유세때 양복은 윤상원 열사에게서 구두는 또 다른 사람에게서 빌어 신고 나설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전국 최고의 지지율로 당 선될 정도로 그는 전남대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4월말 전남대생들이 어용교수 퇴진 문제로 철야농성을 진행할 때도 그는 낮에는 수업 받고 밤에는 농성합시다 라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정도로 대중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용교수 퇴진 투쟁은 전남대생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었다. 학생들이 지목한 4명의 어용교수들은 그 무렵 구성된 전남대 교수평의 회조차 제명시킬것을 결의할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4명의 교수들은 퇴진 요구를 받자 일제히 전남대 병원 특실에 입원을 해버렸다. 게다가 교수평의회 대표로 찾아간 김 정수 교수(영문학)에게 몇개월만 지나봐라 며 공갈을 치기까지 했다. 이 에 기가 막힌 학생들은 그들을 반성할줄 모르는 반민주세력으로 규정, 전남대 본관 앞에 반민주,반민족 세력 여기 묻히다 라고 쓴 비를 묻 음으로써 상징적인 단죄를 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 80년 5월 2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학생회를 성토하는 1만 2천여 학생들로 가득찼다. 학생회가 학원의 병영화를 막기 위해서 그 간 거부해 온 문무대 입소에 응하기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대의 정원이 대학원생까지 포함해 1만 4천명이었던 것을 감 안하면 이날 집회에는 전 서울대생이 모인 셈이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문무대 입소 거부투쟁에 대해 정부측은 안보 의식 결여 라며 학생들을 몰아 붙였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여론도 불리 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울대 지도부로서는 기존 결정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학생대중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게 다가 복학생들로부터 시위 이슈를 입소거부 에서 계엄령 철폐 로 바 꾸어야 한다는 압력도 거셌다. 재학생 지도부들은 밤을 새우며 머리를 짰다. 마침내 궁리 끝에 희생타를 날리기로 했다. 5월 2일 들끓는 1만 2천여 학생앞에 대중연설가로서의 재능이 있는 박성연씨(정치4)가 나섰다. 그는 면도날같은 언변으로 학생회를 질타 했다. 학생대중의 울분은 그 질타속에 함빡 녹아들었다. 그 후 천재적 인 대중연설가로 정평이 나있는 김부겸씨(정치학과 76학번, 현 진보정 당을 위한 준비모임 부대변인)가 나섰다. 30여분에 걸친 감동적인 연 설을 통해 그는 1만 2천여 대중을 학생회 지지 유신잔당 타도 의 결 의로 몰고 갔다. 상황은 끝이었다. 이후 한주일간 전국의 각 대학들은 축제기간에 민주화 대행진 이 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강연,연극,탈춤 등 다양한 행사들이 엄청난 열기 속에 계속되었는데 이중 특히 연세대에서 공연된 노래극 공장의 불빛 이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이 공연에 한국 노동자들을 쥐어짜 는 일본인 사장 역을 맡은 공유상씨(경영학과 76학번, 복학생)는 횃불 을 들고 달려드는 분노한 관객들에 의해 소사할 뻔 하기도 했다. 원체 체구가 작고 마른데다 앞머리도 약간 벗겨진 그가 머리카락을 사무라이처럼 잡아 매고 기모노 입고 게다 신고 탈반 출신의 춤솜씨까 지 곁들여 마라데쓰 마라데쓰 웃기지 좀 마라데쓰 산 넘고노 물 건너 노 죠센땅이노 들어올 때 와다꾸시가 골이 비어 빈손으로 왔게데쓰까 라는 노래를 열창하다 불타죽을 뻔 한 것이다. 계엄상황에 대한 저항은 전국의 대학신문에서도 속속 나타났다. 80 년 3월 내한한 북한 전문가 서대숙 교수가 연세대에서 강연회를 했는 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북한의 주민은 남한의 주민보다 잘 삽니 까? 이에 대해 서대숙 교수는 북한 주민은 남한의 잘사는 사람보다는 못살고 남한의 못사는 사람보다는 잘산다 라고 답변했다. 연세춘추(연세대학 신문)는 이 강연회 초록을 5월 개교 기념일 특 집호에 실었는데 검열과정에서 미련한 계엄사 검열관이 질문은 놔두고 대답만 잘라버린 것이다. 당시 연세춘추 기자들은 기사가 잘려 허연 신문공백에 언론자유 보장하라 는 글자를 박아넣었다. 그 후 연세춘 추사에는 서 교수가 무엇이라 답변했느냐 는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80년 5월은 두가지 흐름이 병존하는 시대였다. 하나는 찬란히 피어 오르는 민주의 봄 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역관계상 이미 예정되 어 있었다 할 반동의 겨울 이었다. 당시의 학생운동 지도부도 가능 한 최대의 힘을 모아 유신잔당과 싸운다. 그러나 지는 싸움임은 분명 하다 라는 정세인식 속에 있었다. 자연히 그들은 흉흉하게 나도는 쿠 데타 설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5월 12일 저녁 무렵 학내 농성을 지도하고 있던 심재철 총학생회장 에게 스스로 기자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계엄군이 이동하 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 는 것이었다. 이어서 비슷한 시민제보가 잇따 랐다. 학내지도부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 농성을 풀고 학생들을 귀가시킨 후 자신들도 피신했다. 후일 이것은 서울 일원에서 계엄군이 교체했던 상황으로 밝혀졌는데 어쨌든 이날 밤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 았다. 다음날 등교한 서울대 지도부는 학교 대자보 판에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 라는 벽보가 붙어 있음을 발견했다. 대망신이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