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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6월02일(일) 04시50분42초 KDT
제 목(Title): 80년대 학생 운동 야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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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114/174  등록자:KWITONG  등록일시:95/02/06 22:35  길이:135줄
제 목 : 80년대 학생운동야사(1)

학생운동 야사 첫번째..

                - 참세상에서 퍼온글입니다..


옛날 말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글입니다.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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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지에 연재되었던 80년대 학생운동 야사입니다.
암울했던 80년대, 우리 선배들의 치열한  삶을 너무 흥미거리로 만드는 
것은 아니냐 하는 생각도 들수 있지만  이 글을 읽으며 그들의 열정을, 
그들의 뜨거운  조국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우리의  지금 모습을 
다시 한번  다질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용이 조금 길어서 여러편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10월 27일 새벽의 만세 소리  


   때는 1979년 10월 27일 새벽.  봉천동 비탈길의 한 자취방에서 갑작
스런 만세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함성의 주인공은 류시민씨(당시 서울
대 경제학과 2학년,현  이해찬 의원 보좌관)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독
재자 박정희의 죽음  앞에서 온 국민이 아연해하고 있을  때 이들 발랄
한 청년들은 만세부터 부르고 만것이었다.

   사실 10월 27일은 서울대 축제의  마지막날이었고 서울대의 전 학생
운동 조직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여성을 대동하여 27일의 쌍
쌍파티에 참석하라 는 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당시 학도호국단이 주도하는 축제가  대학문화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판단했었던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는 78년도에도  쌍쌍파티 교란작전
을 감행한 바 있었다. 즉 시위  때 주워놓은 최류탄 2개를 파티장에 터
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하나는 불발탄이었다. 류시민씨와 그
의 동료들은  올해에는 기필코  성공할 것을  다짐하면서  전쟁박물관 
(시위 떠 누운 최루탄,방독면 등을  보관해둔 자취방)에서 가져온 최루
탄들을 요리조리 두들겨보며  날을 새던 중 박정희씨의  피살소식에 접
했던 것이다.
   이 무렵 커다란 트렁크를 손에 들고  우울한 얼굴로 시내 모 호텔의 
문을 나서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최영선(당시 서울대 사
회3, 현  한겨레신문 기자). 밤새  호텔방에서 등사기로  박정희 타도 
를 호소하는 유인물을 밀어 가득 담아 나오던 그는 아침뉴스를 듣고
서  밤새 헛일했구나  싶었던  것이다.또한  앞으로 전개될 상황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그
는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의  최고 지도부 중의 한사람이었 것이다.
   한편 경찰서 유치장에도  10.26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해  10월 5
일경부터 영등포  경찰서 유치장에는  서울대 지하신문  제작,배포팀이 
붙잡혀 들어와  있었다.1학기 때부터 학내외에 불온(?)  유인물을 뿌려
온 이들이 일망타진(?)된 것은 이 해  추석에 감행한 영등포 경원 극장 
유인물 살포 사건때문이었다.
   이 극장에  들어간 조가 극장  유리창을 통해  유인물을 뿌리자마자 
캄캄한 극장에 일제히 불이 켜지고  일제히 비상벨이 울렸다.이윽고 경
찰은 관객들의 신분증을 조사 ,수상한  자들을 인근 영등포서로 연행했
는데 이때 끌려간 유인물 배포조  중 한 사람의 시위경력이 드러나면서 
주변수사를 통해 유인물팀 모두가 잡혀 왔던 것이다.
   사실 이 때  영등포서는 당시 수사중이던 남민전(남조선  민족 해방 
전선)의 잔류자들을 잡기 위해 비상경계망을  펴고 있다가 엉뚱한 수확
을 올린 것이라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들 팀의 일원이었던  한철희씨(당시 국문4,현 돌베게 출판
사 주간)는  10.26이 난 후   이놈들 박정희가 죽어  속이 시원하냐 는 
형사들의 질문에  아주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한철희씨 외에도 
이 유인물팀  중 윤승룡씨(당시 국문2, 현   한국일보  기자),조병래씨
(당시 사회2, 현  동아일보   기자),고세현씨(당시 국사4,현 창비사 편
집부장) 등이  현재 언론,출판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하신문 에서 
쌓은 기량을  지상신문 에서 발휘 하고 있는 셈이다. 
   10.26과 함께  선포된 계엄령으로  전국의 대학은  임시휴교에 들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첫  집회,시위가 11월 24일의 이른바  Y
WCA 위장결혼식  사건 이었다.제적학생 중심의  민주청년협의회가 통일
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저지하기 위해 일으킨  이 사건에
서 신랑역을 맡았던 홍성엽씨(연세대  사학과 73학번)는 아직까지 미혼
이다. 주변에서는  그때 장가를 한번 가서  못 가는 모양 이라 놀려 대
기도 한다.


류시민의 멱살잡은 이해찬


   79년 당시 서울대에는 11-12개의 학회  비공개 조직이 있었고 각 학
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77학번  협의체가 서울대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77학번  협의체내에서도 역할이  나뉘어져 있었다. 
즉 학기 중에 데모를 주동할 사람들과  4학년 말까지 학내에 남아 최후
까지 조직을 지도할  임무를 맡은 비공개 지도부가  있었고, 그 구성원
은 최영선,김명인(당시 영문4,현 도서출판  풀빛 상임 편집위원), 현무
한씨(당시 독문4, 현 웅진출판사 근무) 등이었다.
   한 달 간의 휴교기간 중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기로 한 비공개 지도
부의 방침에  따라 개학 후인 12월,  법대 1층 강의실에서  임시 3학년 
과회장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50여개 과 60여명의  과회장들이 참석했는데도 나서서 사
회를 보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회의는 위축된  분위기였다. 유신 하
에서 운동권 학생들은  공식적인 직위를 맡지않고 얼굴없는  인물로 활
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과회장들은  평범한(?) 학생들이었던 것
이다. 이때 학생회  부활을 열렬히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후일 학림의 
수괴(?)로 알려진  경제학과 과회장  박문식씨였다. 그의  열성에 의해 
회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박문식씨가 학생회  부활 추진 위원회 (이하 
학부추)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  결과에 당황한 것은  최영선씨를 비롯한  비공개 지도부였
다. 그 때만 해도 박문식씨는 학교밖에서  야학을 하고 있었을 뿐 학내 
비공개학회의 회원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인물 이었던 것이다.
   학부추는 방학기간 중 학생회 회칙을  만들어 갔다. 2차례의 공청회
를 거치면서 학부추가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다.  학생회장의 선출 방
법 때문이었다.  당시 학생대중의 수준상 직선제로서는  대권을 잡기가 
불안하다고 판단한 비공개지도부는 간선제  회칙을 만들었는데  체육관 
선거=독재 라는 생각에  젖어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류시민씨가 나서서  간선도 민주주의다 라는  연설을 하
고 조직동원된 사람들이  여기에 일제히 호응하여 회칙은  겨우 공청회
를 통과하게 된다.
   이러한 산고 끝에 3월 28일  서울대 총학생회가 출범했다. 총학생회
의 3역으로 총학생회장에 심재철(사범대 영어4,  현 MBC 기자),대 의원
회 의장에 류시민,  학생 활동 위원장에 이홍동(정치4,  현  한겨레 신
문  기자)씨가 선출됐다.
   4월경부터  이들 재학생그룹과  복학생그룹 사이에  가두진출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재학생지도부는  학내 집회,시위
를 일정 정도  진행한 후 학생들의 열기를 모아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
며 가두로  나가자는 의견이었던데  반해 복학생들은  시국의 급박함을 
지적하며 즉각적인 가두시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들 사이의 첫 충돌은 복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조직할 목적으로 개
최하려한  김지하  문학의 밤   포스터를 재학생들이  찢고 다님으로써 
시작됐다. 결국 이날  밤 재학생-복학생 간의 담판에서  가두진출은 모
두의 합의에 의하기로 약속됐다.
   그런데 4월 26일 집회에서 다시  충돌이 발생했다. 복학생들이 집회
가 끝나는 즉시 연단에 뛰어  올라와 학생들에게 가두진출을 선동(?)할 
계획임을 알아차린 재학생 지도부는  집회 순서가 끝나자마자 마이크의 
전원을 차단해버린  것이다.이에 화가 난 이해찬씨  (사회학과 72학번, 
현 국회의원)가 연단 위로 올라와  류시민 대의원회의장의 멱살을 잡았
다. 그때 류시민씨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뉘신지 모르오나 금번에  복학하신 선배님인 것 같은데  제가 명색
이 학생대표인데 이러실  수 있습니까?  물론 이해찬씨인줄  뻔히 알면
서 능청을 떤  것이었다. 88년 소설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던 류시민씨
는 광화문에서 우연히 만난 이해찬  의원에게 붙들려 현재 그의 보좌관
으로 있다.
   한편 이 무렵 서울대 총학생회 명의로  발표된  4.19 제 20 선언 은 
후세에 길이 남을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를 기초한 사람은 바로 
김명인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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