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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Monami (쿠키몬수타()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09시53분38초 KDT
제 목(Title): 이완용평전 (3)






2. 청일전쟁 이후의 행적

1894년 淸日戰爭에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

선을  완전한 자주독립구가로  확인한다는 조건으로  우리나라에서의 

청나라 宗主權을 포기하게 했고 요동과 대만을 청나라로부터 양도를 

받았으나, 삼국간섭으로 요동은  다시 반환하게 된다. 이  삼국간섭으

로 일본은 그 약점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당시 정부는 민씨정권은 排

日親露의 정책을 피게 된다. 마침 민씨 정권은 궁내부 特進官 沈相薰

의 告變으로  내무대신 박영효가  모반음모에 가담했다고 해서  친일 

내각이던 김홍집내각을 사임시키고 그 대신 朴定陽 내각을 성립시키

게 되는데 이때  구미파로 알려진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기용이  되

어 처음으로 정계에서 각광을 받게 된다.

상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乙未事變을 일으켜서 민씨  정권과 대립하던 대원군을 내세우고  제3

차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홍집 내각은 다시 타율적이고 급진

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양력을 채용하고 種痘規則을 발표하고 소

학교를 창설하고, 동시에  一世一元 원칙을 채택, 이듬해부터  우리나

라 연호를 建陽으로 칭하게 했다. 또한 군대를 개혁하고 중앙에는 親

衛隊, 지방에는 鎭衛隊를  두게 하고 斷髮令을 발표하였다. 이 때  이

완용은 학부대신을 사직하고  그의 형 允用과 함께 미공사관  서기관

으로 있던 알렌(安連)의 알선으로 미국 공사관으로 일시 피신하였다.

이 때 국내는 국모  피살로 말미암은 인심의 자극 등으로 인해서  의

병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완용은 친러  혹은 친미파로서 일본인의 

국모 시해사건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

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으면서 林最洙, 李道澈, 안경수,  李載純, 이범

진 등과 왕실의 近臣  및 일부 외국인까지 동원시켜서 친일 내각  타

도의 대책을 강구했고, 친일 정권에 포위되어 있던 고종을 대궐 밖으

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개조하여 혼란한 시국

을 수습할 것을 다짐했다.

이 계획은 그러나 안경수와  이진호 등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그런데 

이 椿生門 事件의 여파가 의외로 커졌다. 일본은 왕비의 시해에 대한 

형사상 책임을 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

을 '국왕 탈취 사건'이라고 하면서 크게 역선전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러시아 공사와  미국 선교사들도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틈을 타서 국모  피살에 관련된 모든 일본인을 이듬해 1월에  석방

하였다.

椿生門 事件에 실패한  이완용과 이범진 등은 철저한 친러파로  기울

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의  정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俄館播

遷을 시도한다. 一說에 의하면 춘생문 사건 후 러시아로 망명했던 이

범진이 다시 국내로 잠입해  들어와서 이완용, 이윤용 형제들과 손을 

잡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극비에 밀의를 하였으며 궁녀 김씨와 고

종이 가장 사랑하던 엄 상궁을 통해 대원군과 친일파, 일본인들이 합

세해서 고종을 폐립하려 한다는 말과 왕실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 공

사로 옮길 것을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완용 등 친러파는 먼저 춘

생문 사건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게 위하여 만약을 대비해서  전국의 

보부상들을 거사 전에 서울로  모이게 하였고, 고종과 태자를 러시아 

공관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이완용의 傳記인 {一堂紀事}를 쓴 김 명

수는 당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고 있다.

侯爵은 먼저  시국을 피하여 창졸간에  美館으로 갔는데 여기에서  잠시 

머무른 후 멀리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했다. 그러나 당분간 國勢를 관망

하면서 수개월 동안 지체하고 있었다. 하루는 돌연 露館으로부터 대군주 

폐하의 召命을 받아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의 伯氏와 함께  동행하여 그

곳으로 갔다. 그때 임금님을 모시고  있던 사람은 이범진 한 사람뿐이었

다.

이와 같은 기사는 친일파가 된 후의 이완용을 위해 아관파천의 전책

임을 이범진 한사람에게 모두 떠넘기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완

용은 외부 대신으로 취임하였고 동시에 학부대신 및 농상공부대신의 

署理까지 겸무해서 박정양을 중심으로 한 친러내각을 편성했다. 그리

고 그의  형이었던 이윤용은  군부대신과 警務使까지 겸하게  되면서 

거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정권을 잡은 이완용 등은 정치적 보복으로 우선 친일파의 영수인 김

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의 다섯 대신에  대한 捕殺令을 

내렸다. 그리고  이 때 흥분한  군중은 김홍집과 정병하를  살해했다. 

어윤중은 서울을  탈출해서 귀향하던  중에 난민에게 역시  살해되었

다. 유길준과 조희연,  장박 등은 일인의 보호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

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일본은 분개하였는데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일

본 공사 코무라(小村壽太郞)는 일본  신문을 통해서 "이 나라에는 통

치자가 없다"면서 신랄하게  공격하였고, 코무라는 또한 황제가 없는 

이 마당에 마땅히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황제를 삼아야 한다고

까지 공인한다. 이러한 일본의  반발은 이완용의 마음을 다시금 동요

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외부대신으로서의 공한을 일본 공

사에게 보냈다. "2월 11일  대군주 폐하께서는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

신 후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여 개화에 마음을 쓰고 계시며 일본과도 

친밀히 지내고 싶다는  취지의 詔勅이 계시었으니 이를 귀국  정부에 

전달해 주기 바란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는 것을 잊

지 않았다.

이후 러시아와 미국, 영국 불란서의 이권 다툼 속에서 그는 독립협회

의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여러 외국  세력의 지나친 간섭에 

대해 전국적으로  반항운동이 최고조가 달할  시기이기도 했다. 그해 

7월 그는 안경수, 김가진, 김종한, 권재형, 고영희, 민상호, 이채연, 이

상재 등의 官民有志들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하게 된다. 이완용은 

관료의 대표로서 동협회의 위원장,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898

년 전라도 관찰사로 전임될 때까지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으

며, 먼저 솔선 수범하여 100圓이라는 거액을 납부하는 등 독립협회의 

활동을 위한 모금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2월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할 때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이범진과는 관계가  악화되었다. 하지만  고종이 

다시  환궁하면서 이완용은  친러파에게도 친일파에게도  낙인찍혔기 

때문에 重用되지못하고 다시 광무  9년(1905) 9월에 다시 학부대신으

로 취임하기까지 주로 평안  관찰사, 전북관찰사 등 지방관으로 전전

하다가 광무 5년에 처음으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들어갔다. 그 4년 동

안 그는 시세의 추이를  관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립협회의 대정부 

투쟁 속에서 그는 또한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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