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Monami (쿠키몬수타()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09시52분49초 KDT 제 목(Title): 이완용평전(2) 1. 이완용의 출생과 가계 그리고 성장기 이완용의 字는 敬德, 號는 一堂이며, 본관은 牛峰(지금의 金川)이다. 이완용은 哲宗 9년(1851) 6월 7일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 서 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의 태몽에 관한 에피 소드가 알려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의 어머니 辛氏 가 産氣로 신음하던 중에 갑자기 아픔을 가시며 잠이 들어서 胎夢을 꾸게 된다. 말을 탄 수백 명의 병정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말들 의 머리는 모두 밖으로 향하고 있다. 그녀는 그 꿈을 깨고서 이완용 을 순산했다. 그러자 날씨가 흐려지면서 비바람이 섞여 치고 뇌성벽 력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후세에 상당히 각색된 것 으로 보이지만, 그에 대한 당시의 평가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 각한다. 이완용의 가계를 보면, 그의 가문은 22代祖인 고려 明宗 때의 公靖으 로부터 시작되는데, 公靖은 岑城府院君 三州泊으로 封해지고 벼슬이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에까지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어와 15代祖인 吉培(號 斗峰)는 太宗 때 都觀察使를 지냈으며, 景宗代에 翔은 吏曹 參判과 大司憲을 역임하였다. 曾祖父인 光裕, 晩成, 宰 등의 후예로서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고, 특히 그의 양모는 大阮君과 친구였으며, 庶 兄인 李允用은 大阮君의 서랑이어서 王家 및 權力과도 밀접한 위치 에 있었다. 이완용의 生家는 원래 가난하고 한미하였다. 그러나 본인이 영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적부터 이름이 알려진 까닭에 열 살 때 全羅 監司를 지낸 먼 친척(33寸)이며 서울에 있던 李鎬俊의 양자가 되었 다. 그는 어렸을 때 당시의 누구나가 그러했듯이 유학적인 공부를 하 였다. 그리고 양자가 된 후에는 학문적으로 더욱 성장하여 11세에 忠 北 全義郡의 선비 한 명을 독선생으로 해서 大學.論語를 이수하고 곧 孟子와 中庸까지 마쳤다. 고종 19년(1882) 增廣別試 문과에 합격 하고 奎章閣待敎로 임명되었다. 그후 弘文館修撰, 議政府檢詳, 海防營 軍司馬를 역임하고 고종 23년(1886) 육영공원에 입학하고 그 곳에서 영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닦았다. 이완용은 고종 24년 特派全權大使 朴定陽을 따라 참찬관으로서 도미 하였다. 이들 일행이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1887년 11월의 일 이었다. 박정양을 비롯한 이완용, 알렌 등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그들은 駐美公使館을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알렌을 내세워 對美交涉을 전개하였으나, 언어 장애, 借款문제, 公使의 밀수 문제, 우리나라의 재정 궁핍,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이해 부족, 현지에서의 청나라의 방해 등으로 말미암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또 한 이완용은 이듬해에 병으로 소환되어 승정원 동부승지, 이조참의, 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고종 25년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2월에 代理公使로 승진하여 약 2년간 주재하고 돌아와서부터 그는 親美派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에서의 생활 속에서 그는 조 선의 국제적인 위상에 위축감을 느끼고 자멸감과 함께 자신의 이익 을 위해 활동하는 데에 자기 일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 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시대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 성, 형조참판, 동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전환국총 판, 육영공원판리, 교환서총판 등을 역하였다. MM MMM OOO NN NN AAA MM MMM IIII Center of MMM MMMM OO OO NNNN NN AA AA MMM MMMM II Secret MM MMM MM OO OO NN NNNN AAAAAA MM MMM MM II Information MM MM OO OO NN NN AA AA MM MM II MM MM OOOO NN NN AA AA MM MM IIII Since 19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