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kim ( ) 날 짜 (Date): 2008년 1월 19일 토요일 오전 08시 30분 06초 제 목(Title): 펌)투르크인, 1909년의 조선땅을 밟다3/6 <부산> 부산은 해안을 끼고 이루어진 아름다운 무역항이다. 인공의 항구라기보다는 자연적인 입지조건에 의해 훌륭한 항만과 자그마한 마을이 형성된 도시였다. 주민의 대부분은 한국인이고 관리와 군인들은 일본인이었다. 부산 시내 전체를 통틀어 정부 귀빈을 위한 영빈관 이외에는 특별한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토착 한국인들의 거주지는 지저분하고 초라한 초가인데 볏짚이나 갈대로 지어졌다. 초가들은 주위 산을 중심으로 안쪽으로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흩어져 있었으며, 초라하고 남루한 사람들의 오막살이라는 표현이 적합할듯 싶었다. 두 시간 가량 부산 주위를 돌아다녔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있는 오막살이들-이것을 울루스라고 부른다. 일본에 비해 눈에 띄는 특색이 한국에 있다면 지나가다 아무 집에 무심코 들어가도 남자들만 있고 여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기슭에 자리잡은 몇몇 집에 들어가봐도 남자들만 있다는 점이 참으로 기이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집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여자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때 비로소 이해한것은 우리 이슬람 관습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여성들의 안채가 따로 있어 외부 인사나 외국인들이 안채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채로 향하는 대문도 따로 나 있었다. 여자들의 얼굴을 가리는 풍습도 똑같다. 이 점은 좀더 알아보고 나중에 자세히 서술하겠다. 그 날 저녁 부산을 떠나 서울(경성)으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부산 철도역이 다시 건설될 것이라고 했다. 철도 시설은 일본 철도나 러시아 철도와는 판이하게 달랐고, 군사 이동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철도 같았다. 객차는 추산컨데 꽉 차면 100명에서 120여명정도 탈 수 있을것 같았다. 이런 객차 형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이 없다. 모두 삼등석으로 일등석이나 이등석은 아예 없는데, 단지 일주일에 두 편씩 급행열차가 운행한다고 했다. 2시 30분에 기장(기잔)역에 도착했다. 기장에 도착해서 눈에 띄는 것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비록 자그만 마을이더라도 사람들이 활기차게 모여 웅성거리는 것이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정거장 관리에게 물었다. "서울까지 가는 표를 끊었는데 여기서 하룻밤을 묵어갈까 합니다." "예, 그러십시오. 선생님 표에 임시 체제 표시를 해드리지요. 그런데 마땅한 숙박지가 없을텐데요." "왜 그렇지요?" "집이야 있지만 호텔같은 숙박시설이 이곳에는 없습니다. 한국인 초가에 머문다면 얼마든지 방을 구할수 있지만 거긴 너무 남루해서요" "괜찮아요. 하룻밤 머무는데 아무데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제 짐들을 역에 맡기면 잘 보관해 주실수 있습니까?" "그건 염려 마십시오. 짐들을 들고 다니시가 불편하실 거에요." 짐을 맡은 역 관리가 말하기를 "돈 같은 것도 맡기셔도 됩니다. 여기가 더 안전합니다. 물론 별일이야 생기지 않겠지만 오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만취상태거든요. 오늘이 마을 명절인지라 보통 때보다 더 많이 술을 마십니다." 한국인들은 거의 매일 술을 즐기는구나. 오늘이 명절이라 더욱 과음하고 웅성거리게 소란스럽게 구는구나. 그래서 돈까지 맡기고 마을을 향해 출발했는데, 역 관리가 말하기를 " 저녁에 묵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일본인 거주지로 가십시오. 일본인 주택에서 더욱 편안히 하룻밤을 지내실수 있습니다. 초가에 머물면 여러가지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국인 초가에서 머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안채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안채에 외부인이 출입하면 명예와 가문의 손상으로 여기고,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구나. 한국말도 전혀 안통하는 판에 실수라도 해서 안채에 불쑥 들어가서 문제가 생기게 하면 안되겠구나.(역 관리가 덧붙히기를) "한국인들 대부분이 일본말을 조금씩 압니다. 그들은 외부인들로부터 여자를 감추고, 젊은 여자들은 외간 남자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은 특히 취기가 있기 때문에 골치아픈 문제가 생길수 있습니다." 기 장 마을 주위를 살펴보았다. 많은 동네 사람들이 마을 한구석에 모여 즐기고 있었다. 한 쪽에는 한국기가 펄럭이고 다른 한 쪽에는 일본기가 꽂혀 있었다. 둥그런 씨름판을 중심으로 동네 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쌓여있었고, 두 장사가 서로 맞붙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한국 씨름을 구경하게 되었다. 우리 '우랄 바쉬쿠르트' 족의 씨름 형태와 매우 비슷했다. 샅바를 차고 서로가 허리를 굽혀 상대방의 허리춤에 있는 샅바를 움켜쥐고 힘을 겨루다가 갑자기 상대방을 치켜들고는 땅바닥 어디에든지 내동댕이 친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을 꺾은 승자는 박수와 갈채속에 몇 마(碼)의 옷감이나 기타 등등을 상품으로 받아 간다. 우리가 구경꾼 틈에 끼어 두 시간 가량 흥미로운 씨름 구경을 했다. 완전히 우리네 씨름과 흡사했다. 한국 사람들의 희디 흰 복장들, 우리 타타르족이 입는 가젤 외투, 머리에 쓴 타타르인이 쓰는 것과 비슷한 털모자, 모든 것이 타타리스탄에 와 있는것 같았다. 원래 한국인들의 모자 형태는 타타르인들이 즐겨 쓰는 털모자였으나, 뒤에 와서 프랑크 모자 형태의 밀짚모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동네사람 두 사람을 데리고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안채에는 여성들도 보였다. 초가들을 하나씩 방문하였다. 한 군데도 깨끗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하룻밤을 일본 가옥에서 묵어야겠다고 생각했다.한국사람들은 관습과 외양에서 타타르인들과 유사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특히 여인들의 옷차림, 집 내부에 '새끼'라고 불리는 벽이 있는 점, 우유로 '다리순'을 빚는 점 등. 그러나 언어는 서로 연관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웃 마을에도 가 보았다. 마을마다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가는 곳마다 국민스포츠인 씨름판이 벌어지고, 가끔 내기를 하는 자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마다 술에 취해 있었다. 일본에서 수개월간 여러 곳을 돌아다녀봤지만 이곳 처럼 술에 취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벌판에서의 추수 장면도 타타르인들을 연상케 했다. 벼를 차례로 묶어놓고 두 사람 혹은 네 사람, 또는 여섯 사람씩 짝을 지어 볏단을 서로 묶어 길게 늘어놓는다. 그리고 돌아가며 도리깨질로 볏단을 두드리고 나락을 모은다. 타작 광경은 우리네와 비슷했다. 그날 저녁 기장 근처의 7~8 가구가 모여사는 조그만 한국인 마을에 하는 수 없이 머무르게 되었다. 돌아다니다가 너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하룻밤일망정 한국의 시골에서 생활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집주인으로부터 쉽게 허락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지내기가 편치는 않았다. 지저분한 집안, 굴뚝 연기의 매연, 게다가 술에 취한 주인 내외의 밤새 그칠줄 모르는 언쟁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꼬박 뜬 눈으로 새우고 다음날 새벽 날이 밝자 마자 집 밖으로 나왔다. 다음날도 기장에서 꽤 떨어진 외곽 마을까지 둘러본 다음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철도변을 따라 양 옆으로 목초지 들에는 논을 갈구어 물을 대고 벼를 심어 놓은것이 눈에 띄었다. 어디를 보든 가축떼가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일본 평야 지대에서 한 마리의 가축도 보지 못한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곳에서는 군데군데 가축떼들이 보이고 가끔은 20~30마리씩 떼를 지은 것도 있다. 말 소 양 등이 대부분이다. 멀리 숲들도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토지는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고 비옥한것 같았다. 그러나 국민 의식이 마비당하고 지배당해 가는 민족이라 이 모든 생명의 작품들도 생기가 없어 보인다. 생명력이 있다면 일부 일본인이 사는 지역뿐이다. 일본은 자기에게 할당된 비옥한 토지에서 일하며 별도의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가끔은 한국인 거주지에서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예외 없이 깨끗하게 우뚝 솟은 높은 집에 기와로 잘 꾸며진 집을 소유하고 있다. 한국 사람의 초가는 밀짚으로 엮고 덮여서 만들어졌고 가끔은 판자집도 눈에 띈다. 좀 깨끗하게 꾸민 동네가 있다 싶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몇몇 일본인 주택들이 있다.기차의 승객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차장이나 역의 관리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헤지라력 1327년 6월 1일(서력 1909년 6월 20일) 일요일 10시 정각에 서울에 도착했다. 정거장과 주변에는 전기 불빛으로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