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opin (** 쇼팽 **) 날 짜 (Date): 2007년 3월 7일 수요일 오후 01시 47분 11초 제 목(Title): [펌]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926년에 요(遼)에 의한 발해의 멸망은, 만주 역사에서 한국을 제외시켜버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한가지 이유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송나라 대신들 상당수가,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선비(鮮卑) 후예인 거란족의 요(遼) 홍원탁 (서울대 교수) 당 왕조의 쇠망 지중해, 북아프리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300-400년 사이와 800년을 전후해서 두 차례 가뭄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관개시설에 의존해 농사를 지어오던 지역들 중 많은 곳이 장기간의 가뭄 결과로 유기되었다. 당나라의 쇠락과 멸망은 8세기 중엽에 시작된다. 현종 (713-55) 치하의 당나라는 웅장한 위엄과 번영을 과시했지만, 당시 위구르의 카간들은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양의 비단과 공물들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소그드족과 돌궐족의 피를 반반씩 받은 안록산은 북서쪽 변방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756년에 스스로 대연(大燕)의 황제라 칭하였다. 아버지 현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숙종(肅宗, r.756-62)은, 반란군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위구르 돌궐족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땅과 백성은 명목상 나의 소유이지만, 옥과 은, 어린 사내와 여자 아이들은 위구르에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은 76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 당나라의 중앙권력은 회복될 수가 없었다. 당나라는 위구르의 군사적 지원 덕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Barfield(1989: 151)는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보다 야만적인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고 말한다. 당나라와 위구르는 흥망성쇠를 함께한 것이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야율(耶律) 부족의 지도자 아보기(阿保機)는 10개의 거란 부족들을 통합하여 연맹체를 만들고, 요서의 초원지대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요하 유역의 몇 개의 도시를 장악 함으로서 요 나라(916-1125)의 기초를 닦았다. 거란족 본거지의 핵심은 요서의 초원지대 특히 시라무렌 강 유역에 위치했었다. 거란족은 바로 이 장소에 상경(上京)과 중경(中京)을 세웠고, 요하(遼河)의 강 명칭을 취해 그들 왕조의 이름을 지었다. 아보기는 죽기 바로 전 해인 926년에 발해를 정복하였다. 중세 유럽인들이 북중국을 카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라는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다. 요 나라는 만주, 몽골, 그리고 북중국의 일부를 정복하여, 대동(大同)에는 서경(西京)을, 오늘날 북경이라고 부르는 전방 수비대 주둔 지역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했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遼)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 나라도 이원(二元)제도를 유지하여, 한편으로는 과거제도를 통해 문관을 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의 군사를 동원 해 군대의 중추를 구성하였다. 동원된 거란 부족들은 (영어의 "hord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오르도”라 부르는 단위 부대에 복무했다. 요나라는 실제로 이원제 국가이었다. 남부의 북경 주변 16개 현(송나라에는 300개의 현)에 살고 있는 3백만 명의 중국인들은 중국식 관료제로 다스리고, 북방에 사는 백만여 명의 거란족들은 전통적인 부족 법으로 다스렸다. 몽골 초원지대 혹은 만주로부터 온 정복자들은 이원제를 통해 자기들 자신의 중국화를 방지하려 했다. 그들 자신은 부족 전통을 계속 지키면서, 한족은 그들 고유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Ledyard (1983: 346)는 “926년 발해의 멸망은, 압록강 북쪽의 강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 발해의 멸망을 전환점으로 한국은 오늘날까지 만주 역사에서 제외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전연(前燕, 349-70)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요서와 요동 지역만을 점령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한 반면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통일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할 수 있었다. 당 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송(宋) 907년에 완전히 멸망하기 이전에도 당나라는 이미 반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당 멸망 이후 전개된 북 중국에서의 오대(五代, 907-60)와 중부와 남부 중국에서의 십국(十國, 902-79)의 상황은 한나라의 멸망 이후 전개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의 상황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특히 317년에 서진이 남쪽으로 달아나고, 439년에 탁발 북위(北魏)에 의해 북 중국이 통일되기 이전까지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북 중국에서는 대부분 비 한족 출신의 장군들이 계속 황제 자리를 차지 한데 반해, 남쪽은 한족 제후들이 분할 점거 하였다. Ledyard (1983: 323)는 “그러나 오호십육국 당시에는 온갖 명칭의 (선비족) 연(燕) 나라가 고구려와 힘의 균형을 이루며 대치했었지만, 오대십국 당시의 거란은 재빨리 (926년에) 동부 만주의 경쟁자 발해를 처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사이래 최초로 만주 대륙 전체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단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북 중국에서는 5개의 왕조가 빠른 속도로 교체되다가, 960년에 와서 후주(後周)의 금군(禁軍) 총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송 태조(960-76)의 선조들은 오랜 기간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 밑에서 장수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조광윤은 젊은 시절부터 승마와 궁술에 매우 능했다. 거란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거란은 북경과 대동을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을 바쳤다. 송나라의 인구는 약 8천만에 달했으나, 티벳으로부터 몽골의 초원지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북방 전 지역에는 대략 5백만 명 정도가 살았다. 963년 이후, 난폭한 군 지휘관들이 장악하던 송 나라 지방정부는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개봉(開封)에 수도를 둔 북송(960-1127)의 167년간은 중국 문화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중의 하나였다. 한반도 Ledyard(1983: 323)에 의하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려는 만주에 있는 북방 영토에 대해 자신이 적법한 소유권을 가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해를 정복한 거란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고려는 옛 발해의 압록강 이남의 땅만을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993년부터 1018년까지 지속된 고려와 요 사이의 일련의 전쟁들의 핵심 쟁점은 바로 이 영역 다툼이었다.” 1005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해 송과의 전투가 종료되자, 요는 1010년부터 10년 동안 고려(918-1392)와 전면전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010년에는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요 나라 군대가 고려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었다. 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거란군은 특별히 얻은 것도 없이 갑자기 철수하였다. 거란은 1018년에 다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으나, 고려의 강감찬 장군에 의해 귀주에서 거의 전멸되었다. 거란의 고려 침공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으나, 고려 조정은 1020년에 거란에게 더 이상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 이후 양국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요 나라에게 철저하게 굴욕을 당한 북송 (960-1127) 조정은 신생 고려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해, 고려와의 통상과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켰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개입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송나라 조정이 고려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Ledyard (1983: 347)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대부분의 송나라 대신들은 여전히,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후피를 대변자로 하는 다른 그룹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려가 만주 세력에 대항하는 믿을 수 있는 실질적 적대세력이며, 북방의 적들에 대항해 중국적인 문명을 수호하는 한반도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동파 등 주류의 견해가 대세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한족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와 금 나라는 ‘야만적’으로 보이겠지만, 요와 금의 외교와 정치제도는 근본적으로 중국 체제이었다. 그들은 왕조를 세워 자신들의 역법을 만들고, 사신을 교환하며 중국에서 유래한 의식과 전례(典禮) 절차를 따랐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2 (2005. 7. 30.) 정리: 강현사 박사 __ 쇼팽 http://brainew.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