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opin (** 쇼팽 **) 날 짜 (Date): 2007년 3월 6일 화요일 오후 01시 05분 19초 제 목(Title): [펌]예맥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광개토왕대왕 이후, 고구려는 250여년간 흑수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 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나타난다.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하여 200년 이상 만주 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게 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홍원탁 (서울대 교수) 5세기가 시작될 무렵,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2)은 백제 수도 한성을 (396년에) 포위공격하고, 요동을 정복한 후, 만주 동북쪽의 숙신(肅愼)마저 굴복시켰다. 광개토왕 생전에 이룩한 군사적 위업을 계기로, 고구려는 그 후 250여년간 흑수 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전쟁에 동원된 기록이 여섯 번 나타난다. 장수왕(長壽王, 413-491)이 만명의 말갈 병사들을 몸소 거느리고 468년에 신라의 주(州) 하나를 공격 해 빼앗았고; 문자명왕(文咨明王)이 507년에 고노(高老)장군과 말갈 병사들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영양왕(?陽王)이 598년에 직접 만명의 말갈 병사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고; 보장왕(寶藏王)은 645년에 안시성의 포위를 풀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함께 말갈 병사 15만명을 파견했다. 고구려군은 말갈군, 백제군과 함께 655년에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보장왕은 661년에 어느 장군에게 말갈 병사를 인솔하고 신라의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금사(金史)에는 15만명의 흑수말갈 병사들이 645년의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위해 당태종의 군대와 싸웠다고 적혀있고, 구당서(舊唐書) 역시 15만의 말갈군이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당태종이 사로잡은 말갈 병사 3,300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436년에,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北燕, 409-36)의 왕과 그 가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으며, 494년에는 숙신-말갈에 의해 쫓겨난 부여왕 일족을 받아들여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말한다. 위서(魏書)는,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서거했을 때, 위의 효문제(孝文帝)가 몸소 흰 두건에 베옷을 입고 대동(大同)의 동쪽 교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말한다. 수나라와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군에게 여러 차례 패한 곳은 바로 요하 유역과 산악 지형의 요동반도 이었다. 요동지역은 마침내 668년에 당나라의 지배아래 들어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관할하게 되었다. 당 조정은 요동의 옛 고구려인들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677년에)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에 귀양을 보냈다.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동무가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동무의 직계 후손들이 태수직위를 세습하면서 역사가들이 요동을 소고구려(小高句麗)라 부르게 되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땅에 발해(689-926)를 세웠다. 발해의 시조는 옛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大祚榮, 689-719)이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포로로 잡혀 영주(營州, 오늘날 朝陽)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거란족의 폭동이 발생하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 진(震)을 건국하고,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기록을 보면 대(大)씨족과 조영은 고구려 왕족 중 핵심 부족인 계루(桂樓)부에 속했거나, 아니면 고구려에 귀화한 말갈족이었던 것 같다. 732년에 발해의 무왕(大武藝, 719-737)은 바다건너로 군대를 보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오늘날의 봉래)를 공격하였다. 733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아래위로 동시에 공격했다. 통일신라와 발해 왕국의 출현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정복하겠다는 당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발해가 처음으로 야마토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던 것은 727년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옛 고구려 땅을 모두 회복하여 부여의 옛 풍속을 이어가고 있다며, 발해가 바로 옛 고구려임을 천명했다. 발해왕은 798년에 야마토 왕에게 국서를 보내, 발해가 고구려(또는 고씨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금사(金史)는,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과 흑수말갈족을 포함한 동부 만주의 모든 말갈부족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후에 거란족이 발해를 정복한 후, 요(遼)에 편입된 흑수 말갈족은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렀고, 요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흑수말갈족은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생여진족들은 이른바 백산-흑수 (장백산맥과 흑룡강 주변) 지역에서 살았다. 발해는 안록산의 난(755-7)을 틈타 요동을 점령하고 소고구려를 흡수하였다. 742년 당시의 당나라 지도는 요하 서쪽의 요서 연안이 당나라 영토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763년의 지도에는 당나라 국경이 만리장성 뒤로 물러갔음을 보여준다. Ledyard (1983: 341)는 “676년에 요동에 사령부를 설치했던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는 단지 80년간 그 명맥을 유지한 후, 756년에 철폐되었다”라고 구당서(39志19地理2)를 인용한다. 당나라는 717년에 평로군사(平盧軍使)를 영주에 설치하였고, 765년부터는 평로군사가 신라와 발해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발해가 요동반도 남쪽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해 남해부를 설치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요사(遼史)는 발해가 요동 지역의 신성(新城), 개모성(蓋牟城), 백암성(白巖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뿐만이 아니라, 요서 지역에도 여러 곳에 주(州)를 설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발해왕은 796년에 야마토 왕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들이 이제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으며, 발해왕의 권위가 요하의 서쪽에까지 떨치고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은, 발해의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이며,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를 포함한 6개의 주(州)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현주를 포함한 6주가 모두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과 서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신당서 지리지(地理誌)는, 안록산의 난(755-7)이 발생하기 이전인 건국초기의 발해 강역을 기술하면서, “현주”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 하나가 장백산맥 깊숙이 위치해 있다고 기록을 했다. 이 신당서 기록을 근거로, 현대 중국, 일본 역사가들은 발해의 “현덕부” 전체가 장백산맥 일대에 위치했었다고 단정을 하고, 당이 멸망하는 907년까지, 당나라 강역이 요동 전체를 포함하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요사는 몽골 원나라 말기인 1343-4년 기간 중, 11개월 이라는 단기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들도 많이 발견된다. 금사(金史) 역시 원 조정이 1343년 4월부터 20개월 만에 편찬을 완료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당서는,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는 북송(北宋) 조정이 1044년부터 1060년까지 17년이라는 세월을 투입 해, 중화사상 이념을 바탕으로, 아주 치밀하게 편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동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이 덜 왜곡된 역사 기록인지 자명할 것이다. 거의 500여년간 지속된 고구려-말갈족의 연합국가는 직접적 상호작용과 언어적 동화 과정을 통해, 양측 언어에 어휘적-구문적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여-고구려-신라어에서 유래하는 한국어와 숙신-말갈-여진어에서 유래하는 만주어는 모두 모음회전과 조직적인 모음전이 현상이 나타나, 모음 역할의 성격이 재구성되었고, 모음조화에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후, 중부만주의 예맥-퉁구스는 서부만주의 선비족과 동부만주의 말갈족에게 밀려, 오래 전에 한반도로 내려와 쌀 재배를 하며 살아 온 예맥 친족들과 합쳐야 할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해 만주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200년 이상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와는 달리, 말갈-여진족이 주도적 역할을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발해왕국의 말갈-여진족 지배층이라는 존재도 대부분 한때에는 고구려의 구성원이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Henthorn (1971: 54)이 “발해는 고구려가 용접을 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맥-말갈 연합의 전반부는 분명히 예맥-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후반부는 말갈-여진 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을 수도 있다. 급기야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예맥-퉁구스의 역사는 바이킹 왕국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덴마크 사람들이 지배하던 바이킹 제국(1397-1523)은 스웨디쉬 바이킹의 반란으로 해체되었고, 대니쉬 바이킹은 1658년에 스웨덴 남부의 룬트(Lund)지역 마저 상실했다. 1814년에는 스웨디쉬 바이킹이 주도하는 스칸디나비아가 등장 하여, 스웨덴 왕이 군림하는 스웨도-노르웨이 연합왕국의 형태로 1905년까지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대니쉬 바이킹의 존재는 유틀란트 반도와 2개의 섬에 한정되게 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3 (2005. 3. 19.) 정리: 강현사 박사 __ 쇼팽 http://brainew.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