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opin (** 쇼팽 **)
날 짜 (Date): 2007년 3월  6일 화요일 오후 12시 55분 00초
제 목(Title): [펌]고대의 연(燕)과 예맥 조선(濊貊朝鮮) 


고대의 연(燕)과 예맥 조선(濊貊朝鮮) 

연 나라를 통한 철기문화의 전파



                                                              홍원탁 
(서울대 교수)

만주의 원시 선비-퉁구스 종족: 선비계, 예맥계, 말갈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바이칼호 주변에 정착했던 원시 투르코-몽골족의 일부가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만주 땅에 들어와 원시 선비-퉁구스가 되었고, 또 그들 
중 일부는 좀더 따뜻하고 습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한반도는 만주의 중심부가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형상으로, 동쪽으로는 높은 산맥들이 줄이어 서있고 서쪽으로는 평야들이 
이어져 있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만주 권역(圈域)은, 유사한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며 
밀접한 역사를 함께한 “선비-퉁구스”계통 종족들의 민족사학적 범주로서, 
동아시아 역사체계 안에서 3대 핵심 권역의 하나를 구성해 왔다.  원시 알타이 
계통 언어들을 사용하는 선비-퉁구스 역사공동체는 신석기 홍산문화와, 고인돌, 
비파형-세형 동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한반도는 
민족사학적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실제 지정학적 현실로도 만주대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부 만주의 요서(遼西) 초원지대는, 선비와 그 후예인 거란족을 포함하는 소위 
옛 동호(東胡)의 본고장이다. 흔히 “목초지대의 늑대들”로 불리는 이들 
선비계(鮮卑系) 집단은 몽골고원 유목민과 유사한 생활을 하였다. 소흥안령 
산맥으로부터 장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는, 숙신-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의 핵심이 되는 말갈-여진 퉁구스의 본향이다. 흔히 
“삼림의 호랑이”로 불리는 이들 말갈계(靺鞨系) 집단은 사냥과 채집에 크게 
의존하면서 작은 밭 조각들을 모아 농사를 지었다.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佳江)-압록강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이다. 이들은 주로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면서, 
강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여 단백질을 보충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에 
의하면 요동의 신락(新樂)유적지에서 발견된 수수는 기원전 5000년 경의 
것이다.  한반도 남부는 쌀 농사를 짓는 예맥계 분파 집단의 본고장이었으며, 
이들은 중국의 사서에서 총괄적으로 진(辰), 한(韓), 혹은 삼한으로 불렸던 
원시 정치적 실체를 구성했다. 영어로 “Korea Proper”라는 표현은 
중부만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을 지칭하는 민족사학적 
범주로서의 한국을 의미한다. 소위 만주유역(Manchurian Basin)과 한반도를 
합친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홍산문화의 후예: 빗살-민무늬 토기, 비파형-세형 동검, 고인돌 등의 전통

중부만주-한반도 지역에서의 빗살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다.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 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형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Barnes(1993: 109)는 말한다. 후기 신석기를 
상징하는 새로운 형식의 민 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경에 중부만주-한반도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요녕성과 흑룡강성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기타 만주지역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민 무늬토기와 유사하다.  신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만주유역과 한반도 사이의 유사성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도 민 무늬토기, 고인돌, 청동검 등의 형태로 지속된다.  
고인돌은 예맥 지배층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며, 만주유역과 한반도의 
“동이”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인돌 축조 관행은 기원전 300년경에 
사라졌다.  

만주 유역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된다.  Barnes(1993: 162)는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 
그 자체는 만주 유역으로부터 요녕식 (비파형) 동검이 진입 해 오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요녕식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 Nelson(1993: 133)은 “요녕식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청동으로 단검, 화살촉, 
거울(銅鏡), 낚시 고리, 도끼 등을 만들던 거푸집과 종, (동물형상) 혁대고리, 
단추, 마구류(馬具類), 마차의 장식품 등 기타 청동제품들이 한반도 전역의 민 
무늬토기 유적지에서 출토된다.  한반도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동검과 동경의 
유래는 하가점 상층 문화(1100-300 BC)로 추적된다. 

한반도 서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쌀은 기원전 2400-2100년경의 것으로 
측정된다.  중국 남부에서 쌀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황해를 건너 한반도의 
남부에서 생태학적으로 비슷한 틈새를 발견하고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름철에 북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을 타면, 양자강 하구로부터 한반도의 
남서부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연(燕) 나라와 연 장성(長城)의 성격

사기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r.1049-43)이 자신의 이복 동생인 소공을 (북)연의 
통치자로 봉했고, 또 기자를 연나라 이웃인 조선의 통치자로 봉했다. 사마천은 
붓으로 몇 글자 적어, 고대 한족 왕실 종친들을 전통적으로 동호와 
예맥-퉁구스의 영역으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시조로 만든 것이다. 
사기에는 성왕(成王, 1042-36 BC) 때, 소공이 섬서(陝과 그 서쪽, 혹은 섬의 
서쪽)를 다스리고, 주공이 그 동쪽을 다스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기는 또, 
소공에게 봉해주었다는 북연(燕) 말고 남연 이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전국시대에 편찬된 관자(管子)를 보면, 제(齊)의 환공(桓公 685-43 BC)에 대한 
기록에서 조선이 등장하며, 전한(前漢)때 쓰여진 사마천(145-90 BC)의 사기에는 
연 나라에 대한 기록 속에 부여와 고조선이 함께 나타난다. 후한서(後漢書)는 
예(濊), 옥저(沃沮), 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말한다.  

주(周, 1122 혹은 1027-256 BC) 조정이 쇠망의 길로 접어들어 기원전 
403년경부터는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위략(魏略, 東夷傳 三韓전에 인용)에 
의하면, 주 왕실이 쇠약해지자 연의 지배자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자 기자의 후손인 조선의 지배자도 스스로 왕이라 칭했고, 이들 두 
나라는 서로 전쟁 직전까지 갔다. 결국 기원전 300년경에 조선과 연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연은 진개(秦開, BC 311-297년에 활약)를 시켜 조선을 
공격했다.  

사기 흉노전을 보면 진개라는 이름의 장수가 동호에 인질로 잡혀가 있을 때 
동호족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으나, 연나라로 돌아온 후, 동호를 급습하여 
1천리 밖으로 쫓아냈다 한다. 사기는 이어, 당시 연이 영토를 크게 넓혀 
오늘날의 난하(?河) 주변에 요서와 요동군을 포함하여 5개의 군을 설치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말한다. 

사기에 의하면 처음에 연나라가 쌓고, 후에 진나라가 다시 쌓은 장성이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하지만 12세기에 제작된 지리도를 보면 오늘날의 
난하를 옛날에는 요수(遼水)라 불렀고, 오늘날의 요하는 소요수라 불렀다. 
따라서 사기의 요동은 난하의 동쪽을 의미했었을 것이다.  즉, 연이 설치했다는 
요동군과 요서군은 오늘날의 난하 좌우에 위치했고, 상곡, 어양, 우북평 군들은 
오늘날의 하북성에 위치했을 것이다.

Karachin Banner로부터 Fu-xin에 이르기까지, 흙벽돌과 돌로 만든 방벽, 초소, 
크고 작은 요새, 봉화대, 협곡을 가로막는 돌담, 웅덩이 등으로 구성된,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 형태의 유적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연 장성”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별로 남아있는 
유적도 없는 동과 서로 “연 장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하며 장성의 
위치를 멋대로 그려댄다. 이제 Di Cosmo (2002: 148-50, 157)가 요약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그 자신의 해석을 빼고) 소개한다. 

소위 “연 장성”을 따라가며, 높은 지대에 돌로 지어진 몇 개의 요새와 원형 
거주지 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이 하가점 상층문화 유물들을 발견했다. 이 
요새화된 방어선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모두 한족 문화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고고학자들은 그곳 거주자가 동호족이었다고 믿는다. 적봉 부근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모두 하가점 상층과 오르도스 청동문화에 속한다.  이들 주변 
전 지역의 거주자들은 모두 한족이 아니라 유목민들 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위 
장성(長城)이라는 존재는, 유목민과 농민을 분리시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 자체를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킬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장벽들은 대부분 비(非)농경지역을 방위하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외계인들이 전통적으로 거주하던 지역 속에, 새삼스럽게 살게 
된 한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 장벽들이 만들어 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아직도 그 장벽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실제로 보호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과 유사한 이 유적들을 
보고 (기원전 299년 이전에 축조된) “연 장성”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순전히 
사기에 기록된 “장성”이란 두 글자뿐이다.

동이전의 예전(濊傳)을 보면, 진나라 말기에 전국이 반란에 의해 혼란에 빠졌을 
때(209 BC), 중국 동북부의 제, 조, 연 나라 사람들 수 만 명이 조선 땅으로 
피난을 했는데,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은” 위만이라는 연나라 
사람(206-195 BC)도 왔다고 말한다. 위만은 서쪽 변경에서 피난민들을 관장하는 
업무를 위임 받고 있었는데 마침내는 조선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말한다. 
동이전의 한전(韓傳)은, 위만에 의해 쫓겨난 조선왕이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 
지역에 정착 해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고 말한다.  

사기에 의하면, 옛 연나라는 7패(七覇) 중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는데, 
소왕(昭王, 311-279 BC) 때에 와서 동북방향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소위 연나라의 무력이 최고에 달했다는 바로 
이시기에, 소왕은 연 조정을 옛 수도 계성(?城)의 “남서”쪽에 위치한 [즉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동북방향과는 정반대 쪽인] 이현(易縣) 부근의 
무양(武陽)으로 옮겼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온갖 의구심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예컨대, (1) 사기에서 말하는 (北)연의 영토가 과연 오늘날의 하북성 이외 
지역으로 확대된 적이 있었나? (2) 소위 연 장성이란 존재가 한족 연나라와 
정말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 (3) 사기에서 말하는 연 장성이라는 것이 진 
시황제가 후에 축조한 만리장성과 똑 같은 장소에 위치해, 시황제가 장성을 
쉽게 축조할 수 있게 해준 기반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닌가? (4) 한족 (北)연과 
함께 동호족의 (南)연이 존재하지 안았을까? (5) 기원전 311년 진개의 정복활동 
이전에 난하 주변의 요서 지역을 과연 누가 점거하고 있었는가? (6) 진개의 
정복활동 이후에 오늘날의 요녕성 대능하 주변의 지역을 누가 점거 했나? (7) 
기원전 206-195년 기간 중에 등장하는 위만이라는 이름의 연나라 사람이 어째서 
상투를 틀고 동호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가?  

선비-동호족과 예맥-퉁구스족

중국에서는 두드려서 만든 저탄소 연철과, 주조된 고탄소 철이 모두 기원전 
500년경부터 사용되었고, 중급의 탄소를 함유한 강철도 기원전 300년경 
이후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철기문화는 철제 무기, 말 장식품, 말 
재갈, 차축의 마개, 괭이, 보습, 낫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기원전 400년경에 
옛 연나라를 통해 이들 철기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만주평원과 한반도에서 철제 도구와 함께 발견되는 유물들을 보면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칼날이 칼자루와 분리되어 주조된) 세형 동검과 
스키토-사이베리안 양식의 짐승 모양을 한 혁대고리가 있다.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선과 옛 연나라 사이의 충돌 기록은, 
몽골 유목민적인 선비-동호족과 중부만주-한반도의 예맥-퉁구스족 간에 매우 
친밀한 관계, 즉 사이가 좋다는 이웃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싸우는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Barnes(1993: 152)는, 
연나라가 비록 주나라 말기 전국 7웅(雄)들 중에서 가장 약하였지만, 발굴된 
여러 개의 철 제조 유적을 보고 알 수 있듯이, 당시 가장 강했던 진(秦) 
나라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철제품들을 생산했고, 동아시아 최초의 철 
갑옷 또한 연나라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연나라가 기원전 
400년경에 한반도의 철기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국본토에 
철기문화가 시작 된지 100년도 안되어 한반도에 철이 전파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은 전한(前漢) 조정이 한강 이남에 위치한 진(辰, 후에 
三韓) 나라 땅의 조그만 성읍국가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배영역과 세력이 커 있었다.  기원전 109년에 고조선의 왕은 (난하 동쪽의) 
요동을 공격하여 한나라의 관료를 살해하였다. 당시, 고조선이 흉노와 동맹을 
맺을 까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던 한 무제(漢武帝, BC 141-87)는 그 해 가을에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일년 가까운 전투 끝에 고조선의 왕은 108년에 
살해되었고, 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하여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그로부터 30년이 못되어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지거나, 다른 위치로 멀리 밀려났다. 313년경, 한족들은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과 (204-220년 기간 중에) 공손씨가 설치한 대방군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기원전 108년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족이 처음으로 요하 하류와 한반도의 
서북부 연안에 진출한, 역사적 전환점이 된다. 316년에 서진(西晋)이 망한 후, 
요하 유역에 고립되어 있던 한족들은, 시세 변화에 따라, 선비족 혹은 퉁구스 
족에 붙어 협력을 했다. 한족에 의한 요동의 지배는 352년이 지난 668-755년 
기간 중에 당나라에 의해 재현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요동 땅은 
선비-거란과 예맥-여진 퉁구스족의 각축장 이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1 (2005. 3. 5.)
정리: 강현사 박사




__
    쇼팽                                           
    http://brainew.co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