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snuiwa (큰바우얼굴() 날 짜 (Date): 1996년05월12일(일) 12시33분53초 KDT 제 목(Title): 북한 역사학의 흐름 (3) 2. 분단 시대의 북한의 歷史學 (1)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북한의 역사학 6.25 전후해서 월북한 남한 출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주도 되었는데, 노동당과 수령의 정책 노선에 따라 연구 주제와 연구 방향이 결정되어 그 제약이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을 비롯한 한국학 전반 과 자연 과학이 국가 사업으로 집중 육성되기 시작한 것은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난 이 1950년대 이후부터이다. 북한은 1952년에 백남운을 원장 으로 하여 '과학원'을 설치하고, 여기에 역사.철학.경제.고고 민속.법학.언 어.문학.교육.고전 등 9개 연구소와 자연 과학 연구소를 두어 대규모적이 고 조직적인 협동 연구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각 연구소는 기관지 로서 <력사제문제>, <력사과학>(격월간→계간), <문화유산>, <고고미술>, <조선고고연구> 등의 학술지를 간행하고, 주요 연구 과제는 공동 연구 형 식으로 그 연구를 수행했다. 또한 수시로 토론회를 통해서 이견을 조정하 고 정설을 확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 육성은 학문의 자율적 발달을 국가가 후원한다는 의미에서보다는 사회주의 혁명과 김일 성의 권력 강화를 위한 이른바 '사상 사업'의 일환으로서의 의의를 가지 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결론은 이미 당과 수령이 먼저 내리 고, 그것을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추인.해설.선전하는 기 능을 가졌다. 이러한 당과 수령이 구체적으로 요구했던 바는 바로 '주체 확립'과 '黨 性의 원칙'이다. 여기서 '주체'라고 하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원리를 우리 현실에 적합하게 창조적으로 적용(1952)하라는 것과,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1955)하라는 것과,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 와 형식주의를 퇴치'(1955)하라는 것이며, '당성의 원칙'이란 조선 노동당 의 노선과 정책을 연구.해설.선전하라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1920∼1930 년대의 민족 운동사 이해에 있어서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을 정통으로 간 주하고 그 밖의 사회주의 운동을 종파주의 혹은 교조주의로 비판함을 의 미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으로서의 '주체'는 결국 조선 노동당과 수령의 혁명 투쟁을 유일한 정통 노선으로 정당화하는 것 을 의미한다. 실제로 1954년부터 북한은 노동당 역사를 고급 학교들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당 중앙 위원회 직속으로 '노동당 역사 연구소'를 따로 설치하여 노동당의 혁명 전통을 연구.편찬하기 시작하였 으며, 현대사 연구는 과학원보다는 노동당이 주도하는 형세가 되었다. 조선 노동당의 위상을 미화하는 사업과 병행하여 김일성은 노동당 제3 차 대회(1956. 4)에서 역사학도들에게 '역사 문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방법으로 옳게 또 급속히 해결'할 것을 지시했으며, 당 중앙 위원회 전원 회의(1955. 4)에서는 '우리 나라는 사회 발전의 각 계단에 있어서의 경제 형태들과 각 계급들의 사회 경제적 처지 및 그들의 호산 관계를 과학적 으로 분석'할 것을 지시했다. 북한의 과학원 역사 연구소는 이와 같은 당과 수령의 연구 지침에 따 라 1957년을 기점으로 '과학 발전 10개년 전망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1959년에 완료된 이 계획의 중심적 연구 과제는 다음과 같다. 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연구 [현대사] ② 조선 인민의 혁명 전통 및 애국 전통에 관한 연구 [계급 투쟁사 및 대외 항쟁사] ③ 우리 나라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에 관한 연구 [시대 구분] ④ 민족 문화에 관한 연구 [고전 복각 및 번역] 이러한 과제는 그전에도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로 연구에 박차 가 가해지게 되었고, 그 연구 결과가 1960년대 전반기까지 많은 논저의 출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면서 북한의 역사학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는데, "당 의 노선과 정책을 마르크스-레닌주의적으로 깊이 연구하고 해설.선전하지 않으면 안 되고, 당의 혁명과 민족 문화 유산을 전면적으로 연구하지 않 으면 안된다"는 수령의 교시에 따라, 대외 항쟁서.계급 투쟁사.고대 한일 관계사.고조선사.고구려사.발해사, 그리고 한국사 시대 구분에 관한 연구 등이 수행되었다. 그리고 개별적 연구를 종합 정리한 통사로서 <조선통 사> 상(1956.1962.1977.1987)과 <조선문화사> 상(1963) 등이 출간되고, 문 학에서의 <조선문학통사>(1959), 철학에서의 <조선철학사> 상(1961) 등이 출간과 아울러 국학의 여러 분야에서 일단계에서의 통사적 정리가 마무 리되었다. 1960년대 연구성과는 유물 사관의 도식에 꿰어 맞춘 한계를 보이고 있 기는 하지만 실증 성이 돋보이고 학술적 가치가 큰 연구도 적지 않았다. 아직은 정치적인 간섭을 그나마 덜 받고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석 형의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1957)과 <초기 조일관계연 구>(1966), 박시형의 <조선토지제도사> 상, 중 (1960, 1961), 리지린의 <고 조선연구>(1963), 림건상의 <조선의 부곡제에 관한 연구>(1963), 허종호의 <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연구>(1966) 등의 예가 그것이다. 1960년대 연구 업적 가운데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은 김석형의 <초 기 조일관계 연구>인데, 이 저서는 일제 시대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제기 했던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일본 식민주의 역사가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시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 밖의 대외 항 쟁사나 농민 투쟁사의 연구는 국제 친선이나 계급 협동의 측면을 지나치 게 무시해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한 점이 많다. 특히 북한 역사학에서 가 장 역사의 진실을 곡해하고 있는 것은 일제 시대와 현대사 분야로서 김 일성의 빨치산 투쟁만을 중심에 놓고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사.중세사 연구와 그와 관련 한 시대 구분 문제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만큼 학자간의 견해 차이와 상 호 토론도 활발했다. 고대사의 분야에서 고조선과 삼한의 역사가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가설 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에서 국가 형성 시기와 강역, 그리고 사회 성격이 해석되었으며, 삼국 시대는 주로 노예제 사회인가 봉건 사회인가 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합의는 이끌지 못했다. 그러나 1962년 판 <조선통사>에서 서기 3세기 이후부터 봉건제 사회로 보는 김석형의 설을 채택하여 통설화하였다. 근세사의 시작과 종점에 관한 문제는 '사회 구성체설'과 '계급 투쟁설' 의 두 시각이 맞서 오랜 논쟁이 있었지만, 역시 명쾌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에 1962년에 이르러, 근 세사의 시발을 1866년(병인양요)으로, 근세사의 종점을 1945년으로 설정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졌다. 일제 시대의 성격의 이해에 대해서는 문제의 성격상 북한의 혁명 노선 의 방향을 결정하는 직접적 관건이 되는 까닭에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 짐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학계에서 '과도기 유형 논쟁'으로 잠시 논의 되다가 흐지부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김일성이 일제 시대부터 '식민지 반 봉건 사회'로 규정하고, 해방 후의 역사적 과제를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으로 누누이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 규정을 부정하는 토론의 전개 는 실제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 W-A-N-T-E-D **** May God be always with me............. _ |\ |\ /| _ 이제 전설이 실현될 시간이다......... | | /| | | | 큰인물, 큰사랑을 위하여......... (^.^) (@_*) (^_~) 큰바우얼굴.co. & snuiwa.co. >@< >~< -o- Since 19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