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snuiwa (큰바우얼굴() 날 짜 (Date): 1996년05월12일(일) 12시33분09초 KDT 제 목(Title): 북한 역사학의 흐름 (2) 1. 해방 전후 시기 한국에서의 역사학 여기서 상정하는 시기는 1945년 8.15에서 1950년의 6.25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비록 직접적으로 북한 자체의 역사학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먼저 배경으로 이 시기의 역사학의 모습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내에는 미국과 소련의 간섭과 더불어 좌우 갈등의 계급 문제 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역사학은 이러한 문제점을 타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이같은 시대적 요청 속에 1930년대 이후로 성숙되어 온 민족주의 사학, 마르크스주의 사학, 그리고 문헌 고증 사학 이 서로가 보완하며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시기였다. 이들에 대해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신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대표적인 사 람은 안재홍.손진태인데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신민족주의에서 계급 문제 를 다루는 시각에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민족은 영원하며, 계급의 생명은 짧다."라는 말에서 보여 주듯, 계급보다는 민족을 우위에 두고 있 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민족주의는 민족주의를 일탈한 것이 아니 지만, 민족주의가 지닌 부르주아적 편향의 한계성을 지양하고 민족주의의 도덕성을 제고시켰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발달 과정의 정점으로 볼 수 있 다. 문헌 고증 사학자들은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주로 대학 강단을 중심으로 하여 강단 사학의 기초를 다져 갔다. 우리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부터이며 李北滿과 白南雲이 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이후로 시대사 혹은 통사적 체계화를 시도한 논저들이 나타나 마르크스주의 역 사학의 토대가 마련되고, 민족주의 역사학이나 문헌 고증 사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뚜렷한 학파를 형성했다. 일제 시대의 마르크스주의 역사 학은 계급 혁명을 통한 민족 해방의 달성을 실천 목표로 하였으나, 구체 적인 역사 해석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이론을 빌어다 고대사와 중세사를 이해하고, 현대사는 코민테른(1928)에서 규정한 '식민 지 반봉건 사회론'을 빌어서 해석하였으며, 민족 해방을 위한 전술 이론 으로서는 역시 코민테른(1935)에서 규정한 '반파쇼 민족 통일 전선' 이론 을 원용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아시아적 생산 양식'을 의식하 는 학자들은 金洸鎭의 경우처럼 우리 나라에 노예제 사회가 없었다거나, 혹은 李淸源 같은 사람은 일본학자들의 소위 韓國史의 停滯性 이론을 답 습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정체성 이론에 맞서 나간 사람은 백남운으 로서, 그는 통일 신라 이후를 봉건 사회로 이해하였으며, '아시아적 생산 양식' 이론의 수용을 거부하는 대신 '아시아적 노예제', 혹은 '아시아적 봉건제'라는 개념으로 한국사의 특수성을 인정하였다. 이 '아시아적 생산 양식' 이론은 이후 1939년 스탈린에 의해 부정되면서 우리 나라 마르크스 주의 역사가들도 더 이상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원시 공산제-노예제-봉 건제-자본재-사회주의 도식에 따라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 했다. 다만 시대 구분의 시기 결정 문제는 논자에 따라 해석이 구구하고, 특히 자본제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 대한 문제는, 우리 나라가 자본주의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특수한 사정이 고려되어 '식민지.半 封建 사회'라는 시각에서 근대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해방 후의 마르크스 사학자들은 白南雲을 원로로 하여 金錫亨.朴時亨. 全錫淡.朴克采.林建相.정찬영 등의 소장학자들이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여 조선 학술원(1945. 8. 16, 위원장 백남운), 조선 과학자 동맹(위원장 박극 채), 민족 문화 연구소(1946. 5, 소장 백남운)의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였 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째는 경제학을 전공한 부류로서 도식주의에 치우치고 실증성이 빈약한 면이 있는 부류였고 둘째는 역사학을 전공한 부류인데, 이들은 실증성이 비교적 단단하고 정치 활동이나 이데올로기 성향도 그다지 강한 편이 아 니라서 문헌 고증 사가들의 진단학회에도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북한은 1947년에 '조선 역사 편찬 위원회'를 설치하여,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고 김광진.홍명희.이기영.박시영.김석형.이효정.이응수 등 20여 명의 학자들을 귀속시켜 通史 편찬과 최근세사 편찬 임무를 맡기는 한편, 기관지로서 <력사제문제>(월간)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면한 역 사 교육을 위해, 백남운, 이청원, 김석형, 박시형 등 월북 학자들이 개인 적으로 저술한 <조선력사>를 교재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전반 적으로 '소련을 향하여 배우자'라는 구호 아래 소련의 역사학 방법론을 받아들이는데 치중하여 아직 학문적으로 뚜렷한 자기 개성을 세우지는 못했다. **** W-A-N-T-E-D **** May God be always with me............. _ |\ |\ /| _ 이제 전설이 실현될 시간이다......... | | /| | | | 큰인물, 큰사랑을 위하여......... (^.^) (@_*) (^_~) 큰바우얼굴.co. & snuiwa.co. >@< >~< -o- Since 19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