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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obbes (Calvin)
날 짜 (Date): 1996년05월11일(토) 00시20분39초 KST
제 목(Title): 독일의 도전 - 유틀란트 해전 (17)


글쓴이: chess (채승병)
날  짜: Tue Aug 15 01:46:03 1995
제  목: [역사의 대해전] 독일의 도전 - 유틀란트 해전 (17)

 양군 함대는 각각 본국으로 귀환했다.

 독일은 이 대해전 소식을 일제히 대승으로 보도하였으며 실로 열렬하게 독일의 막강
Hochsee Flotte를 치켜 세웠다. 육상에서 솜므와 배르덩에서 지지부진하던 전세에
이것은 실로 독일에게는 엄청난 낭보였던 것이다. 분명히 손실 면에서도 영국측이
더 컸다. 독일의 대양함대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대함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는 점은 커다란 뉴스였다.

 반면 영국은 우울했다. 영국 Grand Fleet의 절대우위에 항상 자긍심을 느껴오던
영국 국민들에게 영국함대의 손실이 더 크다는 보고는 큰 자존심 손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측 누구도 결코 결정적 승리를 쟁취하지도, 결정적 패배를 당하지도 않은
전투였다. 양국의 명실공히 주력 드레드노트급 전함 함대들이 직접 교전을 해본 적도
없거니와 주변 순양전함대 및 기타 중소형 함정들과의 교전만 치열했다. 결국 양측의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은 단 한척도 손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양국의 손실을 비교해보자.

 영국측은 순양전함 3척 (퀸 메리, 인디패티거블, 인빈시블),
        장갑순양함 3척 (디펜스, 워리어, 블랙 프린스),
            구축함 8척,
 총 14척, 11만 1980톤이 침몰당하고, 승조원 6999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독일측은 순양전함 1척 (뤼쪼프),
          구형전함 1척 (폼메른),
          경순양함 3척 (뷔스바덴, 엘핑, 로스토크, 플라우엔로프),
            구축함 5척,
 총 11척, 6만 180톤이 침몰당하고, 승조원 2921명을 잃었다.

 함정손실수에서 1.3:1, 손실배수량에서 2:1, 인명손실에서 2.3:1로 일단 독일측이
열세를 무릅쓰고 분명한 승리를 거둔 것은 사실이었다.

 독일 함대가 열세를 딛고 이러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우수한
광학기술과 함대기동능력, 그리고 예기치않던 운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사실상 전 전투기간 중에 독일함대가 진형상으로는 계속 영국함대에 비해 크게
불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칼 짜이스 사에서 만든 스테레오식 조준기는
정확한 포격을 유도했으며 많은 적함에 명중탄을 기록하였다. 그에 반하여 영국의
단안합치식 조준기는 종종 착오를 일으켰고, 영국함대의 우세한 화력을 100% 활용치
못하게 하는 치명적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으로 독일함대가 참화를 면한 것은 급격히 불리해지던 T자 대형을 그때그때
180도 반전기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피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이 기민한 기동력
에 영국함대는 번번히 독일 주력과의 직접 교전에 실패했으며 결국은 끝내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독일측에 운도 많이 작용했다. 최후의 독일 주력전함대가 영국 함대의 침로를
교차할 시점에서 만약 영국의 주력전함대와 맞닥뜨렸다면 피해는 훨씬 컸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간발의 차로 젤리코 함대 및 비티 함대 모두를 따돌리고 후방의 애꿎은
구축함들에게 포화를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전사상 유례없던 양국 Grand Fleet와 Hochsee Foltte의 전무후무한
정면충돌은 전쟁의 추를 넘어가게 하지는 못했다. 근소하게 독일이 승리를 쟁취한
것에도 불구하고 독일 함대는 계속 소극적으로만 변해갔다. 이후 도거뱅크에서 다시
영국 해군과의 교전이 이뤄지지만 유틀란트 해전같은 거대한 해전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북해는 영국해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독일은 이제 주력전함대에
의존하기 보다는 U보트에 더더욱 통상파괴를 의존했다. 결국 1917년에 이르면 빈약한
잠수함들에게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강요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독일은 이 짧은 시기에 영국을 제치고 전 세계의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장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대도전을 벌였겄만 이런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는
영국에게 졌다. 유틀란트 전투는 하나의 상징적 의미가 컸다. 독일의 꿈은 여기서
좌절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독일 대양함대가 일시에 대양에 독일깃발을 날리던
시절은 이제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것이 물리적인 손실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전력은
유틀란트 해전 이후에도 얼마든지 영국함대와의 일전을 치룰만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더 이상 그걸 바라지 않았다.
 독일이 1916년 5월 31일 펄럭였던 북해의 장엄한 마스트의 행렬과 깃발의 윤무의
꿈을 버렸던 순간, 그들은 몰락했던 것이다.

 유틀란트 해전은 역사에 한가지 의문을 던진다.
 과연 영국의 아성은 무너질 수 없던 것이었는가?

 전쟁은 어찌보면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복잡하다.
 사람이 죽고 죽는 처절한 마당...... 분명히 순간의 폭염 속에 휩쓸려들어갔을
불행한 영혼들 사이에서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어찌보면 죄악이지만,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아닐런지.

 도전은... 끝났다.
 이제 유럽에서 그 누구도 바다에서 영국에 정면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은 스스로 무너졌다.


 (유틀란트 해전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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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IST Dept. of Physics  (
#  그날은 분명히 `가장 기나긴 하루'가 될 것이다. #   930509  채   승   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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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 가고,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가고,
      우리는 산다는게 뭔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  고대 로마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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