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obbes (Calvin) 날 짜 (Date): 1996년05월11일(토) 00시22분14초 KST 제 목(Title): 유틀란트 그 후 - 대양함대의 최후 글쓴이: chess (채승병) 날 짜: Wed Aug 30 21:12:54 1995 제 목: [참고] 유틀란트 그 후 - 대양함대의 최후 앞서 역사의 대해전, 유틀란트 해전 시리즈에서 영국 대함대와 일전을 벌인 독일 대양함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있어 이렇게 그 최후를 몇자 적을까 합니다. 독일 대양함대는 유틀란트 해전 이후에는 북해에서의 결전을 피하고 발트해에서의 활동에 치중합니다. 그리고도 몇차례의 대영함대 공격을 시도하기는 하지만 그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결국 키일 군항의 수병반란으로 촉발된 독일혁명에 이은 휴전을 맞게 됩니다. 이 휴전 당시에 유틀란트 해전의 주역, 쉐어 제독은 여전히 대양함대 사령관직을 유지하고 있었고, 1918년 8월 11일에는 병을 앓고 있던 호르펜도르프 대장을 대신 하여 히퍼 대장이 대양함대 군령부장을 맡게 되어 유틀란트 해전의 두 주역이 대양 함대의 전권을 쥐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918년의 11월 11일의 휴전조약은 대양함대의 그 영광의 시절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패전국이 되어버린 독일의 함대, 세계 제 2위의 대규모 함대를 자랑하는 함대이지만 불행히도 승전국들의 명령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휴전조약에서는 독일의 이 무시무시한 대양함대를 가만히 살려두고서는 독일이 언젠가 또 도발할 것이라는 승전국들의 우려에 따라 일단 독일의 주력 드레드노트급 전함 19척 중 11척과 전 순양전함 5척을 영국의 군항 스카파플로우에 정박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16척의 군함들은 독일이 보유한 전함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함들이었기에 연합국측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던 거죠. 그러나 휴전조약을 맺긴 하였지만 아직 정전조약(베르사이유 조약)이 맺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이 16척의 주력전함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우수한~! 전함들을 사실 많은 연합국들은 탐내고 있었습니다. 이 전함들을 적당히 갈라먹어서 각국의 해군전력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음큼한 기대를 하고 각국의 협상대표들은 이 전함들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휴전 후 약 6개월간 협상에 바빴습니다. 한편 억류된 독일 대양함대 전함 16척은 무장도발을 막기 위해서 각 1000여명의 승무원 중에 각 80명씩만을 남기고 스카파플로우에서 한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쉐어 제독과 히퍼 대장도 결국 지휘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이 초라한 대양함대 16척은 로이타 중장이 맡고 있었지요. 드디어 1919년 6월이 되자 베르사이유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면서 로이타 중장은 몹시 굴욕감에 떨게 됩니다. 독일 해군 장교들은 모두다 그들의 피땀으로 일궈놓은 이 대 전함대를 연합국에게 분배한다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내용에 모두 분노하고 있었으며 로이타 중장은 분연히 결의합니다. `이 대양함대를 저놈들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줄 수 없다!' 마음 같아서야 다시 함기를 휘날리며 1916년의 유틀란트 해전과 같은 일전을 벌이고 싶었지만...... 각 함의 수병은 단 80명 뿐이었고... 탄약도 제대로 없는 이 전함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억류된 대양함대 주변에는 영국 함대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었으니... 드디어 베르사이유 조약 조인 약 1주일 전이던 1919년 6월 21일. 영국의 함대들은 처량하게도 억류된 독일 대양함대의 전함들을 뒤로한채 조소를 퍼부으며 작전훈련을 하러 새벽에 출항했습니다. 때는 토요일, 영국 병사들은 승전의 기쁨 속에서 흥청망청 주말을 보내고 있던 사이에도 각 독일 전함들의 수병들은 들끓는 수치감에 말없이 바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로이타 중장 또한 그랬습니다. `이제 대양함대도 마지막이구나... 적의 손에 이 전함들을 모두 넘겨야 한다니...' 이 토요일 오전, 함교에 서 있던 로이타 중장은 부관에게 물었습니다. "부관, 자네는 이 함대를 적에게 넘겨줘야 한다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가혹한 처사는 즉각 철회되어야 합니다!" "그렇기는 하네만... 현실은 현실인걸. 자네라면 이제 어떻게 하겠나?" "......" 로이타 중장은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분연히.. 고개를 들고는 말했습니다. "그렇다! 우리의 피와 땀을 적에게 넘길 수는 없지 않은가! 부관!" "넷! 사령관 각하!" "긴급명령이다! 대양함대의 최후의 명령! 전 함대 Z 상황으로 돌입!" Z상황.... 이것은 말 그대로... 최후의 상황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침'하라는 명령이었죠. 전 독일 전함들은 영국군의 감시도 덜한 이틈을 타서 일제히 이 로이타의 명령을, 대양함대의 최후의 명령을 일제히 따랐습니다. 전 전함 자침~! ...... 스카파플로우의 만 안에 정박했던 16척의 주력 드레드노트급 전함들과 순양전함을 비롯한 총 70여척의 독일함대는 모두 선체에 구멍을 내고 바다 밑으로 하나...둘...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각 전함의 장병들은 끝까지 남아 장렬하게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들의 외침과 함께 전함들은 바다 밑바닥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대양함대의 자랑스러운 전함 11척, 카이저급 5척 - 카이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카이저린, 프린츠레겐트 루잇폴트 , 쾨니히 알베르트.... 쾨니히급 4척 - 쾨니히, 그로서 쿠르퓌어스트, 마르크그라프, 크론프린츠 빌헬름, 바이에른급 2척 - 바이에른, 바덴, 그리고 순양전함 5척 - 폰 데어 탄, 몰트케, 자이들릿츠, 데어플링거, 힌덴부르크 이 16척의 전함은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였던 것입니다. 이 뜻밖의 소식이 각국에 전해지자 먼저 독일 국민들은 영광의 함대의 최후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때의 울분을 다수가 잊지 않았습니다 - 대 독일제국의 영광의 표상 이었던 대양함대의 장렬한 최후는 실로 많은 독일 국민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후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나 히틀러가 엄청난 분통을 터뜨렸다고 하지요) 그리고 프랑스는 아까운 전리품을 놓쳤다는 생각에 대단히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영국은 이후 이 가라앉은 전함들을 대부분 다시 건져올렸으나 모든 전함들이 물에 가라앉은 후라 상태가 엉망이어서 다 고철로 폐선처분하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결국 얼마 남지않은 드레드노트급 전함 8척(나사우급 4척, 헬골란트급 4척)마저 연합국의 전리품 몫으로 쪼개지게 되었으며 후에 모두 고철로 분해되고 마는 처절한 운명을 맞습니다. 그리고 많은 구식전함들도 단 6척만을 남기고 모두 승전국들에게 분배되는 수치를 겪게 되고요. 결국 Hochsee Flotte의 역사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많은 독일의 피와 땀의 이 처절한 최후는 독일인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으며 후에 독일의 영광재현의 몸부림은... 파멸적인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유럽에 나타나게 됩니다...... !@#$%^&*()!@#$%^&*()!@#$%^&*()!@#$%^&*()!@#$%^&*()!@#$%^&*()!@#$%^&*()!@#$%^& @ @ KAIST Dept. of Physics ( # 그날은 분명히 `가장 기나긴 하루'가 될 것이다. # 930509 채 승 병 ) $ $ chess@math, chess@chiak ! % % tel. 03-4695 fax. 8-2796 @ !@#$%^&*()!@#$%^&*()!@#$%^&*()!@#$%^&*()!@#$%^&*()!@#$%^&*()!@#$%^&*()!@#$%^&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 가고,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가고, 우리는 산다는게 뭔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 고대 로마 격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