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구르미 (구르미) 날 짜 (Date): 2004년 6월 1일 화요일 오후 05시 04분 32초 제 목(Title): Re: [펌/한겨레] 김구 논리적인 댓글은 아니고 그냥 생각가는 대로 몇자 적자면..... >테러는 상대편으로 하여금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마드리드 폭탄테러로 스페인 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해 버린 것은 어찌 생각 하십니까? --- 테러를 테러로 상대하지 않겠다는 스페인 민중의 현명한 판단으로 여겨집니다. 마드리드 폭탄테러범은 끝까지 잡아 처벌하겠다는게 현 집권사회당 정부의 확고한 의지로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로 여겨지죠. PLO가 결성되기 이전에 미국 영국 이스라엘이 단 한번이라도 팔레스타인 인을 협상의 상대로 인정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 제가 성공적인 사례로 열거했던 IRA,PLO,ANC는 무장저항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더 크게는 대중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노력과 함께 할 수 있었죠. 그들은 테러전술이 운동의 한 단계를 특징짓는 '불가피성'의 범주에 드는지는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할것이라고 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거의 항상적으로 영,미,이스라엘의 테러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고 국제적인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레이건은 카다피를 적국의 지도자가 아닌 테러리스트조직의 수장으로 보았던 >셈이죠.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 논리를 내세울 수 있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전쟁 중인 적국의 수상을 공격했다고 일제의 법정에서 주장하셨습니다. 레이건이 엄연한 주권국가인 리비아의 수장을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다면 카다피도 미국을 깡패조직 쯤으로 규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님의 반론에 동의합니다. 저의 원래 주장은 미국이 테러에 대처하는 논리가 테러의 효용성을 무력화하려는 방침이라는 거였죠.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권력에 대한 조직적 저항은 '반폭력의 >폭력'이라고 봅니다. 방어적 폭력이기도 하죠. 일제하의 3.1 운동은 정치적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며, 일제의 탄압은 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권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칼 한자루 없이 시위로만 일관된 3.1운동을 총칼과 살인으로 억압한 폭력(일제)에 대한 반폭력의 폭력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저는 조직된 민중의 폭력적,비폭력적 저항에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단지 소수의 음모적 테러전술에 효용성에 문제를 제기하는거죠. >IRA의 변화와 영국의 태도변화가 대표적인 사례죠. IRA(정확히는 북아일랜드 IRA)가 테러를 중단하기로 하고 영국 정부가 IRA-신페인당과 협상을 벌인 일을 말씀하시나 보군요. IRA가 테러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1950년대에는 영국정부나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은 카톨릭 정치세력과 아예 협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카톨릭 교도들의 시위와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 학살로 대답했었지요. IRA의 테러가 있고나서야 마지못해 테러중단을 조건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와 앉은 것입니다. ---- 이 부분은 더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IRA가 테러전술을 채택해왔지만 신페인당의 정치적인 노력 역시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름만으로 따지자면 신페인당은 1905년에 >생겨났습니다. IRA와 신페인당을 다른 조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두 조직은 같은 정치 집단의 동전의 양면 (정당과 군사조직)입니다. 두 조직 모두 아일랜드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 였을때 탄생했고 IRA의 창설자였던 드 발레라와 마이클 콜린스가 신페인당의 주요멤버 였습니다. ----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IRA의 성공에 대해서는 위에서 얘기한 바 있습니다. >폭력은 약자에게 불리한 게임의 룰입니다.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약자에게 유리하거나 최소한 공평하기라도 한 게임의 룰이 어디 있긴 있습니까? -_-? ---- 위의 제 명제는 매우 일반적인 차원에서 한 얘기죠. 약자이지만 (국지적이나마) 다수라는 점, 항상적인 폭력에 시달린 다는 점에서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차원에서 그치겠습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대부분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입니다. 60년대 중후반에 시작된 그들의 불복종운동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죠. 같은 무렵에 아일랜드와 팔레스타인의 불복종 평화적 시위는 피로 얼룩지면서 실패했지요. 그 폭력은 일방적으로 강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테러입니다. 비폭력 평화적 운동이 성공하고 상대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면 테러리즘은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테러리즘은 비무장 정치운동이 협상을 거절당하고 폭력적으로 탄압받을 때 발생합니다. 일본 극좌익의 동경대 점령 사건이 무력진압으로 끝을 본 다음에 적군파가 탄생했듯이 말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영국-일제는 애초 비폭력 저항운동에는 전혀 협상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테러가 있고나서야, 테러중지를 조건으로 협상에 임하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말씀입니다. --- 위의 예를 든 것은 사실 saram님의 인용글에 대한 반론차원이었죠. 미국의 민권운동의 예는 사실 매우 특수한 게 사실입니다. 세계의 다른곳에 적용하기 매우 어렵죠. 저는 폭력적,비폭력적 저항이 적절하게 결합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미국의 지배계급은 폭력적 저항을 체제에 반하는 세력으로 간주 철저히 분쇄하는 한편 비폭력적 저항을 체제내로 끌어들임으로써 그 분리에 성공하였죠. 무장투쟁이 필요할 때라 하더라도 테러전술은 그 특수한 경우이고 효용이 있는 경우 역시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의 원래 입장입니다. 적군파 탄생은 매우 불행한 사례의 하나라고 봅니다. 반면 남한에서는 그러한 극좌파가 존재하지 않 았죠. 구르미의 왼쪽에는 거의 아무도 없다시피 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수서클로만 존재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저의 생각은 크게 변한게 없습니다. 예전에도 오른쪽에 있던 전대협친구들이 간헐적으로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고 달아나는 '응징'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했죠. 1,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에 영,미,일의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억압방식은 테러의 효용성여부만을 따져서 논하더라도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인도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던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역시 여러차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는데 영국 총독이 비폭력 불복종운동의 중단을 조건으로 협상에 나선적도 있었죠. 사례별로 검토해봐야 할 것인데 특정시기에 테러전술이 일정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한다면 별로 놀랄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다 긴 기간을 두고 평가를 해봐야 할 것이고 과연 테러전술의 주체가 장기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도 주목해야겠죠. >해방구가 된 광주는 평화와 공동체라는 이상이 현실화된 살아있는 역사적 >증거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해방구가 그러해야 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시에 그 해방구를 위해서 총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시민군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 당연한 얘기입니다. 시민군들의 무장투쟁은 테러와는 거리가 먼 조직된 다수의 그것이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