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snuiwa (큰바우얼굴D) 날 짜 (Date): 1996년05월01일(수) 13시11분31초 KST 제 목(Title):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 (10) (4) 自主意識과 事大論 A. 國防强化論 격동기 시기이기도 했던 고려 말기에 있어 國外에 있어 民族的인 갈등이 첨예했다. 몽고의 元에 이어서 恭愍王代 이후로도 홍건적과 왜 구의 침입으로 국가가 여러 차례 외적의 침입을 받아왔다. 또한 中原 에서 명이 세워지자 高麗·朝鮮과 明의 관계는 더욱 긴장이 급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수호와 자주성의 확보는 중요한 현안 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鄭道傳은 이와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군사 제도와 국가 재정의 확보를 그 현안으로 내놓고 있다. 그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國民皆兵制의 확립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비를 제외한 良人皆兵制를 주장한 것인데, 여기서 兵役의 주 담당자는 良人 중에서도 農民으로 보았다. 물론 身分의 高下를 막론하 고 모든 良人은 그 의무를 져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병제를 위해서 戶籍의 정비가 필수적으로 강조된다. 둘째는 모든 군사를 中央軍과 地 方軍으로 이원화해서 중앙군을 '府兵'이라고 부르고, 지방군을 陸守兵 (陸軍)과 騎船兵(水軍)으로 나눈다 {{ ) {朝鮮經國典}(下) 政典 軍制 '國家內則有府兵 有州郡番上宿衛之兵 外則有陸守之兵 有騎船 之兵' }} . 그러나 이들은 완전히 구별되어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中央의 義興三軍府로 하여금 군사를 一元的으로 통솔하게 하며 지방군을 또한 교대로 중앙에 番想가 있는데, 지방군도 물론 일 정한 의무기간이 지나면 品階는 주어지지만 관료라기보다는 의무병에 가깝다. 그러나, 중앙의 군인은 군역의무자 중에서 試取에 의해 선발된 일종의 武班과 연결된 官吏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宮內를 수비하는 侍衛軍은 國王의 親位部隊로서 上層身分의 子弟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義興三軍府의 책임자를 武班이 아닌 宰相이 겸임하게 함으로써 재상이 最高의 軍士統帥權을 갖게 해 體統을 엄하게 하고, 決策制勝의 戰略결정권은 文官(搢紳)이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 ) {朝鮮經國典}(上) 治典 軍官條. }} . 셋째, 鄭道傳은 國軍體制의 확립을 위해서 군사의 私用을 엄금해 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고려말의 여러적 배경과 연결지을 수 있다. 넷째로 그는 국방력의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戰術의 발달, 군사훈련의 강화, 무기의 개량.정비, 군사 의 士氣양양을 주장한다. B. 駒꿎�復意識 정도전의 국방 강화책은 단기적으로는 국토방위의 목적을 지닌 것 이지만, 장기적인 계획에서는 요동 수복의 의지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는 高句麗舊疆 회복을 큰 과제로 삼았던 고려 태조의 정책을 '宏規 遠略'이라고 칭송했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를 '與國'이라고 불러 서 與國이던 渤海를 침벌했던 거란에 대해 斷交와 渤海遺民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또한 '深仁厚澤'이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이러한 舊疆收復의 의지는 단순히 말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가 죽기 전까지 면밀히 그 준비를 주도되었는데, 특히 태조 5년 이 후에는 소위 表箋문제로 對明관계가 악화되면서 국군체제의 정비와 군 사훈련의 강화로 전쟁의 일전까지 이르기도 했던 것이다. {太祖實錄} 6년 6월 甲午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鄭道傳·南誾·沈孝生 등이 軍士를 일으켜 遼東을 칠 계획을 하 고, 五陣圖와 蒐狩圖를 지어 太祖에게 바치고, 訓導官을 두어 각 節制使·軍官 및 兩班各品과 成衆愛馬로 하여금 陣圖를 강습하게 하고, 또 사람을 各道에 보내서 이것을 가르쳤다 {{ ) {太祖實錄} 卷 12 太祖 6年 6月 甲午; 韓永愚, {鄭道傳思想의 硏究}, p. 170에서 再引用. }} . 이러한 요동 공략은 정도전 일파의 어떤 정책적인 면을 띤다고 생 각되는데, 要旨만 따서 말하면, 이방원일파에 의해서 정도전, 南誾, 沈 孝生이 李芳遠에 의해서 제거되면서 대신에 攻遼계획에 반대하던 조준 이 방원의 신임을 얻어 중용되는 정치변동이 일어나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이방원과 정도전 간에 정치적 세력 다툼의 한 일환으로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 按說; 李芳遠은 鄭道傳의 遼東공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鄭道傳의 遼東공략에 대한 名分下에서 軍事力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 꼈고, 둘째, 實質的으로 明과 敵對관계를 유지한다면, 朝鮮王朝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을 뿐더러, 鄭道傳과 같은 開國功臣에게 집중되어 있는 당시의 강력한 臣權의 優位의 상태 에서는 李芳遠이 추구했던 王權優位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함께 들 어있던 것 같다. }} . C. 事大論 韓半島의 주변에는 항상 强大國이 놓여 있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 를 힘으로 혹은 외교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런 까닭에 다른 북방민족처 럼 중국에 동화되거나, 혹은 다른 민족에 의해서 점령을 당하지 않고 끝까지 민족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 만큼 우리 민족은 자신에 대한 뚜렷한 主體意識과 民族意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 족보존의 한 방편이었던 事大論은 민족 주체성을 볼 때, 事大主義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뭬틈� 多元的 인 국가보존 정책으로서 하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事大交隣의 정 책은 외교상의 문제 해결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 외교절차에 의존해서 貿易과 文化수입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실제 조선 시대의 事大交隣의 정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굴종과 지배의 관계는 아니다 {{ ) 정옥자, 1993,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pp. 9∼11. }} . 이러한 의미에서 정도전은 事大를 긍정했다. 그래서 그는 金의 군사 적 압력에을 물리치고 金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高麗 仁宗의 對金政策을 좋게 평가했다 {{ ) {經濟文鑑別集}(下) 君道 仁王; 韓永愚, {鄭道傳思想의 硏究}, p. 182 참조. }} . 이러한 북방민족에 대한 事大는 어디까지나 軍事的 劣勢 를 만회하고 民族을 保存하기 위한 平和的 外交手段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서 明에 대한 것은 그 성격을 다소 달리한다. 즉 이는 전 단락에 서 말한 바와 같이 문화적, 정치적인 면이 부가되어서, 明에 대해서는 儒敎文化를 기반으로 하며 또한 中華國家로서 그 文化價値를 평화지향 적, 도덕지향적, 비침략적이라는 면에서 조선과 그 文化의 同質性을 느 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明에 事大를 취함으로써 名分과 形式上의 威嚴은 포기하고 實質的인 國家的 自律性과 民族의 保存, 文化를 얻고 자한 것이다. (4) 自主意識과 事大論 A. 國防强化論 격동기 시기이기도 했던 고려 말기에 있어 國外에 있어 民族的인 갈등이 첨예했다. 몽고의 元에 이어서 恭愍王代 이후로도 홍건적과 왜 구의 침입으로 국가가 여러 차례 외적의 침입을 받아왔다. 또한 中原 에서 명이 세워지자 高麗·朝鮮과 明의 관계는 더욱 긴장이 급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수호와 자주성의 확보는 중요한 현안 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鄭道傳은 이와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군사 제도와 국가 재정의 확보를 그 현안으로 내놓고 있다. 그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國民皆兵制의 확립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비를 제외한 良人皆兵制를 주장한 것인데, 여기서 兵役의 주 담당자는 良人 중에서도 農民으로 보았다. 물론 身分의 高下를 막론하 고 모든 良人은 그 의무를 져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병제를 위해서 戶籍의 정비가 필수적으로 강조된다. 둘째는 모든 군사를 中央軍과 地 方軍으로 이원화해서 중앙군을 '府兵'이라고 부르고, 지방군을 陸守兵 (陸軍)과 騎船兵(水軍)으로 나눈다 {{ ) {朝鮮經國典}(下) 政典 軍制 '國家內則有府兵 有州郡番上宿衛之兵 外則有陸守之兵 有騎船 之兵' }} . 그러나 이들은 완전히 구별되어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中央의 義興三軍府로 하여금 군사를 一元的으로 통솔하게 하며 지방군을 또한 교대로 중앙에 番上宿衛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두 부류의 군인은 성격상 차이가 있는데, 지방군도 물론 일 정한 의무기간이 지나면 品階는 주어지지만 관료라기보다는 의무병� 군역의무자 중에서 試取에 의해 선발된 일종의 武班과 연결된 官吏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宮內를 수비하는 侍衛軍은 國王의 親位部隊로서 上層身分의 子弟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義興三軍府의 책임자를 武班이 아닌 宰相이 겸임하게 함으로써 재상이 最高의 軍士統帥權을 갖게 해 體統을 엄하게 하고, 決策制勝의 戰略결정권은 文官(搢紳)이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 ) {朝鮮經國典}(上) 治典 軍官條. }} . 셋째, 鄭道傳은 國軍體制의 확립을 위해서 군사의 私用을 엄금해 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고려말의 여러 장군들이 군사를 私 兵化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 조선 건국 전후시기에 있던 私兵革破政 策의 사상적 배경과 연결지을 수 있다. 넷째로 그는 국방력의 강화를 위한 구� 의 士氣양양을 주장한다. B. 舊疆收復意識 정도전의 국방 강화책은 단기적으로는 국토방위의 목적을 지닌 것 이지만, 장기적인 계획에서는 요동 수복의 의지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는 高句麗舊疆 회복을 큰 과제로 삼았던 고려 태조의 정책을 '宏規 遠略'이라고 칭송했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를 '與國'이라고 불러 서 與國이던 渤海를 침벌했던 거란에 대해 斷交와 渤海遺民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또한 '深仁厚澤'이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이러한 舊疆收復의 의지는 단순히 말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가 죽기 전까지 면밀히 그 준비를 주도되었는데, 특히 태조 5년 이 후에는 소위 表箋문제로 對明관계가 악화되면서 국군체제의 정비와 군 사훈련의 강화로 전쟁의 일전까지 이르기도 했던 것이다. {太祖� 鄭道傳·南誾·沈孝生 등이 軍士를 일으켜 遼東을 칠 계획을 하 고, 五陣圖와 蒐狩圖를 지어 太祖에게 바치고, 訓導官을 두어 각 節制使·軍官 및 兩班各品과 成衆愛馬로 하여금 陣圖를 강습하게 하고, 또 사람을 各道에 보내서 이것을 가르쳤다 {{ ) {太祖實錄} 卷 12 太祖 6年 6月 甲午; 韓永愚, {鄭道傳思想의 硏究}, p. 170에서 再引用. }} . 이러한 요동 공략은 정도전 일파의 어떤 정책적인 면을 띤다고 생 각되는데, 要旨만 따서 말하면, 이방원일파에 의해서 정도전, 南誾, 沈 孝生이 李芳遠에 의해서 제거되면서 대신에 攻遼계획에 반대하던 조준 이 방원의 신임을 얻어 중용되는 정치변동이 일어나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이방원과 정도전 간에 정치적 세력 다툼의 한 일환으로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 按說; 李芳遠은 대해서 다음과 같은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鄭道傳의 遼東공략에 대한 名分下에서 軍事力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 꼈고, 둘째, 實質的으로 明과 敵對관계를 유지한다면, 朝鮮王朝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을 뿐더러, 鄭道傳과 같은 開國功臣에게 집중되어 있는 당시의 강력한 臣權의 優位의 상태 에서는 李芳遠이 추구했던 王權優位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함께 들 어있던 것 같다. }} . C. 事大論 韓半島의 주변에는 항상 强大國이 놓여 있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 를 힘으로 혹은 외교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런 까닭에 다른 북방민족처 럼 중국에 동화되거나, 혹은 다른 민족에 의해서 점령을 당하지 않고 끝까지 민족의 명맥을 이어� 수 있었다. 그 만큼 우리 민족은 자신에 대한 뚜렷한 主體意識과 民族意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 족보존의 한 방편이었던 事大論은 민족 주체성을 볼 때, 事大主義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무모한 무력항쟁만이 아닌 多元的 인 국가보존 정책으로서 하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事大交隣의 정 책은 외교상의 문제 해결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 외교절차에 의존해서 貿易과 文化수입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실제 조선 시대의 事大交隣의 정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굴종과 지배의 관계는 아니다 {{ ) 정옥자, 1993,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pp. 9∼11. }} . 이러한 의미에서 정도전은 事大를 긍정했다. 그래서 그는 金의 군사 적 압력에 사도로서 대처해서 形式上 君臣關係를 맺음으로써 金의 압 력을 물리치고 金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高麗 仁宗의 對金政策을 좋게 평가했다 {{ ) {經濟文鑑別集}(下) 君道仁王; 韓永愚, {鄭道傳思想의 硏究}, p. 182 참조. }} . 이러한 북방민족에 대한 事大는 어디까지나 軍事的 劣勢 를 만회하고 民族을 保存하기 위한 平和的 外交手段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서 明에 대한 것은 그 성격을 다소 달리한다. 즉 이는 전 단락에 서 말한 바와 같이 문화적, 정치적인 면이 부가되어서, 明에 대해서는 儒敎文化를 기반으로 하며 또한 中華國家로서 그 文化價値를 평화지향 적, 도덕지향적, 비침략적이라는 면에서 조선과 그 文化의 同質性을 느 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明에 事大를 취함으로써 名分과 形式上의 威嚴은 포기하고 實質的인 國家的 自律性과 民族의 保存, 文化를 얻고 자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