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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snuiwa (큰바우얼굴()
날 짜 (Date): 1996년05월01일(수) 13시03분07초 KST
제 목(Title):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 (4)







           2. 鄭道傳의 生涯

        A.鄭道傳의 血統과 家系

   鄭道傳(1342 ?∼1398: 忠惠王 復位 3∼太祖 7) 

{{
 ) 鄭道傳의 生年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
은 號가 三峰이고 字

는 宗之이다. 貢生 鄭云敬과 禹淵(延)의 庶女 사이에서 三子 중 長子로 

출생하였다. 安東 奉化縣人으로 出生地는  丹陽 三峰이며, 本居地는 榮

州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文獻資料와  口傳資料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 

문헌자료인 {三峰集}에 있는  鄭云敬에 대한 行狀기록을 보면,  鄭道傳

의 父系는 경상도 奉化를 관향으로 하는 鄕吏의 後孫으로서 그가 맡았

던 향역을 언제부터 지기 시작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정도전의 高祖

인 鄭公美가 戶長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奉化鄭氏의 

시조로 된 것으로 보아 그의 先代는 하급향리 내지는 평민이었을 가능

성이 크며  {世宗實錄} 地理志에 奉化縣의  한 土姓으로 되어  있어서, 

이 곳에서 오랜 토착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

   정공미의 후손들은 하급  관리직을 맡는 정도였는데, 英粲의 경우는 

秘書郞同正으로 從7品∼正8品의 관리로, 英粲의 아들 均은 檢校軍器監

으로 從3品의 散官職에  있었다. 이 직책들은 사실상  實職管理의 자리

는 아니었다. 奉化鄭氏에서 實職官吏가 나온 것은 均의  아들 云敬때부

터였다. 鄭云敬(1304∼1366)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姨母家에서 자

랐다. 그는 榮州와 福州(安東)의 鄕校를 다니다가, 외삼촌 安奮(翰林)을 

만나 開京에 와서 12徒와 교유했다. 福州戶長 權援은 그가 福州鄕校에 

다닐 때의 친구였고, 稼亭 李穀(李穡의 부친)은 開京 유학 때의 친구였

다. 李穀 역시 韓山 鄕吏의 子로서, 鄭云敬이 교유한 학우는 대개 향리 

또는 향리  출신의 사족임을 알  수 있

 ) {太祖實錄} 卷1 太祖元年 8月 壬申條.

}}

으로서  忠肅王 

때 진사에 급제해서 胥吏와  守令을 거쳐서 공민왕 때에는 3品에 해당

하는 刑部尙書.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에  올랐고 守令으로 있

을 때는 善政을 베풀어서 뒤에 {高麗史} 列傳에 良吏傳에 오르기도 한

다.

   그는 죽은 뒤에 爵位가  낮아서 諡號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친구

들이 그에게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 '廉義'라는 시호를 지어  주었다. 

그의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鄭道傳의 글에 의

하면 '平日에 家産을 돌보지  않고, 世利에 淡泊' 

{{

 ) {三奉集} 卷4 鄭云敬行狀.

}}

하였으며, '집에는 쌓

아놓은 財産이 없고, 妻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하였으나 淡如하

게 처신했다' 

{{

 ) 同上書 卷4 鄭云敬墓表.

}}

고 되어 있다.

   실제로 그들의  가정 환경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운경이 죽은 후에 鄭道傳과 그의 두 남동생과 한 여동생은 아버지로부

터 노비를 상속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운경은 사망 당시에는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으며  경제력은 미약하나마 어느 정도는 갖춘  것

같다. 하지만  長男인 정도전에게  약간 명의 노비만이  상소된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정도전  가계의 수준은 풍족하지는 못하고 단지  생활

을 영위할 정도인 미약한 中小地主의 수준으로 보인다.

   정도전 집안은 비록 家勢는  한미했지만, 學問的 재능으로 中央官人

으로 발탁된다. 그러나, 정도전에게는 出世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가 존

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와  부인의 신분이 微賤하다는 사

실이었다. 이로 인해서 정도전은 政敵으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았고 이 

점에 대해서도  상당히 신경을 쓴  것을 볼 수 있으며,  특히 身分上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정도전의 어머니의 출신에 대해서 {太祖實錄}의 卒記에는  정운영의 

부인 禹氏는 禹延의  妻 金氏(정운경의 丈母)는 禹玄寶의  人族인 승려 

金 이 私奴(樹伊)의  처를  

{{

 替

}}



{{



}}

奸해서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禹玄寶의  세 아들이 정운경의 장모가 僧과 賤妾으럇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세상에 퍼뜨리고, 더불어 신분

상의 문제로  삼아서 나중에 鄭道傳이 벼슬길에  오를 때 告身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禹氏일족에 깊

은 원한을 품고 있다가 開國 후에 죽이려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 {太祖實錄} 卷14 太祖 7年 8月 乙巳條.

}}

.

   이러한 혈통상의 문제는 당시 정도전에 국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

도전의 포함해서 朝鮮의 重臣이었던 趙英珪, 咸傅霖, 河崙 등도 外裔孼

族이었는데, 延安車氏들은 이러한  家系에 대한 기록을 車柳族譜에  실

어 퍼뜨렸기 때문에 이들의 미움을 받다가 자객에 의해서 車原 를 비

롯한 延安車氏 內外族親 70여명이 타살되기도 했다.

   이러한 출신을  따지는 문제에서 조선왕국의 개국을  전후한 시기의 

정치적 문제와 혈통상의 문제가 어떻게 정치 쟁점화 되었음탄隙� 성향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정도전의 혈통상의 

문제점과 같은 것은 처음 벼슬할 때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이성계일파의 

핵심인물로서 함께  정치개혁을 주도할 때  政敵들이 그를  제거하려는 

공격무기로 삼았다.

   공양왕 3년 10월에  省憲에서 올린 上疏에서는 鄭道傳을 羅州에 유

배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道傳은 家風이 不正하고 派系가  不明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朝廷을 混淆시키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으며, 공양왕 4

년 4월에는 李成桂가 海州에서 落馬한 사건을 계기로 鄭夢周는 黨與인 

諫官 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정도전 일당의 죄를  탄핵하게 했는데, 그 

상소문 가운데, '鄭道傳은 賤地에서  起身하여 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

고, 賤根을 감추기  위해 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신공격을 한  정적들은 또한 당시의 명성있서 친구였던 鄭夢周나,  그 
밖에 金震陽, 李擴, 李來,  李敢, 權弘, 柳

沂, 金溱 등이었다.  그리고 조선 개국 후  계속해서 그의 평가는 冷待 

그 자체였고,  또한 조선  후기에도 識者들 사이에서  三奴家의 하나로 

불렸다.

        B.幼年期와 出世期 (恭愍王 11년 ∼23년)

   이러한 鄭道傳은 이러한  家系의 배경 속에서 鄭云敬의 三男一女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生年는  1342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崔氏夫人 

사이에 津(1361∼1427)·淡(泳)을  두었다. 그는 外家(禹氏)에서  태어났

지만, 아버지 云敬의  本家인 榮州에 있어 이곳에서 幼年期를  보낸 것

으로 보인다. 그후  父인 云敬이 개경에 벼슬하면서  개경에 올라와 李

穡의 門下에서 정몽주,  李崇仁, 李存吾, 金九容, 金齊顔,  朴宣中, 尹紹

宗 등과  儒學을 배웠다. 그리고  공민왕 9년(1360)에 成均試에 합격하

�1362)에 文科(同 進士)에 합격하여,  忠州司錄(공민 

12)·典校注簿(공민 13)·通禮門祇侯(공민  14)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그러나 공민왕 15년(1366)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거푸 당하자, 榮州에 

내려가 3년간 廬墓하면서 지방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공민왕 19

년(1370)에 成均館이 重營되고,  李穡이 大司成이 되었고, 김구용, 정몽

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이 敎官이 되자, 그를 成均博士에 천거하

였다. 이때부터  약 5년간에 걸친  學官 겸직 시절에  性理學에 대해서 

매일 토론을 하였고,  또한 당시 성리학의 크게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

다.

        C.流配과 流浪期 (禑王 元年∼9년)

   그러던 중  공민왕이 시해되고 禑王이 즉위하면서부터  그에게 시련

이 닥친다. 權臣 李仁任이 禑를 왕으로 세우고  親元政策으로 돌아서려 

하자, 이를 격렬히 반대하다가 慶復興과 李仁任의  노여움을 사서 全羅

道 羅州郡 會津縣 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禑王 元年, 1375). 이 禑王 

元年에서 同王 9年까지  그는 流配와 流浪으로 연속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역성혁명의 經綸을 쌓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에는 羅州郡 會津縣 居平部曲의 消災洞이라는 산간마을에 

流配되었다. 여기서  그는 農民의  生活相을 체험한  것같다. 우왕 3년

(1377)에 그는 고향으로  例徙하여 先鄕인 榮州와 生家인  三峰을 왕래

하면서 4년을 보내고, 다시 從便으로  유배가 완화되자 지금의 서울 근

교로 올라오게 된다.  처음에는 三角山 밑에 草廬를 짓고  三峰齋라 하

고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이곳 출신 재상이  이를 싫어해서 齋

屋을 헐었고, 이로  인해서 그는 諸生을 이끌고 富平府使  鄭義에게 의

탁해서 富平府의  南村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宰相 王某가 

그 땅을 別業을 만든다고 해서 齋屋을 헐었다.  그리� 이사했으며 우왕 9년에는 
咸州幕舍로 이성계를 찾아가게 된다.

   그가 이성계를  찾아가는 이유는 易姓革命을  謀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평소에 文武의  才能이 있다고 믿었고, 書와 劍을  兩立시키는 것

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함을 알고, 당

시 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武將 이성계의 힘을 빌기 위해서 그를 찾았

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성계는 아직 革命을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도전은  그를 혁명으로 이끈  최초의 謀議者로 

보인다. 정도전은 醉中에  종종 말하기를 "漢高祖(劉邦)가 子房(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子房이 漢高祖를 이용하였다." 

{{

 ) {太祖實錄} 卷14 太祖 7年 8月 乙巳條의 鄭道傳卒記.

}}

라고 말하면서 자

신이 이성계를  이용하였다는 것을 漢高祖와  張良의 관계에 비유해서 

자주 �      D.朝鮮 創業 시절(태조 元年∼7년)

   우왕 10년 7월에  그는 典校副令으로서 書狀官이 되어 聖節使 鄭夢

周를 따라 明京(金陵)으로  갔다. 禑의 承襲과 諡冊을 요구하기 위함이 

使行의 목적이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돌아와,  다음해 成均

祭酒·知製敎를 거쳐 우왕  13년에 南陽府使를 지내고, 이성겋沙殆� 임명되었다. 
우왕 14년 6월에  威化島회군으로 실권

을 잡자 密直副使로 임명되어  趙浚·尹紹宗 등과 함께 田制改革을 추

진하였다. 禑를 폐하고 昌王을 세우는  과정에서 정도전은 스승인 李穡

(시중)과 의견이 갈렸고, 田制改革을 都堂에서 의논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이색과 또 한차례 의견이 충돌되쓴�. 그 동안 정도전의 학우

였던 鄭夢周은  전제개혁의 불투명한 태도로  정도전과 의견이  갈리게 

된다.

   昌王 元年(1389) 11월 이성계와  조준 등과 협의해서 禑·昌 부자를 

王氏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이른바 '廢假立眞'의 명분을 세워

서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 공으로  진화현 충의군에 봉해지고 輪忠論道

佐命功臣號를 받았으며  삼사좌사로 승진하였다. 아울러  공신전 100결

과 노비 10구를 받아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공양왕 3년(1391) 정월에  5軍이 혁파되고 三軍都摠制府가 설치되자 

右軍摠制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三軍都摠制使에는 李成桂가, 左軍摠制

使에는 趙浚이 각각  임명되었으니, 결국, 이성계, 조준, 정도전이 고려

의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사권을  정도전이 쥐게되자 그는 

개혁반대파를 몰아내는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보수파의 공

격 또한  이와 대응하여  거세진다. 그래서 昌王·공양왕  즉위 당시는 

혁명파와 반혁명파로 완전히  양분이 되어서 서로 상대 세력을  제거하

려했다.

   공양왕 3년 9월에 반혁명파는 憲司로 하여금 정도전을  탄핵하게 해

서 奉化·羅州로  유배시켰다. 이때 憲司의 탄핵상소는  주로 정도전의 

血統을 문제삼았다. 다음해  공양왕 4년(1392) 봄에 정도전은  귀양에서 

풀려나와서 고향인  榮州로 돌아왔는데 이성계가  海州에서 사냥  중에 

落馬해 부상당한  것을 계기로 侍中 鄭夢周은   金震陽, 姜淮白,  鄭熙, 

徐甄으로  문제를  문제삼은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공양왕 4년  4월에 奉化에서  체포되서 甫州(醴泉)에 

감금되었으나, 6월에 소환되어 忠義君에 다시 봉해졌다. 이렇게 반혁명

파의 역습으로 위기에 몰려있을 때, 이방원은 정몽주를 격살했고, 이어

서 정도전은 조준과 남은 등과 함께 이해 7월에 이성계를 新王으로 추

대해서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되었다.

   개국 직후에  정도전은 大小官僚와  閑良耆老, 軍民  등에게 보이는 

王의 敎旨를 제작해서 새  왕조의 國政方向을 제시했는데 17條의 便民

事件에는 宗廟社稷制,  王氏安置, 學校 및 科擧정비,  冠婚喪祭制, 守令

制, 忠臣孝子표창,  寡孤獨 진휼, 其人폐지,  錢穀출납, 驛館制, 騎船軍 

진휼, 鴻斂㉧�, 國屯田폐지,  大明律준수, 田制준수, 경상도 貢物  감면 

등에 걸치는 광범한 시정개혁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개국 1등공신으로  門下侍郞替成事, 同判都評議使司事, 判戶曹

事, 兼判尙瑞司事,  寶文閣大學士, 知經筵, 藝文, 春秋館事,  兼義興親軍

衛節制使 등  요직을 겸하였다. 이로써  그는 趙浚과  南誾등과 더불어 

兵權과 政權을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다.

   태조 3년에서 4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治國의 지도  이념을 재정립하

는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였는데, {朝鮮經國典}(3년 3월), 

{心·氣·理篇}(3년), {高麗史}(4년 1월), {經濟文鑑}(4년 1월), {監司要

約}(4년)을 자진하여  지어 바쳤다. 또한 태조의  서얼왕자인 芳碩(康妃 

소생)을 世子로 책봉했고 世子貳師로서 세자교육을 담당하였고, 태조 3

년 8월부터 新都계획을 참가하여 新宮諸殿의 명칭을 撰進하는 등 왕업

의 文物제도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태조 5년 이후 다시 그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시련이 닥쳐왔

는데 明나라에 보낸  表箋文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그 표문의 찬자로서 

정도전을 찬자로 지목해서 명나라온을 가했다. 이 

表文은  정도전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명나라가  정도전의 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고 그를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사건 후 

그는 判三司事에서  물러나서 奉化伯에 봉해졌고  또한 병을 칭탁하며 

明의 요구에 불응했다. 그리고 攻遼운동을  적극화해서 군사 훈련을 강

화했다.

   태조 6년 10월에  새로 세워진 嘉禮都監의 提調에  임명되었고, 

{{

 ) {太祖實錄} 卷12 太祖 6年 10月 據官이 되었다 

{{

 ) 위의 책 卷12 太祖 6年 10月 甲午條.

}}

. 태조 6년 12월에는 判義興三

軍府事에 趙浚이 임명되고, 정도전은 다시 東北面都宜撫巡察使에 임명

되서 이 지방의  城堡를 수리하고 州郡을 구획하고  정비하게 했다. 이

러한 점으로 보아 정도전은  실질적으로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 

遼東공격� 것으로 보인다.

   태조 7년 4월 權近과  함께 成均館提調가 되어 見任 및 閑良으로서 

4品 이하의  儒士와 三館儒生에게  經史를 강습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太祖는 陣圖에  의한 군사훈련을  楊州牧場에서 계속했는데,  정도전이 

병을 칭탁해  明에 入朝하지 않은 데에  대한 問罪의 擧兵을 대비하는 

것이 그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

 ) {太祖實錄} 卷14 太祖 7年 4月 甲辰條.

}}

 이 陣圖훈련은 태조  7년 8월 읏廈〈� 陣圖훈련에  불참한 여러 王

者와 節制使들을  憲司로 하여금 대거 탄핵하고  치죄하였다 

{{

 ) {太祖實錄} 卷14 太祖 7年 8月 甲辰·丁未·庚戌.

}}

. 여기서 

太祖의 군사장악을 주도한  것은 南誾의 건의에 따른 것이며,  遼東 공

격을 위한 준비뿐만이  아니라 정도전과 남은일파와 이방원 일파의  권

력 � 위치를 차지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이방원일파의 역습을 하게 되고, 정도전과 남은 

일파는 宗親의 謀害했다는  죄명으로 일시에 誅殺되고(戊寅難: 恭昭難, 

7년 8월), 아끼던 신하와  세자를 잃은 이성계도 왕위를 물러나게 된다

(태조 7년 12월). 이때 정도전의 나이는  57(?)세였고, 함께 주살된 사람

은 南誾, 沈孝生(芳碩의 장인),  柳曼殊, 李懃, 張至和 등이었다. 정도전

에게피살되었고, 沈은 집에

서 자살했으며,  津과 泳은  살아남아서 津은 나중에  태종과 세종대에 

벼슬해서 형조판서까지 오르고 泳은 소윤에  이르렀고, 영의 손자 文炯

는 세조때 우의정까지 벼슬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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