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snuiwa (큰바우얼굴()
날 짜 (Date): 1996년05월01일(수) 13시02분21초 KST
제 목(Title): 정도전의 사상과 생애 (3)









         (3) 朝鮮王朝 개창의 의의



   몽고간섭시대가 끝이 나자 다시  고려는 元.明이 교체되는 恭愍王代 

이후의 역사는 개혁을  둘러싼 혁신과 반동의 대결이 심해지기  시작한

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은 忠節派에 속했

고 적극적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은 開國쪽을 택했다.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는  편은 대부분 性理學을 공부했던  儒臣들로

서 향촌에  中小地主的인 경제기반을 가졌으며, 그들은  田制改革과 같

은 기득권이 침해받을 위험이 큰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성리

학 자체가 地主制를  부정하는 사상 체계는 아니었다.  또한 修己의 측

면에서 易姓革命은 變節로 간주되었다.

   이와 대비하여 易姓革命을 지지하는 편은 일단 온건  개혁적인 성리

학자와는 그 사회신분적인 조건이나  사상의 성향이 달랐다. 대체로 이 

혁명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血緣上으로 약점을 지닌 인사들이 많았는

데, 보통 父系가 士族에  속해도 母系나 妻系에 婢妾에 속했다. 이러한 

부류에는 鄭道傳, 咸傅霖,  李和, 趙溫, 張湛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또

한 革命派에는 전혀 벼슬의 경험이 없는 순수 평민으로 무예가 능숙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밖에도 떠돌이 승려로서 還俗한 자, 外國

에서 귀화해 온 자, 北邊에서 萬戶나 千戶의  벼슬을 가졌던 자들이 혁

명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구성에서 살펴본다면,  혁명파는 

곧 고려왕조 지배 체제에 적극적으로 흡수되지 못한 지방인과 낮은 신

분의 자들로서 급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혁명파  중에서 여말에 큰 스승으로부터  정식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鄭道傳 한 사람뿐이었다.  물론 혁명파에도 文科 합격자

가 다수  있으며, 趙浚, 劉敬, 鄭摠,  咸傅霖, 吳思忠 등과 같이  뛰어난 

학식을 갖춘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정식적인 계통의 유학을 공부

한 사람이 아니라 自手成家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학문 경향

은 修己에 역점을 두기보다는  富國强兵을 지향하는 治人의 경학과 治

國의 技術學에 관심이  컸다. 그들은 또한 性理學에 대한  이해가 다소 

있었지만, 그 깊이에  대해서는 아직 높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정도이고, 漢唐儒學이나 道敎, 禪宗, 風水圖讖信仰에 관심을 보였고, 또

한 절충하려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상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李穡의 門下에서 정통적으로 性

理學을 배웠던 鄭道傳이 같은  學友였던 정몽주나 이숭인과 저명한 성

리학자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바로  血統上의 하자였다. 당시

에 고려 시대에 있어서 골간이 되었던  良.賤 제도는 많은 부분이 무너

져 있었지만, 고려 말기에도 아직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또한 정도

전을 끝까지 괴롭히던  政敵들의 좋은 공격 이유가  되었다. 이는 또한 

당시에 성행했던 良.賤의 혼인으로 인해서  정도전과 같은 신분적 위치

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모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분적  소외감은 또한 경제적인 소외감과도  맞물려 돌아가

고 있었다. 농장  발달에 의해 늘어가던 流浪民과 無田民의  소망은 自

作地의 소유와  收稅負擔의 감소였다. 또한 관리나  군인으로서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던 有役民의 고통도 또한 큰 불만의 사항이었다.

   신분상의 소외감에서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은  部曲民과 奴

婢의 경우인데, 婢妾所生의 士族子弟의 소외감이 주로 政治的 成就 제

약에서 오는 것인데  반해서 賤民들은 원초적인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

고, 또한 자신들의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신들이 권력을 직접 쟁취

하고 노예제도 자체를 개선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던 사람

들이었다.

   조선의 개창은  바로 이러한  불만 세력을 결집하여  새로운 개혁한 

나라로서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그들이 이루고

자 했던 개혁이 성공했던  것은 아니지만, 전시대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나 사회적으로 그 지위가  향상된 良人自作農을 기반으로 하여 中小地

主 士大夫들을  포섭하는 국가로서 출범했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

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