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4월30일(화) 22시39분04초 KST 제 목(Title): 하나비비에서..(한국사 민족문제) Posted By: namsan (오두방정) on 'History' Title: Re: [퍼온글] 고조선과 민족개념에 대한.. Date: Mon Apr 29 23:45:27 1996 한국사에서의 민족문제에 대한 부연 해석 먼저 퍼온글에서 `나당전쟁 때는....삼국유민의 연대의식이 강화된다.."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부분은 당나라만 `외적'이란 측면의 해석이 강하고 삼국은 동일민족이라는 후대개념을 너무 의식한 분석으로 여겨진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최근에 이같은 `삼국통일'이란 단어보다 단순히 `백제 고구려의 멸망'으로 칭하자고 한 견해도 있지만) 백제와 고구려인들에겐 신라를 적대국으로 여겨서 오래도록 국가부흥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고 발해나 후백제 후고구려처럼 끝까지 신라에 복속되려 하지 않았던 세력들이 많이 있었던 점을 미루어보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북부여나 고조선의 세력이 아닌 남부를 중심한 마한 변한 진한 삼국은 같은 `일통삼한' 의식이 다소간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고대 삼한이 결코 삼개국으로만 단정할 수 없었던(신라 6촌이나 12가야 십제 등 삼한엔 76국이 있었다고도 하는) 고대 남부 한반도의 국가개념에서도 잘 유추될 수 있는 것으로서 유사한 문화민족인 삼한의 국가들이 신라통일로 인하여 원효의 삼통일합 통일의식에 오버랩된 의식으로 강화된 감이 있다. 그러므로 삼국통일의 이상을 고려 중기 이전에 확보하기엔 아직도 많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현실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통일'이라기 보다 무서운 `적국'을 멸망킨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라의 백제와 고구려 복속은 외형적인 `민족통일'의 기대를 마련해주었으며 그것은 신라파들이 고구려와 백제권에 우세하게 세력을 확보하게 한 요인으로서 묘청의 난에서 김부식의 신라세력들이 외곽세력인 서경(평양)의 고구려 세력인 [묘청의 난]을 평정함으로서 그 권력중심을 확고히 한 것이 되었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단군 5천년 최대의 통탄을 금치못하는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반도 북쪽 세력을 잃어버린 최후의 아까운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로 `민족웅비의 사상이 죽은 대사건'으로 보고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퍼온글의 "고려후기에 삼국 70여국이 단군자손이었다"는 고려후기의 기록은 단군조선을 중심해서 북쪽 `묘청의 난'의 정신적인 반란 후예들을 안무하는 역할로서 의식적으로 강화표현된 `단군민족' 개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같은 `이상주의적 단일민족론'은 그 이후 몽고병란이 터지면서 실질적인 민중-민족적인 연대감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김부식 이후에도 이미 내가 앞서 올린 `치청왕국..'에 대한 판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신라중심의 귀족주의적 민족통일만을 이루고 있다가 몽고병란시에 몽고병들의 살벌하고 잔인한 침략만행에 대항하여 민족 통합의 의식이 본격적으로 강화될 수가 있었다는 점으로 그 항몽요인이 민중적 민족통합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주었다는 것이다. 마치나 독일군의 침략을 받은 소련이 전쟁중에 슬라브족이름으로 뭉치자고 했던 것처럼. 그리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한 것은 바로 고조선 중심의 단일민족을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본 것은 좋았으나 이씨왕조의 `조선'이란 국호는 고려말의 쿠데타 세력이었던 이성계를 중심한 친명파들이 쿠데타를 성공하고난 후, 나라 이름을 결정하지 못한채로 두가지 이름 `조선'과 `금녕?'(이성계의 가문과 관련이 있는데 잠시 기억이 안남)을 가지고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서 명나라에서 이름을 결재하고 있는데서 그 조선이란 이름이 다분히 `친중국적'인 연유로 정해졌다는 기록들을 토대로 볼 때 너무 자주적인 고조선으로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만 강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쿠데타 세력들이 바로 명을 치러갔던 신군부였던 이성계파들이고 그들이 쿠데타 이후의 집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수법으로 세운 국가건국 `시국수습방안'의 일부가 바로 `조선건국'의 실질적인 배경에 있다는 것이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성공하고 그후의 집권보장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미국에 대한 `한국 자존'의 핵무기 제조 프로젝트를 포기함으로써 `사대미국'을 강화한 것과 비교될 수도 있다) 만약에 명을 치러갔던 이성계파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쿠데타를 하지않고 정명파들(최영을 비롯한 명나라 정벌파들)이 쿠데타를 하여 국가를 새로 건설하였더라면 아마도 `사대주의'는 면하고 적어도 현재의 `요동반도'는 우리땅이 되어 있을려는지 역사에서의 `만약'을 기나긴 과거에까지 소급한다는 것은 무리지만 이성계의 쿠데타가 너무나 약점을 많이 안고 이루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 [환단고기] 문제는 이 보드 초기에 다루어졌던 문제이지만 아직도 문헌평가에 문제가 많이 있는 책이다. 특히 그 책 가운데 구한말 일본의 개화사상의 언어였던 `문화'란 단어가 들어가는 것은 결코 그 책의 서술 연대를 개화기 시대 이상 길게 잡을 수 없다는데 핵심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연유가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주장은 바로 일본의 최고 사서인 [일본서기](니혼쇼키)가 백제사의 일부가 건너간 역사서라고 보는 관점의 그 반대경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북한학자들이 그 책을 사료로서 인정한다는 것에서나 전두환 군부시절의 군부중심의 역사 재해석 작업의 일환으로 재야 민족사학자들의 주장을 대폭 수용한 태도라고 보는 것을 떠나서 우리 재야 사학계의 일부가 그것을 의미있게 보고자 하는 것은 일본이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조상이 하나였다는 `내선일체' 사상으로 의도적으로 기록했던 책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본 식민지하에선 수십만권의 우리의 귀한 사료들이 제거되었다는 주장을 생각할 때 일본제국주의 사학자들이 분명 환단고기를 기록했다면 우리의 없어진 사료들을 토대로 그런 책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란 것이다. 실제로 상당수 없어진 우리의 역사 사료들이 그 책에 등장되고 있는 점도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일본중심으로 이야기를 쓴 책을 일본중심의 내용을 제거한 나머지만 밝혔다고 해서 전면적으로 그 자료를 무시한다는 것은 사료의 부분가치의 확보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이 못될 것이라고 본다. 그런면에서 [환단고기]의 사료적 검토는 아직도 열려있는 것으로 놔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엔 우리 사료가 아직도 많이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조선'에 대하여 남한의 `한국'은 `일본이 깔보는' 국호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연이어 제목을 따로 붙인 판글 <우리나라의 국호에 대한 잔소리>를 참고하라. 오두방정(namsa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