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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arkeb (parkeb)
날 짜 (Date): 2003년 4월 17일 목요일 오후 05시 26분 09초
제 목(Title): Re: 뉴스툰/ 광해군 인터뷰 (2)


>유성룡이 조선의 국력으로 10만 군대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 그건 선조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유성룡이 율곡의 십만양병설(그런데 이거 정사에 없는 말이라고도
>하던데)을 반대한 건 국력을 고려한 타당한 판단이고
>선조가 그런 건 병신이라서 그렇다는 건 너무 불공평하죠.
>저도 선조는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식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우선은 원글에 신하들이 싸우기만 했다는 것에서 왕의 역할을 지적하지 
않는 것을 반박하려는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에 매달리는 것 같이 보여서 죄송합니다만,
선조가 그런 판단을 잘 하는 왕이었다면 임란직후 여러 방책들로
백성들의 피해를 상당히 줄였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네요. -.-;;


>그리고 김성일의 판단착오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전쟁 개시후 선조도 김성일을 처형하려다
>포기했는데 그건 당시 이미 서인이 집권세력인 것과 분명 관련이
>있습니다. 초반에는 선조의 눈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나중에 그에게
>알랑거리며 선물이라고 왜군 목 하나(-_-)를 바쳤다는데 흠...
>조선인 하나 잡아서 머리깎아 왜군으로 꾸몄는지 알게 뭡니까?
>(물론 전쟁 후반에는 나름대로 실수를 만회하려 열씨미 뛰었죠)

김성일은 동인이고, 당시 집권세력은 동인입니다.
넘어갈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서인에 반대한 의견이라고 보기는 김성일이 이후에 보여준
것으로 판단할때 어렵다는 얘기죠. (위의 선조 부분도 같이
겹치는 것이겠죠. 결과지만, 이후로 따져보는 것 뿐이지만 -.-;;)


>그리고 명나라 군대가 형편없는 점에 대해서는 원글과 의견이
>거의 일치하시는 것 같군요. 당나라 군대라? 명나라는 그보다
>1000년이나 뒤에 들어섰는데... 이 나라는 분명 막강한 원나라를 무찌르고
>건국한 겁니다.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국력이 아니죠. 님도 쓰셨지만
>이자성의 반란과 오삼계의 매국이 없었다면 청나라가 절대로
>쉽게 이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정확하게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1. 명이 초기에 보낸 군대는 조승훈, 사유등이 이끌던 5천명의 군대
였고, 평양성을 공격하고 왜군에게 깨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명은
만만히 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병력을 파병합니다.

2. 다음에 명이 보낸 이여송군의 병력은 약 5만명이었습니다. 임란 당시에
왜군의 총수가 20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최종적으로 투입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초기 고니시, 가토등이 이끌고 투입된 군대는 약 5만이 조금
넘었습니다. 평양성에 이르러서 심각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는데, 보급로가
단절되었습니다. 즉, 평양성, 한성 그리고 부산성에 이르는 길이 대단히
멀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뚫었어야 했는데, 이치전투에서 패배,
진주성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실패했구요. 따라서 한성을 점령한
라인을 따라서만 보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병들이
투입되면서 이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구요. 해상으로는 이순신군이 왜군을
연달아 두들겨줬기 때문에, 보급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이여송군이
실제로 왜군과 싸운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니시군은 거의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봐도 됩니다. 또한 명군과 함께 조선군도 투입되었습니다. 대부분
조선군은 투입이 안된 것으로 아시는데, 평양성 탈환작전에서 조선군도 투입
되었습니다. 병력도 죄송하지만, 상당했습니다. 김응서 8천, 정희운 2천,
이일 3천등 대략 1만이 넘었습니다. 사실상 고니시의 군대는 고립과 함께
병력의 열세였죠. 고니시가 후퇴할때 조선군의 공격을 막고자 명군에게
뇌물을 주고 조선군의 진군을 막았습니다. 벽제관에서는 반대의 상황입니다. 
왜군은 고바야카와 2만, 우키다 2만, 고니시 1만이었습니다. 명군이 여기서
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계속 후퇴해서 평양성에만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왜군은 그걸 기회로 권율이 이끌던 조선군을 박살내고자 행주산성을 쳤는데,
외려 박살났죠. 이후 왜군도 전투력의 상실이 컸고, 명도 일단 휴전을 
원해서 휴전이 이뤄졌습니다.

2. 정유재란때 투입된 명군의 수는 상당했습니다. 대략 14만이 넘은 것
같은데, 이는 이여송군의 병력정도로 별 효과가 없다는 판단아래 더 많은
군대를 투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작 정유재란때 중요한 전투에서
명군이 왜군과 싸운 것은 직산전투뿐, 나머지 육전에서 모두 조선군 주도로
이겼습니다. 상당히 황당하실 것 같은데 사실입니다. -.-;; 또한 조선군의
병력도 이미 상당수준이어서, 이원익과 권율이 이끌던 군대만 각각 1만
이었습니다. 이때는 임란때의 의병군을 흡수하여 재조직했기 때문에, 실
병력은 5-6만에 육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3. 따라서 명군의 전투력이 그다지 높게 평가받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명군이 병력수는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기본적인 군의 운용에 있어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조선군은 더하지 않느냐는
비판은 가능합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군이 보여주는 전투력은
명군보다는 더 실전에 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애국심의 발로일지도
혹은 지형에 익숙해서일 뿐이라고 평가할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국력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선에 투입된 명군의 전투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그것을 당나라 군대로 비유해준 것 뿐입죠.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싸우는 군대의 마음가짐이 좋았을리 만무하죠. :)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왕조교체는 일어났을 것 같습니다. 물론 청이 
아닌 한족의 왕조로요. 당시에 이미 명의 체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환관의 전횡 및 각종 무거운 세금등의 백성들 착취로 명이 멸망했을거라는데는 
아웃사이더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다만, 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자성의 왕조가 되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의..


>그리고 임진왜란을 물리친 데는 분명 명나라의 도움이 컸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싶군요.
>우리나라의 왜군 공격을 막은 것도 휴전 협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자기 나라가 힘이 없어서 도움을 청하다가 휴전을 하겠다니까
>갑자기 왜군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이겠다니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견해가 다릅니다.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명군이 없었어도
왜군을 물리쳤으리라 봅니다. 그 이유로는

1. 병력의 분산배치

왜군은 가도멸괵을 실행하려 했는지는 몰라도, 점령후 그곳에 병력을 재배치
한 후 다시 다른 지역을 점령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실수라고
보이는데, 병력의 분산으로 인하여 진격이 거듭되면서 오히려 병력수가
계속 해서 줄어들었습니다. 그덕에 평양성 전투나 가토가 진격한 함경도
방면에서도 병력이 줄어서 고생했죠.

2. 보급선의 단절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의해 육상 보급, 이순신군에 의해 해상 보급이 
차단되었습니다. 또한 부산부터 평양, 함경도 방면에 이르기 까지 보급선이
대단히 길어지면서 효율적인 전투가 불가능했습니다. 이번 이라크전투도
그랬고, 과거 한국전쟁때에도 중국군(예전에야 중공으로 불렀지만..) 임표가
보여준 8식전법은 보급선을 길게 하고 끊은 후 역습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게 의도적이었다면, 백성들을 피난시켜야 했겠죠.
그게 아니었고, 결과론으로 보급선이 길어진 것이기는 합니다. -.-;;

3. 기후와 지형

간첩들이 많이 들어와서 지형을 그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정작 의병들과
싸울때는 지형때문에 번번히 농락을 당했고, 기후도 남쪽지방은 괜찮았으나
북쪽으로 가면서 추위때문에 골치아프게 되었습니다. 평양성 전투는 1월에
있었고, 왜군이 잘 싸울 수 있는 기후가 아니었습니다.

4. 조선군의 재편

처음 임란 초기에 500명의 군대도 모이지 않았으나, 이후 점차 조선군도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전투가 거듭되면서 전투경험도
늘어서 왜군이 점령한 한양에 야습으로 들어가서 전투를 치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평양성 전투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병력수가 점차 증가
되어 상당히 싸울만 했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명군이 없었어도 조선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을지라도요. 사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 왜군의 약화가 시작되었다고 보입니다.




Reference : 왜란 연표(http://www.obu.es.kr/~home/sun/newfile1.html)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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