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arkeb (parkeb) 날 짜 (Date): 2003년 4월 16일 수요일 오후 02시 55분 32초 제 목(Title): Re: 뉴스툰/ 광해군 인터뷰 (2) >왜(일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막부체제로서 호시탐탐 대륙정벌만 노리고 있었소이다. 도쿠가와는 자신의 막부체제를 굳건히 하는데만 신경쓴 것으로 압니다만?? >조정은 참으로 한심했소이다. 1년 전 통신사 황윤길 일행을 통해 ‘명을 >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동인,서인으로 갈려 당쟁에만 정신이 팔려있어 국방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소이다. 동인, 서인으로 갈려서 싸웠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우선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유성룡은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조선의 국력으로 십만의 병사는 유지가 곤란하다라는 것이었지요. 유성룡의 판단으로는 타당한 것입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선조가 더 병신 아닙니까? 또한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의견이 갈린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동서인의 싸움때문만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조선 건국후 200년이 넘게 평화가 지속되었습니다. 설마 전쟁이? 하리라는 것은 지금도 역시나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잘 반증하는 것중의 하나는 김성일은 임란 발발직후 경상도로 자임해서 가서 곽재우등 의병들과의 협력으로 왜군과 열심히 싸웠습니다. 최소한 김성일이 말만 하는 쓰레기 신료들과는 달랐다는 겁니다. 그저 서인을 반대하기 위해서 임란이 없을 것이다 했다면, 그런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은 동서인이 문제가 아니라 선조 즉 현재로써 본다면 대통령, 회사로는 CEO가 말아먹은 것입니다. 조언을 아무리 해도 뭐합니까? 관우죽었다고 동오치는 유비와 마찬가지지. >허나 벽제관에서 패퇴하자 평양으로 돌아 가 움직이질 않았소이다. >오히려 우리 군대가 왜군을 공격하려 들면 기를 쓰고 막기까지 했소이다. >일개 장교가 유성룡같은 고관들에게 수모를 주질 않나,...방자하기 이를 >데 없고 ...한마디로 전투에는 무능하고 약탈에는 만능인 최악의 >군대였소이다. 당나라 군대의 명성은 이전부터 익히 알려진 바입니다. 매초성에서 20만의 이근행이 이끌던 당군이 신라군에게 괴멸된 것을 보면 말이죠. >그렇소이다.누르하치는 만주일대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들을 통일한 후 >후금을 세웠소. 5백년 전에 자신들의 선조가 세워 송나라로부터 >신사봉공을 받았던 금나라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뜻에서 후금이라 칭한 >것인데,그 옛날 금나라 시절부터 ‘여진족이 1만이면 천하가 감당할 수 >없다’며 중국인들이 두려워마지 않던 여진족들이 통일을 했으니 과인은 >‘중국대륙에 다시 한번 왕조를 둘러 싼 전쟁이 있겠구나‘라고 >예견했었소이다. 누르하치가 왜 명을 멸망시킬려고 했는지 아시는 겁니까? 원래 누르하치의 아버지가 이끌던 여진족은 이성량(위에 나오는 이여송의 아버지)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반란을 진압하다가 누르하치의 아버지가 죽었지요. 그때 이성량이 해준 것은 고작 가서 장사나 잘 지내라라고 준 약간의 돈 뿐. 공훈을 인정하기는 커녕, 너희는 그러다 죽는 것도 영광이라는 식의 차별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그 사건을 계기로 명을 원수로 생각한 것입니다. 금의 영광을 다시 찾을건지, 중국인들이 여진족을 두려워한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누르하치의 그 마음은 잘 새겨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소.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당시 2만명의 군사를 파병하겠다고 >거드름을 피워댔던 인물이 오. 후금의 등장으로 과인은 느꼈소이다. 썩고 >무능하기만 한 명나라의 군대가 감히 떠오르는 군대인 후금의 무적 >철기병을 당해 낼 수 없음을 말이오. 무적 철기병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명군이 후금군을 당할 수 없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해석입니다. 명이 멸망한 것은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군을 요청한 것에 기인합니다. 즉,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당시엔 연경)을 점령하자,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이자성군을 물리치자며 청군을 요청했죠. 물론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청군에 투항했습니다. 그덕에 오삼계는 번왕에 임명되었으니까요.(결국은 강희제에게 죽었죠. 삼번의 난을 일으켰지만) 이자성군이 연경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산해관이 쉽게 함락되지 않았을 것 같군요. 더구나 산해관은 소위 만리장성의 시작지점인데, 철기병이 무적인지 는 모르겠지만, 성벽을 철기병이 부술 수 있을지는 장담못하겠습니다. :P >그런데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길길이 날뛰던 신하들의 >아우성이었소. 참혹했던 그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도 안 되었는데 >대의명분과 보은을 위해 젊은이들을 사지로 보내라는 그 >숭명사대주의자들 말이오. >그 신하들은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의 자식들은 전쟁터에 보내지 않았던 >작자들이었소이다. 차마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소. 7년 전란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먹을 것이 없어 풀을 씹어 삼키다 푸른 물을 >토하며 죽는 꼴을 지켜 본 사람으로서는 파병은 도무지 할 짓이 아니었단 >말이외다. 밤을 하얗게 새운 날이 한 두번이 아니었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기막힌 일이지요. 사라예보의 저격병이 쏘는 총알에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전쟁은 멋진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입니다. 다만, 하게 되면 승리를 해야 하지만, 하기 전에는 최대한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건 손자병법의 기본입니다. ---- 제가 아는 역사적 지식(야사도 있을 것입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이성량 과의 관계는 야사일 수도 있습니다.)을 약간 덧붙여드렸습니다. 저는 광해군을 조선 역사에서 뛰어난 왕으로 생각합니다만, 이 인터뷰는 오히려 광해군과 주변의 역사를 오해할 수 있게 한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똑같다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