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obbes (Calvin) 날 짜 (Date): 1996년04월27일(토) 16시06분19초 KST 제 목(Title): Vietnam...(2) 여기서 우리는 월남전(주로 북 베트남군 + 베트콩과 미군과의 싸움을 지칭)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호치민의 사상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왜 몇백만이 죽고 그 이상이 다쳤으며 그 후유증이 월-미-한 삼국을 아직도 흔들고 있는 전쟁을 끝까지 이겨냈는가하는데에 대한 답이 나올수 있을테니까요. 그의 사상적 배경이 어땠는지 약간 설명해 드리면 그는 철저히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자였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티토의 정책과 비슷) 자신의 조국에 대한 모순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한 그는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마침내 항불, 항일, 항미투쟁을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것은 월남인에게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에 의한 혹독한 식민지배를 경험한 그들은 어떤 체제가 되었던 자신들의 나라일에 대해서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을 바랬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농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그걸 대부분 빼앗기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많은 농민들은 항불 게릴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거죠. 이러한 바탕위에 프랑스에게 관용의 정책의 채택을 바랬지만 무참히 거절당하고 마침내 서서히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바꾸죠. 아시아인에 의한 서양세력의 격퇴가 1942년 일본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결국 얼굴만 바뀐 수탈 정책의 계속이었으므로 항불투쟁에 이어 항일 투쟁이 일어납니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간후 월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오고 이어서 월남인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혁명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무시하는 처사로 다시 진주하여 꿈에도 못잊는 기름진 이 식민지를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자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많은 무기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호치민의 게릴라는 프랑스군을 효과적으로 밀어붙여서 결국 1954년 50000여명의 군대로 프랑스의 마지노 요새인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 외인부대, 공수부대등 최정예를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제 프랑스는 더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마침내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가르고 북쪽의 호치민정권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이 전투에서 무려 25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혈투를 벌인 북베트남 군이었지만 서기 980년경 중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자주를 지킨 민족의 긍지를 높였다는 데에서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고 이후 이 지역의 캄란만등 좋은 항구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소련과 중국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기는 지원받았으되 그들의 간섭은 철저히 배재한 호치민의 정책은 그들이 정말로 공산주의를 위한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얼굴을 가진 두 거인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하기위한 이념적 도구로써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뿐 결코 그들 민족의 자주 정통성까지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제 프랑스까지 꺽은 월남은 마침내 식민지에서 벗어난 자주 독립국가를 쟁취하려는 순간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 가고,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가고, 우리는 산다는게 뭔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 고대 로마 격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