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5월 19일 일요일 오후 07시 08분 24초
제 목(Title): 한홍구/ 신문고는 원래 '폼'이었다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2년05월15일 제409호   
 

신문고는 원래 ‘폼’이었다

군대시절 소원수리 떠올리게 하는 청와대 앞 대고각… 조선시대에도 유명무실 


 
사진/ "전시물 거드린 죄." F-15K 선정 반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신문고를 
치려다 경찰과 청와대 경호원들에 의해 연행되는 시민단체 회원들. (한겨레 
탁기형 기자)


5월8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사회가 오랜 
군사독재를 벗어나 문민정권이 들어선 것을 기념하기 위해 김영삼 정권 시절에 
조선시대의 신문고를 본 따 청와대 앞에 큰 북을 걸어놓고 대고각(大鼓閣)이란 
것을 세웠는데, 이 북을 치려고 하던 사람들이 경찰과 청와대 경호원들에 의해 
연행된 것이다.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소속 
회원들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서 곧 단종된다는 F-15K 
기종이 선정되는 것에 반대하는 뜻을 전하기 위해 북을 치려다 체포되었다고 
한다. 


‘신문고’다룬 학술논문 딱 한편 뿐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청와대 앞의 봄 풍경을 즐기고 있던 오전 10시께, 
한 여성회원이 북을 치기 위해 관광객 사이를 뚫고 대고각으로 돌진했지만 
입구에서 경찰에 저지당했다. 잠시 후 또 다른 여성회원이 대고각에 올라 
“F-15K 반대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F-15K 재가를 거부하라”고 외치며 
주먹으로 북을 두번 두드리는 데 성공했지만 사지가 들린 채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 2분 뒤 남자 한명이 다시 북을 두드리며 “F-15K 반대한다”고 
외치고는 또 사지가 들려 끌려갔다. 30여분 뒤에 다시 4명의 회원이 북을 치려 
했으나 강화된 경찰력에 의해 북을 치지도 못하고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30분 사이에 모두여덟명이 겨우 4번 북을 두드리고 끌려갔다는 것이다. 
이들이 현대판 신문고를 치려다 끌려가는 모습은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신문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고, 문화방송의 ‘아주 특별한 아침’에서 보도해 
널리 알려졌다. 또 청와대 게시판은 이들의 강제연행을 비난하는 글들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신문고. 우리는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조선왕조시대의 민의 상달을 위한 
장치라고 배운 이 제도에 대해 묘한 향수가 있다. 인터넷 인구가 2천만에 
육박한다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사이버 공간에는 신문고란 이름의 각종 고발 
사이트가 연이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이 운영하는 
‘인터넷신문고’(http://www.sinmoongo.go.kr/)를 필두로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환경신문고’, 법제처가 운영하는 ‘법령신문고’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외에 여러 시민단체에서도 각각 신문고란 
이름 아래 고발을 받는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교장이 직접 
학생들에게서 애로사항을 듣는 신문고 코너를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운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왕조시대의 신문고는 민주주의와 정보화 시대에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조선시대에 신문고는 어떻게 설치,운영되었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신문고를 표제로 삼은 전문적인 학술논문은 1956년에 한우근 선생이 쓴 논문 
한편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문고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과는 달리 이 
제도가 상대적으로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렇게 신문고에 관한 연구가 별로 나오지 않은 것은 신문고가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별로 활성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문고는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인 태종 원년(1401)에 설치되었다. 처음에 
설치될 때는 중국 송나라 제도의 이름을 따서 등문고(登聞鼓)라 하였는데, 곧 
신문고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문고는 임금된 자는 마땅히 정치의 득실과 일반 
백성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잘 알아야 할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유교의 왕도정치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왕에게 직소할 수 있는 
장치가 바로 신문고인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 왕이 
행차할 때 어가 앞에 나와 탄원하는 것을 금하여 탄원하는 이들을 옥에 가두고, 
주모자를 처벌하는 등 강압적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백성의 
불만을 수용하려는 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상층부 이용… 민초는 엄두도 못내 



 
사진/ 청와대 비서실의 '인터넷신문고'. 사이트를 열면 북이 자동으로 세번 
울리지만 현실에서 북을 치는 일은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신문고가 설치되는 데는 유교정치 이념만이 아니라 왕권과 궁궐의 경계 
강화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작용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혼란기에는 각 
종친과 대신들이 저마다 사병(私兵)을 두었고, 궁궐에 출입할 때도 사병을 
거느리고 위무도 당당하게 입궐한 것이었다. 이렇게 궁궐의 출입에 대한 통제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술하다 보니 전·현직 관료나 
부녀자들까지 무시로 궁궐을 드나들면서 작은 소송이라도 국왕에게 직소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이에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통일하는 한편, 
궁금(宮禁), 즉 궁궐의 출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절차를 밟지 않고 
고소하는 월소(越訴)를 금하였다. 이처럼 신문고의 설치는 한편으로는 시정의 
득실을 살피거나 원정(寃情), 곧 억울한 사정을 듣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인 동시에, 임의로 궁궐에 출입하여 절차를 무시하고 왕에게 직접 고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신문고는 국왕에 직속되는 근위대인 동시에 일정한 범위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구인 순군(巡軍)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순군이 의금부(義禁府)로 
개편되면서부터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순군이나 의금부 
당직청이 궐내에 있다 보니 일반인들이 신문고를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 
신문고를 치는 데에는 엄격한 절차까지 있었다. 

신문고의 기능은 오늘날에 비유한다면 청원, 상소, 고발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내용에 따라 절차가 달랐다. 청원의 경우는 먼저 의정부에 고하고 의정부에서 
왕에게 보고하지 않거나 처리되지 않을 때 신문고를 치도록 되어 있다. 상소의 
경우는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은 
주장관(主掌官·주무관서)에게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러고 나서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두드린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한편 신문고를 통한 고발은 역모의 
고발에 국한된 것으로 이때에는 별도의 사전 조치 없이 즉각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초기에 신문고를 울린 사안들에서 중심적인 것은 노비변정(奴婢辨正)의 
문제였다. 노비변정이란 고려 말기 권문세가의 횡포로 양인이 노비가 된 
사람들의 구제나 권세가에게 자신의 노비를 빼앗긴 사람들한테 원래의 소유권을 
찾아주는 일들을 말한다. 신문고를 통해 하의의 상달을 꾀하려는 원래 취지와는 
달리 노비문제가 신문고를 통한 호소의 주조를 이루자 정부는 여러 차례 
노비문제를 신문고를 통해 직소하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노비문제와 관련하여 신문고를 친 사람은 양인으로서 노비로 떨어진 
압량위천(壓良爲賤)의 경우는 없고, 노비 소유주들인 양반 관료들 간의 분쟁을 
호소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신문고를 친 사람들의 거주지역도 
실제로는 서울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신문고는 본래 취지와는 달리 서울 거주 
문무관료 등 상층부에 속한 자들만 이용하였고, 일반 백성이나 노비 등의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큰 쓸모가 없었다. 어떤 노비는 신문고를 쳐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려다가 관헌의 제지로 치지 못하자 광화문 앞에 걸려 
있는 종을 치고 처벌을 받기도 했다. 한우근 교수는 신문고가 민의창달이라는 
관념적인 아름다운 뜻에 부합되었다기보다는 태종 초에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특수신분층에 은총을 베푸는 한편, 관료의 발호를 억제하는 효용만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신문고의 위대한 후예, 소원수리 


유교정치의 화려한 수사와는 달리 실제로 민(民)의 의사가 공론으로 정치에 
반영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민의 의사가 반영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왕이나 관료들이 이러한 관념을 표방하였다는 사실은 
진일보한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이는 고려시대보다 일반 민의 지위가 
상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의 지위 상승이 곧 적극적인 정치참여권이 
넓어진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 소극적인 의미에서 민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재판을 청구할 권리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여기서 쟁점은 수령이 민에게 
행하는 불법에 대하여 민이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3권이 분리된 오늘날과는 달리 왕의 대리인이자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일차적으로 대변하는 수령은 행정권뿐 아니라 사법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일반 
민이 재판과정에서 억울함을 느끼는 것은 수령의 판결이 부당하게 내려졌다고 
생각할 때다. 수령의 판결에 민이 불만이 있을 때 그에 저항하여 항고하는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 여부는 당시에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었다. 신문고를 
통해서 민이 억울한 사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수령에 대한 고소가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지배층은 피지배층인 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결과 제정된 것이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다. 
당시 조선은 고려 말의 혼란을 겪으면서 일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향리·품관(品官)·토호들의 중간수탈을 배제하고 일원화된 행정체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수령권의 강화를 모색했다. 그 결과 수령과 지방의 토호 
간에는 이해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부민고소금지법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품관이나 토호들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임기말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줄줄이 부정행위로 
구속되는 사례에서도 증명되지만, 수령권의 강화는 수령의 부정을 확대하게 
마련이었다. 세종 초의 재상 허조(許稠)는 수령과 부민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인데 아비가 잘못이 있다고 아들이 아비를 고소할 수 없는 것처럼 수령이 
잘못이 있다 해서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하여 풍속을 두텁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면 탐오한 관리들이 
거리낌없이 토색질을 일삼아 백성들이 피폐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조정 신료들은 ‘강상의 법을 능멸할 수 있는’ 부민의 수령 고소 허용에 
반대했다. 이에 따라 부민이 수령을 고소할 경우 장 100대를 치고 3천리 밖으로 
유배 보낸다는 엄한 형을 주기로 했고, 마찬가지의 논리로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같은 벌을 주는 방침을 정하였다. 백성이 수령을 고소한다는 것은 
신문고를 만들 때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왕이나 유신(儒臣)들은 아주 
‘폼나는’ 제도로 하의상달이라는 미명 아래 신문고를 설치하였지만 민들은 
이렇게 폼만 재는 제도를 용납하지 않고 그 틈을 파고들었고, 그 결과 왕과 
유신들은 부민들의 수령에 대한 고소를 금함으로써 신문고가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소지를 스스로 없애버렸던 것이다. 


상언과 격쟁 용납한 정조의 노력 



 
사진/ 언론개혁 메시지를 담은 연극 <시문고를 울려라>의 한 장면.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권력에 반영되는 길은 조선시대나 현대나 좁기는 마찬가지다. 
(이정용 기자)


조선 초기 신문고는 특정 신분, 특정 지역에 그 이용이 국한되고, 또한 북을 쳐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도 각종 제약을 가함에 따라 민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다. 상언이라 함은 아랫사람이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말하는 것인데 문서로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라면, 격쟁은 왕이 행차할 때 
연도나 궁궐 주위에서 징이나 꽹과리, 또는 북을 울려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억울한 사정을 국왕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명종실록>에 “근래 궐내에 격쟁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신문고가 유명무실화된 
이후 격쟁이 새로운 소원(訴寃)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격쟁과 상언이 빈발하자 정부는 자기가 형벌을 받는 일, 아비와 아들의 관계를 
밝히는 일, 본부인과 첩의 관계를 가리는 일, 양인과 노비를 판별하는 일 등 네 
가지 일에 한해서만 상언이나 격쟁을 할 수 있도록 규제했다. 그러나 이런 
규제조치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민소(民訴)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동안 폐지된 신문고가 부활하고, 격쟁이나 상언할 수 있는 일도 
‘자손이 조상을 위한 일’, ‘부인이 남편을 위한 일’, ‘동생이 형을 위한 
일’, ‘노비가 상전을 위한 일’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자신의 
억울함만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한 조선 초기의 규정에서 벗어나 주변의 억울한 
일도 대신 호소할 수 있게 된 것을 뜻했다. 

특히 정조(正祖)는 민의가 상달될 수 있는 통로를 개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국왕과 백성이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 학자들은 정조대의 이런 노력이 중세의 
민본정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권을 존중하는 근대적 공화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 평가가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재위기간 3207건의 상언과 1298건의 격쟁을 
용납한 정조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조대는 언로가 열린 
민소의 시대였다면, 19세기는 그런 언로가 막히면서 민중들의 불만이 
폭력적으로 표출된 민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제도란 것이 아무리 좋아도 운영을 잘못하면 전혀 소용이 없다. 여러 
조직에서는 하의상달(下意上達)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데 군대에는 
소원수리라는 게 있다.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다음이나, 아니면 상급부대에서 검열을 나올 때면 빠지지 않고 
시행되는 것이 바로 소원수리다. 신문고의 위대한 후예인 소원수리가 실시될 
무렵이면 훈련소에서는 기간병들에 의해, 일반 부대에서는 고참이나 간부들에 
의해 특별교육이 집중적으로 실시된다. 엉뚱한 소리를 썼다간 모두가 고달프게 
되니(군댓말로는 뺑이치게 되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 사전교육의 주요 내용임은 
물론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교육에는 경고뿐 아니라 협박이 따른다. 소원수리가 
무기명이라지만, 나중에 누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다 알게 되어 있으니 
쓸데없는 소리 쓰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소원수리 용지를 나눠주면 전체 내무반원들이 부동자세로 가만히 있는데 볼펜 
들고 끄적이는 사람이 쓴 것임을 누가 모르리오! 


신문고인줄 알았더니 자명고 


청와대 앞에 대고각이 설치된 것은 오랜 군사독재를 벗어나면서 대중들의 
억눌린 언로를 튼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폼나는’ 조치였다. 그러나 
‘폼나는’ 조치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에 자주통일협의회 등의 회원들이 
청와대 앞의 현대판 신문고를 친 것은 시민의 여론을 구중궁궐과도 같은 깊은 
곳에 있는 대통령에게 알리기 위한 역시 상징적인 조치였다. 청와대 경비단은 
‘전시용’으로 달아놓은 북을 치면 어떻게 하느냐며, 이 북은 김영삼 정권 
시절에 달아놓은 것이라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이렇게 ‘미친 척하고’ 북을 
두드리는 행동들이 모여서 제도의 허점과 형식성을 까발리면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다. 

2001년 10월31일에는 경남도청에서 대통령이 지역인사들과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초청인사인 전국농민회 경상남도연맹 강기갑 의장이 예정에 없이 
“드릴 말씀이 있다”며 발언하려다가 입을 틀어막힌 채 끌려나가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런 예정 없는 발언에서 용비어천가가 나올 리는 없으니 경호원들은 
대통령이 듣기에 불편한 말을 사전에 막으려 한 것이다. 이 같은 행동은 전두환 
정권 시절의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이 경호실은 대통령의 육체뿐 아니라 
‘심기’도 경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일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들어가본 청와대의 ‘인터넷신문고’는 접속하자마자 
둥둥둥 스스로 북을 울리고 있다. 신문고인 줄 알고 접속해보았더니 
자명고(自鳴鼓)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엉뚱한 북소리만 울리는 자명고라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난 
5월8일 대고각의 북을 울리려다 끌려간 시민단체 회원들은 자명고를 찢은 우리 
시대의 낙랑공주였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무우를 주세요~!~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