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28일 일요일 오후 05시 01분 39초 제 목(Title): 조철수/ 주몽의 활과 처용의 노래 출처: 이머지 2001.8.1 -------------------------------------------------------------------------------- 연재 / 우리 고대문화의 원형을 찾아서 〈8〉 -------------------------------------------------------------------------------- 朱蒙의 활과 處容의 노래 조철수 활쏘기 한국 고대문화의 오래된 전승으로 이어지는 신화소 가운데 '활쏘기'를 주제로 엮어지는 신화/설화가 많다. 고구려 벽화의 수렵도에 기마 무사들이 호랑이·사슴·토끼 등을 사냥하는 장면을 보더라도 고대 사회에서 활쏘기를 잘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영웅담으로 전해졌을 것 같다(지금도 그렇겠지만). 서기 1세기경의 기록인 《論衡논형》의 2권 吉驗篇길험편에 전해진 부여 건국신화에 의하면 東明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져 버려 추격병은 건너지 못했다. 이리하여 동명은 도읍을 정하고 夫餘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외 《魏略위략》(3세기), 《搜神記수신기》(4세기), 《後漢書후한서》(432년) 列傳 東夷 등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대 한국 민족을 흔히 東夷族이라고 한다. 夷를 大弓으로 破字파자하여 활쏘기를 잘하는/좋아하는 민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고구려의 시조 朱蒙주몽에 관한 전승은 東明의 것과 조금 다르다. 《魏書위서》(554년) 列傳 高句麗에 주몽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부여의 신하들이 그를 살해하려고 하자 주몽은 두 명의 벗을 구하여 동남쪽으로 도망했다. 도중에 큰물을 만나 건너려고 했지만 다리는 없고 부여인들의 추격이 다급하여지자 주몽은 (《東明王篇》(1193년)과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154 평양 등에는 주몽이 말채찍을 하늘로 쳐들고) 물에 고하여 "나는 태양의 아들이고(我是日子) 하백의 외손이다(河伯外孫)…"라고 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올라와 다리를 이루어 그들은 건너가고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져 추격하는 기병은 건너지 못했다. 그들은 보술수에 이르러 거기에 자리를 잡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東明王篇》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오곡종자를 한 쌍의 비둘기가 가져와 좋은 땅에 王都를 세웠다고 말한다. 신라 진성여왕 시절에 弓士 거타지는 중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 맞추어 죽이고 용왕을 구하였으며 용왕의 딸을 얻어 잘 살았다는 전승이 있었으며 이와 비슷하게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도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잘 하여 사람들이 그를 神弓이라고 불렀다. 그도 여래상으로 둔갑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였으며 용왕은 그의 딸과 함께 보화를 그에게 주어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장차 태어날 왕건의 큰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제주도의 '천지왕본풀이'에 의하면 하늘에 해와 달이 두 개씩 떠있어 사람들은 괴로웠는데 착한 형이 천근 활과 천근 살을 마련하여 하나씩 쏘아서 각기 동해와 서해로 떨어뜨렸다. 그래서 해도 하나, 달도 하나씩 뜨게 되었고 살기 좋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 한국의 '활쏘기' 전승은 새로운 곳으로 가서 도읍지를 건설하는 영웅담의 신화소이며 악의 세력을 쫓아내고 고난 당하는 이를 구한 공적으로 보화를 얻어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는 邪進慶벽사진경의 이야기이다. 사슴과 사냥꾼 인류의 문명사에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 방법이 개발된 것은 신석기 시대에 와서 이루어지며 이 시기에 활쏘기를 잘하는 사람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신화를 이야기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후대 문헌에서 그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신석기 시대 암각화에서 사냥꾼이 활을 쏘는 장면을 자주 본다. 십자 모양 혹은 동그라미 안에 꽃무늬로 표현한 태양을 사슴이 그의 등이나 혹은 두 뿔 위에 얹고 달아나며 그 뒤에서 사냥꾼이 활을 들고 쏘는 장면이 있다(그림 1). 이것은 사슴이 저승에서 태양신의 딸을 취하여 저승 밖으로 도망 나올 때 저승신이 사슴을 쫓아와 활을 날려 그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이야기이다. 후대에 전해진 '사슴과 사냥꾼'의 신화이다. 이러한 신화소는 舊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두루 퍼져있으며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전해진다(舊유럽은 현재 흑해 위쪽 지역을 가리킨다). 고대 한국의 암각화 자료는 수효가 그다지 많지 않으며 시대적으로 변천한 과정을 추정하기가 어렵다. 다만 경상도를 중심으로 분포되어있는 적은 수량의 암각화가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데 암각화에 보여지는 작은 단위의 여러 무늬는 舊유럽과 중앙 아시아 지역의 신석기 시대의 상징 무늬와 보편적으로 비슷하다. 특히 울산 천전리 암각화의 많은 마름모 물결 무늬, 동심원, 연못과 사슴, 사슴 뿔 위에 동심원 그림, 작은 동물들과 꽃 모양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남자, 뱀 모양과 그 옆에 마름모 모양의 연못 등 몇몇 집합 그림은 고대 근동 상징 체계와 유사하다.1) 천전리 암각화의 오른쪽에 그려진 연못과 사슴, 사슴 위에 활과 화살이 나온다(그림 *). 또한 그 옆 그림이 사슴 뿔 위에 동심원 태양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면 사슴이 그의 뿔 위에 태양신의 딸을 태우고 도망가는 광경이라고 볼 수 있으며, 활시위에 위협받는 사슴이 연못가에 서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슴과 태양과 활쏘기'라는 주제로도 고대 한국 문화와 신석기 시대의 舊유럽 문화 사이에 연속성을 볼 수 있다. 主權의 상징 청동기 시대에 사회 체계가 재정비되며 도성사회로 전환되면서 활이 지니는 의미도 단순히 사냥하는 활의 용도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발전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생성된 신화에서 그 내용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사냥과 전쟁의 도구로 활·화살뿐 아니라 창·칼·몽둥이 등이 사용되었지만 활과 화살이 왕권과 주권의 상징물로 선택된 경우가 많다는 것은 활쏘기가 창이나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 유용하거나 위협적이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영웅이 창이나 칼로 적장을 찌르는 장면은 암각화나 원통형 인장에서 볼 수 있다. 종교적 표현으로도 북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전쟁 신 바알처럼 칼 또는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신상을 볼 수 있으며 앗시리아 제국의 최고신 앗슈르나 힛티 왕국의 태양신처럼 활시위를 당기는 신상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활은 중요한 제의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 바빌로니아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광경을 볼 수 있다. '태양의 송아지' 神 마르둑은 신들을 대표하여 바다의 용 티야마트와 대결한다. 마르둑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티야마트를 잠재워 죽이고 그 시신으로 세상을 만들어낸다(본지 2001년 6월호. 참조). 세상의 중심지 바빌론에 神들의 門('밥-일리')에 신전을 세우고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푼다. ('bab-ili'를 그리스어로 음역하여 통용되는 것이 바빌론Babylon이다). 이때 신들의 아버지 하늘 신은 활을 들어올리고 신들 앞에서 맹세를 한다. 에누마 엘리쉬의 여섯째 토판에 쓰여진 단락을 읽어본다. 主(마르둑)는 그의 어버이 신들을 축하연에 초대했다. "이것이 '神들의 門', 당신들의 거처입니다. 여기에서 즐거워하고, 기쁘게 지내시오." 신들은 앉았다. 술잔을 올리고, 축하연에 자리 잡았다. 그들이 그 안에서 향연을 가진 후에 찬란한 에싹일라에서 제의를 행하였다.2) 모든 전례와 예의는 확실하였다. 모든 신들은 하늘과 땅의 설 자리를 나누었다. 오십 큰 신들은 자리를 잡았다. 운명을 결정하는 일곱 신들이 심판 내릴 것임을 확인하였다. 主는 그의 무기인 활을 집어 그들 앞에 놓았다. 그의 어버이 신들은 그가 만든 網을 쳐다보았다. 활이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졌나 그들은 보았다. 그의 아버지 신들은 그가 한 일들을 칭찬하였다. 아누는 그것(활)을 들어올리고 신들의 모임 앞에서 말하였다. 그는 활에 입맞추고, "이것은 내 딸이 될 것이다." 그는 활에 이름을 주었다. 이것이 그 이름들이었다. "'긴 나무'가 첫째일 것이며 '승리자'가 둘째일 것이다." 셋째 이름은 하늘에 빛나는 '활 별'이 될 것이다." 그는 그 형제 신들 사이에 그것(활)이 설 자리를 정해 주었다. 아누가 활의 운명을 결정한 후에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왕좌를 주었다. 아누는 신들의 모임에서 그(마르둑)를 거기에 앉혔다. 큰 신들이 모였다. 그들은 마르둑의 운명을 가장 높게 하였으며 그들 자신들도 엎드렸다. 그들 스스로 저주를 외쳤다. 물과 기름으로 그들은 맹세하였고 그들의 목에 발랐다.3) 그래서 그들은 그가 신들의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主權이 있다고 확인하였다. 하늘신 아누가 활을 들어올리고 신들에게 마르둑이 '신들의 왕'이라고 알리는 의례이다. 에누마 엘리쉬는 매년 신년 축제일에 행했던 국가 행사였으며 바빌론 가운데 있었던 마르둑 신전 앞에서 대사제가 활을 들고 마르둑의 주권을 만민에게 천명하는 종교적 연례행사였다. 천 여 년이 넘게 이러한 신년행사를 거행했던 바빌로니아의 문화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활'의 신화소는 주변 문화에서 주목되는 주제이다. -------------------------------------------------------------------------------- 1) 조철수, "정보의 발생과 그림문자, 그리고 울산암각화의 상징체계," 《울산암각화 발견 30주년 기념 암각화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예술의 전당, 2000, 63∼71쪽. 2) '에싹일라'는 마르둑의 신전으로 그 뜻은 '머리를 드높이 신전'이다. 3) 만일 맹세를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며 목이 잘릴 것이라는 뜻으로 행하는 몸짓이다. 계약의 징표 히브리성서에 기록된 창세기의 태초신화인 '창세와 아담에서 홍수와 노아까지의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의 여러 창세신화를 소재로 새롭게 각색된 부분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그 가운데 홍수 신화의 마지막 부분에 활을 주제로 엮어지는 단락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사람들이 부정하게 되었다고 사람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온전한 義人 노아와 그의 식구들만 제외하고 모두 없애버리기로 판단했다. 하늘의 洪水門이 열리고 물이 솟아지자 온 땅의 사람들은 큰물로 사라졌다. 오직 방주에 탔던 노아와 그의 식구들 그리고 방주에 태웠던 온갖 쌍쌍의 동물들만이 홍수에 살아남게 되었다. 물이 줄어들고 땅이 보이자 노아는 밖으로 나와 야웨 하느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온갖 淨한 기축과 淨한 새를 택하여 번제물로 올렸다. 야웨 하느님은 즐거운 냄새를 맡고 다시는 사람 때문에 흙을 더 저주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시는 땅을 휩쓸어 버리는 홍수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창세기 9:12∼17).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영원한 세대에 함께 있는 온갖 살아있는 생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징표이다. 나는 나의 활을 구름에 세울 것이니, 나와 땅 사이에 계약의 징표가 될 것이다. 내가 땅위에 구름을 끼게 할 때 활이 구름에 나타날 것이다. 나는 나와 너희와 그리고 살(肉)로 살아 있는 온갖 생명 사이에 내 계약을 기억할 것이며,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온갖 살을 휩쓸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활이 구름에 있을 때 나는 그것을 볼 것이며, 하느님과 땅위에 있는 살(肉)로 살아 있는 온갖 생명 사이에 세운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나와 땅위에 있는 온갖 살(肉) 사이에 세운 계약의 징표이다." 사람들이 사악하다고 하여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하느님의 계약의 징표로 구름 사이에 비치는 활을 내세우는 광경이다. 구름 사이에 나타나는 활을 흔히 무지개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이 단어(히브리어로 케쉐트)가 활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오히려 天弓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도하는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전승도 이해할 수 있다. (다행히 영어의 rainbow로도 그 맥락을 잡을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홍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활은 그 상황이 다소 다르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전통성을 보여준다. 활은 계약/맹세의 상징물로 사용된다. 특히 에누마 엘리쉬에서도 알려주듯이 활은 하늘신과 신들 사이의 계약이며 이스라엘의 홍수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유일신과 그 신이 선택한 의인 사이의 계약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사관에 의하면 노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세대/공동체가 이루어진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활로 맺는 계약은 새 창조의 징표이다. 이스라엘의 홍수 이야기 다음으로 곧 연결되는 단락은 노아가 흙을 일구어 포도밭에 포도를 심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했다고 이야기한다. 활로 맺은 계약 이후에 포도주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 에누마 엘리쉬에서도 활을 걸고 약속하는 것은 축하연회장이다. 마르둑이 신들의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이다. 마르둑이 어둠의 세력을 쫓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것을 기뻐하는 축하연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매년 빛의 신(태양신)이 어둠의 세계를 물리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신년행사에 창조 서사시를 낭송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묵은 한 해를 보내고 경사스러운 새 해를 기대하며 맞이하는 축제이다. 이러한 신년축제에 활이 그 매개체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민족사가들은 좀더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구름 사이에 낀 활/무지개를 볼 때마다 사악한 사람들을 없애버린 홍수를 상기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깨달으며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활은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내며 새 시대에 즐거운 잔치를 베푸는 상징이다. 處容의 춤과 노래 사악한 힘을 물리치고 도와준 공적으로 보화를 얻어 행복한 삶을 누렸다는 신화/설화는 인류 보편적이다. 위에서 읽은 몇 예에서처럼 활쏘기를 잘하여 악의 세력을 제압하는 경우도 있고 활이 상징적으로 악을 누르고 승리한 매개체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활시위를 당기는 태양신이나 앗슈르신이 승리자의 표상으로 옛날부터 통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몽처럼 활쏘기를 잘하여 왕권을 차지하고 오곡 씨앗을 심어 풍요한 나라를 건설한 왕으로 추모 받거나 작제건처럼 활쏘기를 잘하여 용왕의 딸을 아내로 취하고 보화를 얻어 고려 태조의 조부 역할을 충분히 잘한 인물로 역사에 남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춤과 노래로 사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하는 전통도 고대 한국 문화에 강하게 흐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처용의 춤과 노래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진 처용 이야기는 학교 교과서 등에 매우 잘 알려졌으며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여지도 많다. 특히 鄕歌 處容歌의 해석 문제는 국문학자뿐 아니라 인문학자의 관심도 높으며 처용에 대하여 민속·연극·무용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처용의 기본 줄거리는 이렇게 구성할 수 있다. 헌강왕 때 나라 안은 악기와 노래 소리가 거리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이 개운포로 놀러갔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영문을 물으니까 동해의 용이 변괴를 부리는 것이라고 하여 왕은 근처에 용을 위하여 절을 세우게 했다. 용왕은 기뻐 그의 일곱 아들과 함께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왕의 덕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하나가 서울에 들어와 왕을 도와 춤과 노래로 疫神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는 일을 도모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용왕의 아들이 처용이다. 이 이야기에 處容歌가 끼어 단막극의 극치를 이룬다. 처용의 아내는 무척 아름다웠으며 역신이 흠모하여 어느 날 사람의 모습을 하고 밤에 그의 집에 이르러 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스스로 물러났다. '東京 밝은 달에 밤들이 놀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더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러자 역신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빌며 다시는 처용의 모습만 보아도 그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물러났다. 이래서 처용의 形容을 대문에 붙여놓아 邪進慶벽사진경을 기원하는 관습이 생겼다는 이야기이다. 실상 처용은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며 춤과 노래로 악귀를 쫓아 동네 집안에 평안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진 처용의 등장을 《삼국사기》 卷11 신라본기 헌강왕 5년조의 기록에서 아래의 대목과 비교한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나타나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모습이 이상하고 옷차림도 남달랐다는데 당시 사람들이 山海精靈이라고 했다." 이 내용과 삼국유사의 처용 이야기를 대조하여 보면 네 사람들 중에 하나가 바로 처용이며 그가 헌강왕을 도와 재앙을 물리치고 나라를 평안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배적이다. 처용은 龍子이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옷차림도 다르고 모습이 이상했다는 것은 그들이 외국인임에 틀림없으며 '용왕과 일곱 龍子들'이 개운포 해변가에 나타나 춤과 노래로 왕을 즐겁게 하였다는 것은 배타고 들어온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집필된 《악학궤범》(1493년)의 처용가에서는 처용을 '深目高鼻'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인물'로 묘사했다. 처용에 대한 자세한 전승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사서에 '深目高鼻'는 西域人을 가리키는 통상어이다. 헌강왕 시절이면 신라와 무역왕래가 잦았던 아랍무역상인들과 연관되며 아마도 龍子들은 그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춤과 노래로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을 평안하게 해주는 직업인들 같다. 처용은 춤과 노래로 악령을 쫓아내고 치유해주는 직업을 가진 서역인 驅魔司祭였다고 볼 수 있다. 초점은 사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평안을 가져오는 방법으로 활쏘기가 아니라 춤과 노래라는 매개체의 등장이다. 다윗의 춤과 노래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춤과 노래로 악령을 물리치고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을 한 인물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다윗이라는 인물의 전승이 얼마나 강한지 유대인들뿐 아니라 서양인들 가운데 다윗(다비드)의 이름을 가진 사람의 수효는 가히 짐작하게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다윗을 주제로 한 그림이나 조각 등도 또한 많다. 서양 세계의 종교가 그리스도교이었기 때문에 구원자 예수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명칭으로 더욱더 다윗은 유명해졌을 것이다. 다윗은 수금과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전해지고 그가 작사한 노래만도 3천개가 넘는다고 유대교 전승에 말한다. 다윗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야웨 하느님을 기쁘게 했다고 전한다. 역사적 다윗은 노아처럼 그렇게 온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때려눕힌 용맹한 소년이었고, 분노에 어쩔 줄 모르는 사울 왕의 마음을 노래로 달래주는 정다운 청소년이었으며, 청년 다윗은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긴 '야웨 하느님의 계약궤'를 탈환한 용사이고, 예루살렘에 '야웨의 집'(성전)을 짓기로 마음속에 다짐하고 계약궤를 시온산으로 옮겨 놓은 영도자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萬民의 門'으로서 순례객들의 본향이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하고 그 여자의 남편(다윗의 부관)을 死地에 홀로 남게 하여 죽음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며, 미망인이 된 그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삼은 인물이었다. (더욱 더 그녀에게서 낳은 아들 솔로몬이 다윗을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 절대 계명을 어긴 사람으로 돌로 맞아 죽어야 할 사람이었고 비록 다윗이 예언자 나탄에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였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분노를 면치 못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天壽를 누리고 복 받은 자가 되었다. 다윗(다비드)은 이름 그대로 '사랑 받은 이'라는 뜻이다. 운명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좋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다윗의 위대한 업적은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통일한 것도 있지만 예배자로서 하느님을 위해 수많은 시편을 만들었다는데 있다. 다윗이 남과 달리 하느님의 눈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청소년 시절에 사울 왕 곁에서 왕의 시중을 들었을 때 일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울에게 와서 그를 시중들게 되었는데, 사울은 다윗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자기 武器兵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새(다윗의 아버지)에게 사람을 시켜 일렀다. "다윗이 내 눈에 드니, 내 앞에서 시중들게 하여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靈이 사울에게 있을 때에 다윗은 수금을 들고 손으로 타서 사울에게 바람을 일으켜 사울은 편안해지고 악령은 물러갔다'(사무엘상 16:21∼23). 청년이 되가는 나이의 다윗에게는 수금을 타며 노래를 불러 악령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악귀에 홀려 분노에 찬 사울 왕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수금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呪文/기도문이다. 다윗이 계약궤를 시온산으로 옮겨갈 때 온 군중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했다. '야웨의 궤를 맨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찐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다윗은 아마포 司祭옷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야웨 앞에서 춤을 추었다'(사무엘하 6:13∼14). 다윗은 사제 옷을 입고 제단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하느님을 즐겁게 하였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온산에 하느님의 궤가 놓이기 전에 (다시 말해서, '야웨의 궤가 여섯 걸음을 옮기자' 즉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그 가는 장소를 깨끗이 하여야 한다. 다윗은 사제복을 입고 춤을 추며 그 땅의 악령들을 쫓아내는 정결례를 행한 것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이러한 정결례는 구마사제들이 맡아서 일정한 규례에 따라 찬물을 뿌리거나 횃불로 땅을 지펴가며 의식을 진행했다. 정결례를 마친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시온산에 준비한 천막에 들여놓고 제단에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바쳤다. 제물을 바친 다음에 야웨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과자 한 뭉치씩 나누어주고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갈 때 춤과 노래로 驅魔儀式을 행하였으며 궤가 정해진 곳에 놓이자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과자 한 뭉치씩 주어 계약의 궤가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것을 경사로운 일로 알렸다. 이처럼 처용의 춤과 노래는 다윗의 춤과 노래와 같은 맥락( 邪進慶)에서 이해될 수 있다. 大門에 붙이는 呪文 처용 이야기에서 처용의 권능에 눌린 疫神은 이렇게 말한다: "맹세코 이후로는 公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見畵公之形容) 그 門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不入基門矣)"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다 처용의 모습을 붙여(國人門帖處容之形) 邪鬼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했다( 邪進慶). 처용의 얼굴은 주술적 기능을 하며 대문에 주술적 능력이 있는 매개체를 붙여놓음으로 악귀를 막는 관습을 말한다. 역신이 사람들을 괴롭히러 거주지를 배회하며 다니다가 그 문을 보고 지나간다는 풍습이다. 처용이 역신을 물러가게 하는 춤과 노래는 고대 근동 문화와 비교하면 주문을 낭송하는 것이다. 악귀를 막는 처용의 모습은 일종의 呪文 역할을 한다.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주문을 낭송하여 악귀를 좇아내는 풍습은 일상적이었다. 神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매개체 가운데 하나는 呪文이며 고대 근동 문화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의례는 구마사제가 지하수 신 엔키의 대리인으로 주문을 낭송하는 것이다. 악령의 저주와 잡귀들의 악행에서 치유되기 위해 구원의 신 엔키가 구마사제를 환자에게 보냈다고 말한다(엔키에 관하여 본지 2001년 2월호 참조). 그래서 엔키의 거룩한 말씀/주문은 구마사제의 주문이며, 엔키의 주문을 통하여 악신에게 붙들린 생명이 淨化되며 악귀의 속박에서 풀릴 수 있고 결국 인간이 깨끗이 되며 빛나게 되고 거룩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 준다. 구마사제는 귀신에 붙잡힌 사람에게 주문을 읽고 그의 집에서 악신을 몰아내고 다시는 그의 집에 넘나들지 말라고 엔키의 주문을 문지방에서 낭송했다. 아래에 번역한 고대 바빌로니아 주문에서 알 수 있다. 구마사제가 이렇게 쓰여 있는 주문을 읽는다. 악한 유령, 악한 저승使者, 惡神, 악한 저승差使, 그들은 악하다. 내 몸에 가까이 오지 말라. 내 눈 앞에서 악한 짓을 하지 말라. 내 뒤를 따라오지 말라. 내 집에 들어오지 말라. 내 집 지붕으로 넘나들지 말라. 내가 거주하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 하늘에 목숨을 걸고 맹세할 것이다. 땅에 목숨을 걸고 맹세할 것이다. 이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구마 전통 의례에서 발전된 대표적인 예를 고대 이스라엘의 과월절Passover 명절예식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구출하려고 이집트에 내린 재앙과 관련되는 이야기에 전해진다.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임무를 짊어진 모세와 아론 형제는 이집트 왕에게 이스라엘인들을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집트 왕의 마음은 완고하여 거부하자 열 번의 재앙이 내린다. 그 마지막 재앙에서 야웨 하느님은 이집트인들을 치러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이때 이스라엘인들의 집과 이집트인들의 집을 구별하기 위해 야웨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의 피를 이스라엘인의 집의 상인방과 두 문설주에 발라 놓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야웨는 그 문에 바른 피를 보고 넘어 지나갈 것이며 파괴의 천사가 그 집을 치러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래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도망 나오게 되었고 이스라엘인은 이 해방의 날을 기념하여 매년 과월절 예식을 행하며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넘어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 주셨다"라고 말하며 기억하는 명절예식을 행했다(출애굽 12:21∼27). '파괴의 천사'는 '죽음의 천사'를 가리키며 '재앙, 역병, 천벌' 등을 일으키는 疫神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역신이 대문에 뿌려진 짐승의 피를 보고 지나간다는 풍속을 역사적 사건으로 전이한 과월Passover 신화이다. 이와 같은 전승과 관련되어 생겨난 이스라엘인들의 관습이 문이나 문설주에 토라(모세오경)의 구절을 붙여놓아 악령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토라의 구절을 조그만 양피지에 써서 팔에 징표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이고 기도하였다(신명기 6:8∼9).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렇게 한다.) 神의 말씀을 몸에 부착하여 악령의 기운이 몸에 붙지 못하게 막는 주술행위이다. 대문이나 이마에 붙인 성서구절이 呪文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문을 생활화한 고대 이스라엘인/유대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복 받고 오래오래 살 것을 염원하는 데 있다. 아래 구절에서 읽어본다(신명기 11:18∼21).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정신에 새기고. 너희 손에 징표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또 이 말씀을 너희 자녀에게 가르쳐 주어라. 네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씀을 일러주어라. 그리고 그것을 너희 집의 문설주와 대문에 써 놓아라. 그러면 야웨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들과 너희 자손들의 날들이 땅 위에 있는 하늘의 날들처럼 많아 질 것이다 이스라엘인/유대인들의 경우는 善神의 거룩한 말씀/주문을 문에 붙여놓아 악령의 접근을 예방하는 것이며 처용의 경우에는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여 역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대문에 부착하는 방법이외에도 공통적인 것은 악귀를 방지하고 慶事스러운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헌강왕 시절에 배를 타고 입국한 서역인 처용의 신분은 이처럼 고대 근동 문화의 전승에서 이해될 수 있다. 龍子들이 아랍 무역상들과 함께 돌아다니던 구마사제들이었다고 가정한다면 대문에 주문/성서구절을 붙이거나 과월절 제의 등 유대교 관습을 잘 아는 종교집단의 구성원으로 想定할 수도 있다. 또한 동방 그리스도교의 여러 집단에서도 많은 주문을 만들어 주문책 표지나 가운데에 천사나 사람의 얼굴 그림을 그려 넣어 치유, 저주, 보호, 求愛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아래의 주문은 콥트語Coptic로 기록된 것이며 서기 2∼3세기에서 11세기경까지 사용되었던 주문이다. 콥트어는 이집트 그리스도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콥트어는 서기 1세기경부터 사용되었으며 고대 그리스 문자를 차용한 것이다. 콥트 그리스도교Coptic Christian는 매우 오래된 그리스도교 가운데 하나이다. 아래에 인용한 이 주문책에는 수호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콥트 그리스도교의 주문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주문에도 이와 같이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이 주문과 함께 자주 그려져 있다. 아래 주문은 사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권능을 간원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주문으로 모두 21장의 파피루스에 기록된 문헌이다.4)(그림 *) 오늘 나의 말을 들으시오.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영원하신 분이여! 모든 천사들의 이름 가운데 첫 번째 분이시여! 모든 천사들과 대천사들은 나의 말을 들으시오. 모든 精靈들이여, 나에게 무릎 끓으시오. 이곳에 있는 자들이여, 빨리! 이것은 만군의 하느님의 뜻입니다. 나를 도와주는 거룩한 천사들이여 나를 도망하게 해주십시오, 나의 적들에게서. … 천사 가브리엘이여, 나는 당신에게 기원합니다. 사자의 얼굴, 황소의 얼굴, 독수리의 얼굴, 사람의 얼굴을 그린 네 모습으로. 당신은 오늘 나에게 옵니다. 주문: 나는 오늘 당신에게 기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여 아버지의 발 밑에 있는 이 주문으로. 하늘과 땅에서 수 천만 명이 두려워하는 앞에서. 당신은 나에게 옵니다. -------------------------------------------------------------------------------- 4) 이 텍스트는 M. Meyer & R. Smith, 《Ancient Christian Magic, Coptic Texts of Ritual Power》, HarperSanFrancisco, 1994, 133∼146쪽에 있다. 疫神이 물러갔다 처용의 이야기에서 역신은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며 처용을 시험한다. 처용의 노래(處容歌)에 놀란 역신은 자기가 졌다고 물러난다. 흔히 위에서 인용한 주문이나 성서 구절에서도 보았듯이 구마사제는 사악한 세력을 퇴치하는 것이 임무이다. 처용의 설화에서도 邪벽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듯이 처용의 화상은 邪鬼를 물리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역신과 처용의 담판에서는 처용이 역신을 물리치거나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역신이 스스로 물러난다. 고대 근동 구마의례의 수 천년 전통에서 구마사제는 악령을 쫓아내었지 악신이 구마사제에게 스스로 졌다고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악신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힘/꾀에 의해서 쫓겨나는 것이 고대 근동 문화의 정형이었다. 그러나 악신이 스스로 포기하고 물러나는 종교적 단막극Religious Happening이 서기 1세기 초대교회 문헌에서 읽을 수 있다. 새로운 인식이 생긴 것이다. 복음서에 전해진 사탄이 예수를 시험하는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다. 고대인들은 세상에 지옥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옥이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등의 단순한 의문에, 혹자는 지상낙원의 정반대가 지옥이라고도 묘사한다. 지옥은 살기에 무척 괴로운 곳이며, 지옥의 使者는 그곳으로 끌고 갈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전해진다. 성서에서는 그 지옥의 사자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이 사탄이 예수를 시험한 이야기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귀신들이 방황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 대표적인 예로 매년 속죄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었던 제의에서 볼 수 있다. 제2성전 시대(기원전 5세기경에서 서기 70년까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속죄일에 똑같이 생긴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하나는 성전의 희생제물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염소로 선포하여 광야로 내쫓아 보냈다.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아자젤에게' 보낸다고 말한다. 아자젤은 '험한 산, 광야' 등을 뜻하며, 예수 당시의 히브리어로 '지옥'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염소는 죄인으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들게 되며, 지옥으로 끌려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그곳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하고 있는 예수에게 악마/사탄이 다가 와서 이렇게 유혹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악마는 자신의 꼬임에 예수가 흔들리지 않자 그를 거룩한 도시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몸을 던지시오"라고 말한다. 예수는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고 기록된 히브리성서의 구절을 인용하며 악마의 주술에 대응한다. 악마는 다시 한번 그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유혹한다. 이 때에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너는 가라, 사탄아! 이렇게 쓰여 있다: '너는 하느님이신 主에게 절하고 그분을 홀로 섬겨라.'" 그래서 악마는 그분을 떠나갔고 천사들이 다가와서 그분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마태 4:1∼11). 사탄이 예수에게 보여준 왕국의 영광은 '영광의 옥좌'이며, 그 자리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앉을 곳이었다. 사탄의 유혹은 만일 예수가 자기의 권능이 하느님의 권능보다 강하다고 말한다면 지옥에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는 예수로 하여금 십계명의 1∼2계명을 범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신성모독죄로 지옥에 보내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신명기 6:4과 6:13의 문구 "그분을 홀로 섬겨라"는 인용구로 그 응답을 하였으며, 사탄은 포기하고 돌아간다. 복음서에 잘 반영되었듯이 예수는 귀신에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구마사제였다. 구마사제는 악신을 쫓아내는 것이 정수이다. 예수는 사탄에게 "너는 가라, 사탄아"라고 말하였지 사탄을 주문이나 힘으로 쫓아낸 것은 아니다. 또한 사탄이 예수를 떠나갔다고 복음서에 전한다. 복음서에 예수가 사탄을 쫓아냈다고 기록하지 않고 사탄이 떠났다고 말하는 점이 중요하다. 악신이 물러간 것이다. 예수 당시 예수 공동체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비슷한 공동체 생활을 운영한 엣세네Essene파의 규례에 메시아는 악마(벨리알)의5) 시대에 세 가지 덫에 걸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석했다('새 계약의 규례' 4:13-18).6) 이 기간 동안에 벨리알(악마)이 이스라엘에 퍼지며 그때 하느님께서 아모쯔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한다: "두려움과 함정과 올가미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이 땅의 거주민들이여!"(이사야서 24:17). 그 해석은 벨리알(악마)의 세 덫이다. 그(악마)는 그것들을 정의의 세 종류로 준다며 이스라엘을 붙잡는다고 야곱의 아들 레위는 말했다. 첫째는 간음 둘째는 재산 셋째는 성전 모독이다. 이것에서 피한 자는 저것에 붙잡히고 저것에서 구제된 자는 이것에 붙잡힌다.. 이 단락과 복음서에 전해진 메시아 예수의 시험을 비교하면 '간음'에 해당하는 것은 악마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내용이다. 히브리성서에 이스라엘 백성이 야웨 하느님 이외 다른 신에게 예배드리는 행위를 간음했다고 비유한다. '재산'에 대한 것은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는 유혹이다. '성전 모독'은 악마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시험한 단락과 대조된다. 예수와 악마의 논쟁에서 악마는 일단 물러났지만 끝내 예수를 속임수에 걸리게 한 것은 이 세 가지 중에 성전모독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성전을 헐어 버리고 사흘만에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며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성전모독이고 이것으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처형되게 된다. 사탄과 예수의 논쟁과 역신과 처용의 대담을 비교하여 본다.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범한 것은 간음이다. 역신이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여 아내를 취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처용의 집(재산)을 빼앗아 가는 격이다. 처용이 구마사제였다고 본다면 그의 거처는 거룩한 영역이다. (아마도 그의 집이 祠堂이였을 것 같다.) 역신이 그의 거룩한 집/사당에 들어와 음행을 저지른 것은 성전모독이다. 처용에게서 치유자 예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역신이 처용을 유혹하는 단막극에서 사탄이 예수를 유혹하는 소재를 이렇게 읽어 본 것이다. 극적 상상력을 통하여 신화를 읽는 방법이며 또한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을 찾아 헌강왕 시대의 처용의 세계를 엮어 본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단순히 문학적 비교해석으로 얻어지는 것만은 아니고 통일신라 말기에 서역과의 문화적 교류의 근간이 분명히 조성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아랍무역상뿐 아니라 유대인들과 동방 그리스도교 또는 마니교 같은 혼합 종교 집단의 포교자들이 동방으로 진출하였다는 것은 한국의 고대문화 형성에 간과할 수 없는 과제이다.) -------------------------------------------------------------------------------- 5) 신약성서에 악마의 이름인 벨리알이 한 번 나온다: "빛과 어둠이 어떻게 짝지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벨리아르와 어떻게 화합을 하겠으며, 믿는 자가 안 믿는 자와 어떻게 몫을 나눌 수 있습니까?"(고린도후서 6:14∼15). 6) 안성림/조철수 역주, 《사해문헌(死海文獻)》(1), 한국문화사, 1996, 21쪽. 무우를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