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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21일 일요일 오전 06시 50분 36초
제 목(Title): 이정우/ 피에트 몬드리안 


출처: 한겨레 21


[ 이정우의 철학카페 ]  2002년04월17일 제405호   
 

초월적 그림은 리듬을 타고…

이정우의 철학카페 25 l 피에트 몬드리안 

영혼에 다가서는 미술 언어 추구… 물질성·운동성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 



 
사진/ <검정과 흰색의 구성 No.10:부두와 해양>(1915). 캔버스에 유채, 
85×108cm, 오테를로, 크뢸리-뮐러 미술관.


몬드리안의 그림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들- 예컨대 <빨강, 
회청색, 노랑, 검정, 파랑의 구성>(1922)- 을 보면, 같은 추상회화라 해도 
칸딘스키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칸딘스키의 추상회화는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무엇인가를 연상시킨다. 그의 회화를 채우고 있는 
기표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뜻한다. 즉 기의를 가진다. 그것도 기표(무엇인가를 
뜻하는 표지들)와 기의(표지들이 뜻하는 바) 사이에는 거의 일대일 대응이 
성립한다. 그러나 몬드리안의 그림은 연상시키는 바가 없다. 물론 예컨대 
빨간색을 보고서 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정확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피란 좀 이상한 피일 것이다. 창문으로 보기에는 너무 투명하지 않다. 요컨대 
몬드리안의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특정한 기의와 아무 관련 없는 순수한 
기호 그 자체이다. 칸딘스키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연상시키는 
‘아이콘’이었다. 몬드리안에게 그림이란 순수한 기호이다. 


특정한 의미 없는 순수한 기호들 


화면은 두터운 검은 윤곽선들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그 두텁고 검은 
윤곽선들은 루오의 그것들과는 판이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투박하면서도 질적 
역동성을 담고 있는 루오의 윤곽선과 달리 몬드리안의 그것은 차갑고 
이지적이다. 마티스적인 화사함이나 폴록적인 역동성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갑갑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화면을 몇개의 색깔이 채우고 
있다. 그런데 그 색깔조차도 극히 정형적인 것들이다. 빨강, 노랑, 파랑이라는 
삼원색과 검정, 회청색(결국 파랑과 하양의 조합)이 전부이다. 요컨대 색들 중 
가장 기본적인 색들만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기호- 즉 직선- 
와 가장 기본적인 형태들(사각형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색들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몬드리안의 이 금욕적 화면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들은 흔히 
풍요로운 것을 좋아한다. 다양하고 다채롭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몬드리안의 
화면은 그런 세계를 멀리에서 굽어보면서 비웃고 있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으로 세계를 이해했다. 형상이 순수함, 완전함, 
투명성, 영원성, 보편성, 추상성 등의 원리라면, 질료는 비순수, 불완전성, 
불투명성, 운동성, 개별성, 구체성의 원리이다. 철수, 영희, 앙드레, 톰 등의 
이름은 ‘인간’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이고 불완전하다. 철수와 영희의 키 
차이, 앙드레와 영희의 얼굴의 차이 등등은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형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물질성을 벗어나고자 하며, 물질성이 띠고 있는 불투명성과 개별성, 불완전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플라톤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플라톤을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플라톤과는 전혀 
다른 철학을 제시했지만) 자신의 책을 기하학적 엄밀함을 통해 서술했던 
(네덜란드 사람이고 몬드리안의 선배인) 스피노자를 떠올리게 된다. 몬드리안의 
그림에는 분명 그런 금욕적이고 이지적인 측면이 있다. 


물질과 현실에 대한 지독한 혐오 


그러나 그런 합리주의적 태도의 한편에는 그와 통하면서도 대조적인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칸딘스키가 그랬듯이, 몬드리안 역시 그노시스파(육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정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로의 초월을 꿈꾸었던 그리스도교의 종파)에 
몰두함으로써 탈물질화를 꿈꾸었다. 초월을 꿈꾼다는 것, 그것은 물질성을 
거부하고 영혼만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이 비슷한 길을 
걸었던 데에는 이런 종교적 이유가 있다. 탈물질화를 꿈꾸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현실을 부정하고, 그 현실을 제거하고 
극단적인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칸딘스키의 경우 그 초월세계와 
현실세계에 상응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그런 
상응마저 거부했다. 몬드리안이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녹색을 혐오했으며, 
매우 불규칙한 현실의 나무 모양을 극히 싫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현실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어떤 극단적인 ‘실재’만을 추구할 때, 거기에는 
모종의 편집증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것 속에 가장 광기어린 
것이 혼재되어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칸딘스키가 그랬듯이 몬드리안은 역시 화가였다. 화가는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색과 형태를 사용해야 한다. 플라토니즘을 추구하면서도 색과 
형태라는 감각적인 존재들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적 화가들의 
역설이다. 만일 완전히 추상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를 추구한다면, 그림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화가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화가였기에 
자신의 사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완벽한 추상을 추구했지만 
그림이 따분하고 볼품 없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여러 가지 
뉘앙스를 주어야만 했다. 그것은 곧 화면에 리듬을 주는 것이다. 


 
사진/ <빨강, 회청색, 노랑, 검정, 파랑의 구성>(1922). 캔버스에 유채, 
54×53.5cm, 몬테카를로, 개인 소장.


<빨강, 회청색, 노랑, 검정, 파랑의 구성>을 보면 매우 추상적인 그림이면서도 
거기에 매우 다양한 리듬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리듬이란 강도의 
분포이다. 몬드리안은 화면에 강도를 리듬 있게 분포시키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빨강, 한 구석에서 단조로움을 깨는 노랑과 
파랑(이들의 배분 또한 다르다), 그리고 다양한 강도의 회청색들이 적절한 
리듬(강도의 분포)을 이루고 있다. 왼쪽 수직선은 화면의 끝에 닿지 않고 약간 
떠 있으며, (옆으로 긴) 아래의 칸은 검게 메워져 있다. 그리고 화면 전체를 
선으로 닫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은 바깥을 향해 열려 있으며, 그것이 화면 
전체에 개방성과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미국으로 망명한 뒤 브로드웨이에 매료 



 
사진/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43). 캔버스에 유채, 127×127cm, 뉴욕, 
현대미술관.


평생 추상을 추구한 몬드리안이었지만, 말년의 그에게 현실의 무게는 좀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몬드리안은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다음해인 1940년에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뉴욕이라는 도시, 특히 기하학적이고 합리적인 건물들, 
쭉쭉 뻗은 거리들, 수직으로 높이 솟아오른 고층 빌딩들 등등이 그에게 강렬한 
영감을 준다.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현실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던 
그가 (사실상 전쟁 특수를 통해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이라는 곳에서 해방감을 
느낀 것은 얄궂다. 어쨌든 그로부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43) 같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 그림에서는 이전의 그림에서 볼 수 없었던 현실과의 
상응성이 나타난다. 초월을 꿈꾸던 몬드리안은 가장 세속적인 거리들 중 하나인 
브로드웨이에 매료되었으며, 물질성과 운동성을 벗어나려 했던 그가 
‘부기우기’라는 운동성에 매료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 역시 수평선과 
수직선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색깔 또한 그가 늘 쓰던 색깔들만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적 일관성을 느낄 수 있다. 














무우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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