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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21일 일요일 오전 06시 47분 26초
제 목(Title): 한홍구/ 가장 비열한 연좌제 선동 


출처: 한겨레 21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2년04월17일 제405호   
 

이인제는 세종대왕을 공격하라?

가장 비열한 연좌제 선동, 역적의 사위가 왕위에 올랐던 조선시대보다도 못한 
일 
민주당 경선과 후보자들의 토론과정에서 우리는 차마 못 들을 말을,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다시 한번 듣고야 말았다. 아무리 언론특보가 자기네 
후보를 가리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고까지 하긴 했지만, 정말 
민주시민이라면 제정신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후보가 하고 말았다. 그 
후보에 의해 검증의 대상이 된 노무현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어떤 
문제인데 그걸 건드리십니까?” 


“그게 정말 어떤 문제인데….” 


연좌제, 그것은 수십수백만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망령이었다. 역대 
정부가 여러 번 폐지를 약속했고, 심지어는 헌법에까지 명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좌제의 너울은 우리를 옥죄고 있다. 비단 한국전쟁 전후의 사상사건 관련자나 
부역자들만이 아니었다. 1970∼80년대 학생운동 세대들 역시 연좌제에서 
자유롭지 못햇다. 자신에게 가해질 고난이야 각오한 것이지만, 가족들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것은 그 투사들도 차마 감당하기 
힘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우리는 연좌제의 부당함을 잘 알면서도 연좌제에 너무나 길들어져 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단체기합을 받아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단체기합에서 고통받는 약자가 된 우리는 당장의 고통 때문에 연대책임의 
부당함에 저항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를 이 고통에 몰아넣은 원인제공자를 
단체기합을 주는 교사나 교관, 고참이 아니라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그를 미워하게 된다. 연좌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심지어 
얼굴도 보지 못한 8촌이나 사돈까지 포함하는 연좌제는 자신의 친척을 친척이 
아니라 원수로 만들었다. 


 
사진/ 작가 김성동은 연좌제의 아픔을 <엄마와 개구리>등 여러 작품으로 
표현했다.


빨갱이 아버지를 둔 한 작가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빨갱이 새끼….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침뱉고 발길질하고 그리고 아무나 찢어죽여도 좋은 빨갱이 
새끼였던 것이다. 나는 왜 빨갱이 새끼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뱉는 빨갱이가 되어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풀기 빠진 헛바지처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일까….”(김성동, <엄마와 개구리>) 김성동뿐 아니라 작가들 중에는 이문구, 
김원일, 김원우, 이문열 등 유난히 빨갱이 아버지를 둔 사람들이 많다. 어디 
변변한 직장 잡을 길이 없었기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김성동, 이문구, 
김원일 등이 작품활동을 통해 그 원망스러운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감싸안으려 
했다면 이문열은 그들과 날카로운 대척점에 섰다. 그래도 작가들이야 글쓰는 
재주라도 있어 자신들의 아픈 사연을 작품으로라도 승화시켰지만, 이도 저도 
없는 힘없는 사람들은 속으로 피울음을 삼켜야 했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자의적인 조치로 인해 피해를 받아온 그들 모두가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게 어떤 문제인데, 그게 정말 어떤 문제인데….” 

원래 연좌제는 공동체의 지배원리가 통용되던 고대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여의 옛 법에도 범죄로 사형을 받은 자나 살인자의 가족을 노비로 만들고, 
고구려에서도 반역자들의 처자를 노비로 만드는 등 연좌제의 뿌리는 꽤나 깊다. 
연좌제는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하지 
마라”(罪人自己外緣坐之律一切勿施事)는 형사책임 개별화의 원칙이 
천명됨으로써 폐지되었다. 전근대 사회의 가장 비합리적인 형벌인 연좌제는 
법가사상(法家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교정치의 이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맹자(孟子)는 유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주나라 문공(文公)의 치적을 
말하면서 죄인불로(罪人不 ), 즉 연좌제를 실시하지 않은 점을 꼽았다. 


장인-사위관계는 적용대상 아니었다? 



 
사진/ 연좌제 폐지는 통치자들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연좌제의 망령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요즈음도 연좌제란 말을 많이 쓰는데 한자로는 緣坐制와 連坐制 두 가지가 
혼용되다가 요즈음은 連坐制로 굳어져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緣坐라 함은 
혈연관계로 인해 당사자가 아닌 친족들이 처벌받는 것이고, 連坐는 스승과 
제자, 친구 등 비혈연적 관계에 의해, 또는 다른 관리의 문제에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연좌는 緣坐에 가깝다. 
그런데 조선시대라면 몰라도 지금의 형편에서는 연좌제란 용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는 민주사회에서 법률에 기초하지 않은 
연좌가 어떻게 제도로 성립할 수 있단 말인가? 조선시대의 연좌제도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악법이기는 해도 그래도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지키고는 
있었다. 연좌제가 적용되는 죄목은 조선시대 형법의 모법이 되는 명나라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 따르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기도인 
모반(謀反), 현재의 군주를 갈아치우려는 모대역(謀大逆), 외국과 내통하여 
본국을 도모하려는 모반(謀叛) 등 세 가지 정치적 범죄와 한집에서 세명 이상을 
살해한 죄,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기 위해 살해한 죄, 뱀이나 독벌레를 
이용하여 사람을 살해하거나 그런 행위를 교사한 죄 등에 대해서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연좌법의 적용을 받아 처벌되는 대상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제한된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3족을 멸한다는 말을 쓰며, 3족을 친가, 외가, 
처가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연좌제를 설명한 백과사전에도 3족에 대한 그런 
잘못은 되풀이된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분명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원래 3족이란 3대에 걸친 친족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인 조족(祖族), 형제와 그 소생인 부족(父族), 그리고 본인의 
아들 및 손자를 가리키는 기족(己族)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법률 체계의 
모법이 되는 <대명률직해>나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왕조의 각종 법전에서 
연좌제의 적용을 받는 친족의 범위도 친가, 외가, 처가의 3족이 아니라, 조족, 
부족, 기족의 3족으로 국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근대의 연좌제에서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장인-사위 관계는 연좌제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가혹하게 연좌제가 적용된 모반(謀反)과 대역죄의 
경우도 본인 및 공모자는 능지처참, 아버지와 16살 이상의 아들은 교수형, 
어머니, 처, 첩, 할아버지, 손자, 형제자매, 아들의 처첩은 노비로 삼고 백부와 
숙부, 조카들을 유배, 또는 곤장형에 처할 뿐 장인의 일로 사위를 벌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범죄당사자의 출가한 누이와 그 배우자 역시 연좌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사위들이 연좌에 걸려 처벌을 받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갑자사화 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바 있는 이세좌(李世佐)의 사위를 유배시켰다가 죽인 일이 있다. 또 중정반정 
이후 연산군의 매부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愼守勤)을 잡아 죽이면서 그 사위 
역시 멀리 귀양을 가는 등 법의 규정을 넘어 연좌대상이 확대되는 남형(濫刑)이 
저질러지기도 했다. 


한강다리 폭파, 정부가 강요한 부역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연좌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선조나 광해군 때가 
되면 출가한 누이나 딸과 그 배우자들인 서친(壻親)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 때문에 역적이 나온 집안의 딸을 아내나 며느리로 맞아들인 
집에서는 즉각 이혼을 시키는 새로운 풍속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효종(孝宗)은 출가녀를 연좌의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특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사진/ 세종대왕은 외가와 처가가 모두 역적의 수괴로 몰려 쑥대밭이 됐지만 
왕위를 내놓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다.


사실 처가의 문제를 갖고 사위를 벌하는 것은 여자들이 시집과 친정에서 
이중으로 연좌형의 대상이 된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되었지만, 왕통의 유지를 
위해서도 금지시켜야 할 일이었다. 태종은 자신의 처남 민무질(閔無疾) 
형제들을 모두 죽여버렸으며, 상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에는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沈溫) 역시 역적의 수괴로 몰아 죽여버렸다. 세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가와 처가가 모두 역적으로 몰려 쑥대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장인과 외숙이 역적이라고 해서 세종이 왕위를 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경우 잠시 
폐비론이 있었기는 하나 조강지처로서 내조의 공이 있다 하여 그 논란은 곧 
잠잠해졌다. 한편 신수근의 사위들이 처벌을 받을 때도 처벌을 모면한 사위가 
있었다. 쿠데타 세력이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한 진성대군(晉城大君), 즉 중종이 
바로 신수근의 사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비 신씨의 경우는 세종비 심씨와는 
달리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박원종(朴元宗) 등 쿠데타 세력은 7일 만에 신씨를 
몰아낸 것이다. 오늘날 인왕산의 치마바위는 쫓겨난 신씨가 남편을 그리며 
대궐이 잘 보이는 곳에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신씨는 
200여년이 흐른 뒤 영조 때 가서야 왕비로 복위되어 단경왕후(端敬王后)에 
봉해졌다. 

1894년 갑오경장 당시에 폐지된 연좌제가 되살아난 것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이승만 정권은 전쟁만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북진통일을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막상 
이북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자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점심은 대전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을 정도로 뺑소니를 쳤다. 대구까지 내려갔던 이승만은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라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고 다시 대전으로 올라갈 
정도였다. 물론 전세가 극히 불리할 때 ‘작전상 후퇴’를 하는 것이야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경우는 해도 너무했다. 이승만 
정권은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국군이 북진 중이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놓고 도망치면서,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한강 다리마저 끊어버리고 갔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부통령 이시영 선생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들 중에서 이승만과 약간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도주를 전혀 알지 못했다. 부통령 이시영은 한강 다리가 폭파되기 이전에 
간신히 기차편으로 빠져나왔지만,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1500여명의 무고한 피난민이 폭살당했다. 이렇게 국민들은 정부에 의해 
기만당하고 버림받았으며, 이는 부역을 강요당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사진/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갔던 이승만은 서울 수복은 
수많은 시민들을 부역자로 처벌했다.


그리고 석달 뒤 이승만 정권은 서울로 ‘개선’했다. 정부의 발표만을 믿고 
있다가 인민군 치하에서 석달을 보낸 시민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하는 위로도, “우리만 피난갔다 왔으니 정말 미안하다”라는 사과도 
보내지 않았다.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에게 사과 담화를 발표할 것을 건의했다가 
이승만에게 “내가 당나라 덕종(德宗)마냥 ‘과인이 덕이 없어’ 하고 사과하란 
말이냐”는 핀잔만 받았을 뿐이었다. 위로와 사과 대신에 서울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적 치하의 부역자를 가려서 엄단한다는 서슬 푸른 방침이었다. 1950년 
10월의 서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강파(渡江派)와 
잔류파, 서울의 가을하늘 아래에는 부역행위를 했을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채 
심사와 처벌을 기다려야 하는 잔류파와 기세등등하게 부역자의 엄단을 외치는 
‘애국적’인 도강파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인민군의 통치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역자로 처벌되었다. 그런데 진짜 부역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월북을 했다. 그러니 부역자로 처벌받은 사람들은 사실상 이승만 정부와 인민군 
양쪽에 의해 부역을 강요당한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정부가 이들 개인을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친족들까지 신원조회를 
통해 공직 취임, 해외여행, 사회활동 등에 제약을 가한 것이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에 의해 신원특이자를 친척으로 둔 사람들은 2등국민으로 
전락했다. 연좌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한 비열한 
테러행위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누가 연좌제를 되살려냈는가? 바로 다리 
끊고 도망쳤다가 개선장군처럼 되돌아온 것들이었다. 

연좌제가 잘못된 것임은 권력자들이 계속해서 이 제도의 폐지를 약속했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남로당 군사부 내에서 군부조직책이라는 화려한 
좌익경력을 가진 박정희는 사상논쟁이 한창이던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좌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1966년 5월 엄민영 내무장관은 연좌제는 이미 
폐지되었다고 언명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67년 1월 중앙정보부는 공화당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상관계 연좌제 관련자 24만명 중 5만명을 1차로 해제하며 
앞으로 연차적으로 연좌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미 폐지된 줄 알았던 연좌제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아연할 일이지만, 이 
조치를 누구나 찬동해 마지않을 것이라고 환영했다. 다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 
1971년 2월 백두진 국무총리는 연좌제가 이미 폐지되었다고 선언했으며, 
3월에는 내무부가 신원조회에서 연좌제 폐지를 약속했다. 이렇게 연좌제 폐지는 
대통령 선거의 단골메뉴였다. 


박정희·김종필·허화평은 당당히…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국회 개헌특위는 연좌제 폐지에 합의했다. 광주에서의 
학살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그 피묻은 손을 씻기 위해 1980년 8월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발표를 통해 신원기록의 일제정리와 연좌제 폐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 내용은 5공화국 헌법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1984년 10월 
이진희 문공부 장관이 다시 한번 연좌제 폐지를 선언할 정도로 연좌제의 망령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1993년에는 사법연수원을 마친 사람이 아버지가 
사상관계도 아닌 일반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검사 임용에서 탈락했으며, 
1997년에는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의 아들이 아버지의 민주화운동 관련 투옥 
때문에 육군정보학교를 1등으로 마치고서도 퇴교당해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또 
같은 해 차정원씨는 남편의 국가보안법 위반 때문에 교사임용에서 탈락했다. 
올해 초에도 전라북도 교육청이 교사 신규임용시 제출하는 서류에 연좌제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신원진술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법률상의 근거가 없는 연좌행위가 자행되다 보니 그 적용도 자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연좌제에 걸릴 만한 여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연좌제의 
너울을 빠져나간 사람들은 많이 있다. 아니, 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로당 군사부에서 군에 잡입시킨 프락치의 총책이 대통령을 
지낸 나라라면 사실 연좌제는 진작에 폐지되어야 마땅했다. 


 
사진/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공산주의자로서 대구 10월 항쟁을 주도하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연좌제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의 수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월북자 가족을 두었거나 또는 심지어 
형제나 가족이 간첩으로 내려온 사람들 중에도 연좌제의 너울을 비껴간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는 점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경우만 꼽아도 김종필씨의 
경우 서울대생으로서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는 과정에서 본인의 해방 직후 
행적에도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의 장인이 박정희의 형으로 대구 
지역에서 10월 항쟁을 주도한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상희였다. 박상희는 10월 
항쟁을 주도하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자유당과 공화당 정권에서 계속 
실력자로 활약한 김성곤, 박정희 정권에서 내무장관과 주일대사를 지낸 엄민영, 
남부군의 작가로 국회의원을 지낸 이태 등은 본인이 좌익활동에 깊이 
간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이다. 이들의 가족은 물론 
연좌제에 의해 고통을 받지 않았다. 

 
사진/ 5공의 실세였던 허화평 의원은 동생이 간첩으로 남파되었지만 보안사의 
요직을 거쳐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바 있다.


5공의 실세였던 허화평 의원도 동생이 간첩으로 남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안사의 요직을 거쳐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바 있다. 필자는 이분들이 
연좌제를 비껴갈 수 있는 것을 그들과 함께 다행스럽게 여기지만, 힘있는 
자들이 요해히 연좌제를 모면할 때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연줄도 없는 숱한 
사람들이 연좌제의 악령에 고통받아왔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젠 그 관뚜껑에 못질을 하자 



 
사진/ 대검찰청 공안부가 펴낸 <좌익사건 실록> 204∼205쪽에 실린 노무현씨 
장인 권아무개씨의 조사기록. 그는 ‘맹인’으로 기록돼 있는데 어떻게 학살 
현장을 ‘감시’할 수 있었을까.


노무현 후보의 장인의 경우는 이인제 후보 쪽과 한나라당에서는 그가 우익인사 
7명을 살해하는 현장을 “지켜보고도” 전향하지 않았으며, 현장 부근에서 
학살을 용이하게 하도록 “감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 후보 장인의 
행적을 담은 유일한 기록인 <좌익사건실록> 10권에는 그가 ‘맹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뵈는 게 없는 시각장애자가 어떻게 현장을 “감시”하고 
“지켜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도대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장인의 
일로 사위의 공무담임권을 제한하려는 것은 사위를 원칙적으로 연좌의 대상에서 
배제했을 뿐 아니라 역적의 사위인 세종과 중종이 왕위에 오른 조선시대보다도 
못한 일이다. 

남로당 군사부의 군부조직책 경력을 지닌 박정희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흉내내는 
후보가 일개 군당(郡黨)의 선전부장의 사위를 장인의 전력을 갖고서 공격하는 
것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지금 다시 연좌제를 꺼내는 것은 학살의 피묻은 손을 
씻기 위해 연좌제를 폐지한 전두환보다도 못한 짓이다. 수시로 되살아나는 
연좌제의 망령이 다시는 횡행하지 못하도록 그 관뚜껑에 단단히 못질을 해야 할 
때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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