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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14일 일요일 오전 03시 21분 05초
제 목(Title): 이정우/ 입체파의 존재론 


출처: 한겨레 21


[ 이정우의 철학카페 ]  2002년04월10일 제404호   
 

사물의 뿌리에 파고들라!

이정우의 철학카페 24 l 입체파의 존재론 

현대 회화의 주체·관점·실재 재조명… 공간의 외연성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들 



 
사진/ 피카소, <기타>(1913). 목탄, 연필, 잉크, 풀칠한 종이, 66.4×49.5cm, 
뉴욕, 현대미술관


르네상스 이래 원근법은 하나의 시점을 고정시켜 놓고서 그것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현함으로써 (실제로는 2차원인 화폭에)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 원근법은 하나의 주체를 세움으로써 가능했다. 두 눈을 뜨고 볼 때 
이런 중심성이 혼란스러워지므로 한 눈으로 세계를 종합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근대적 원근법은 철저하게 주체-중심의 사유를 나타낸다. 주체는 외부의 
타자들을 자신의 중심으로 복속시킨다. 그래서 아래로 던져진 것, 즉 (신의 
눈길 아래에 던져진) 피조물을 뜻했던 ‘sub-jectum’은 이제 반대로 타자들을 
자신의 눈길 아래로 던지는 주체가 되었다. 


원근법의 파괴가 이나라 복원이었다 


현대 회화는 근대적인 원근법을 파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 
회화는 원근법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 좀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던 원근법 개념을 되찾은 것이다. 칸트에서 라이프니츠로. 

라이프니츠가 ‘관점’(perspectiv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을 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었다. 모든 개체들은 이미 우주 
자체이다. 모든 개체들은 각각 그 안에 우주를 접고 있는 하나의 주름이다. 
그렇다면 개체들의 수만큼 우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우주가 모든 
개체들에게서 반복되어 표현될 뿐이다. 그러나 개체가 우주를 모두 지각하지는 
못한다. 자신 안에 우주를 접고 있음에도 현실적으로는 우주의 한 영역만을 
명료하게 지각할 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개체(필자)가 자신의 방만을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듯이. 이렇게 한 개체가 가지게 되는 인식 구조를 
라이프니츠는 ‘관점’이라 했다. 

따라서 관점은 자의적이고 개인적인 것이기 이전에 객관적이고 존재론적이다. 
필자가 방만을 지각하고 싶어서 그것만을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지각하도록 바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체가 물을 마시기 
위해 마루에 나갈 때 관점은 달라진다. 이렇게 사물을 보는 관점은 모나드 
각각의 조건에 의해, 그리고 모나드의 운동에 의해 성립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들, 관점의 운동은 모나드 각각의 주체적인 것이기 그 이전에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현대 회화가 발견한 것은 원근법의 파기가 아니라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원근법의 발견이다. 현대 회화는 실재 탐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현실에서 심층적 실재로 나아간 것이다. 현대 회화가 회화의 
자기지시성(self-reference)- 회화는 다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오로지 
스스로를 지시할 뿐이라는 생각- 을 통해 성립한다는 생각은 일면적인 
생각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자기지시적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다양한 주체의 관점을 동시에 표현 



 
사진/ 브라크, <레스타크의집>(1908). 캔버스에 유채 73×60cm, 베른, 
베른미술관


회화는 실재를 발견하기보다 주체를, 주체의 정신을, 회화의 문법만을 표현할 
뿐인가? 그러나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정신이란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회화의 문법은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인간의 정신이, 회화의 문법이 이 우주, 
이 세계, 이 자연에서 오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왔겠는가? 인식, 정신, 논리는 
세계와 별도의 세계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스피노자의 표현을 따라 
‘제국 속의 제국’을 생각하는 것이리라. 인간이 사유한다는 것도 우주 속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이다. 인간의 정신, 마음도 우주의 한 측면이다(다만 다른 
측면들을 비춰볼 수 있는 특수한 측면). 회화의 문법도 화가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우주적 사건의 한 표현일 뿐이다. 

하나의 주체는 하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 그러나 그 관점은 바로 그 주체의 
존재방식 자체이다. 그렇다면 여러 관점들을 포개놓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세잔에서 시작해 브라크의 <레스타크의 집>(1908) 같은 작품에서 뚜렷이 
나타나게 되는 입체파 회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관점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보다 여러 관점들의 동시적 표현을 뜻한다. 그것은 재현하는 주체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보다는 여러 복수적 주체들의 관점들을 동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회화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곧 하나의 관점에 비친 세계가 아니라 무수한 관점들의 교차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사진/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2>(1912). 캔버스에 유채, 147×89cm,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미술관, 월터 아렌스버그컬렉션


관점들은 운동한다. 주체의 운동은 관점의 운동을 가져오며, 복수적 주체들의 
교차는 무수한 새로운 관점들의 형성과 변환을 가져온다. 따라서 관점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도 함께 내포한다. 관점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한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 여기저기에서 불빛들이 명멸하고 합쳐지고 
이어지고 갈라지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개별적 주체에게 나타난 현상의 세계가 
아니라 무수한 주체들의 존재방식이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3)는 
시간 속에서 변환되는 관점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은 작품의 대표적인 예이다. 

입체파의 이런 생각은 콜라주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각각의 사물들은 
상이한 관점들, 상이한 존재방식들, 상이한 공간과 시간을 함축한다. 콜라주는 
이것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기보다 진짜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각각의 
발견 자체 내에 예술가 개인의 관점(그 주체의 존재방식)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공간 안에 여러 사물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물들이 모임으로써 어떤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상호침투하는 사물… 공간 자체의 입체화 


입체파 이전에 사물들은 공간의 외연성(extension)에 굴복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공간의 외연성이 전제되고 그것을 사물들이 채운다. 그러나 
입체파에서 사물들은 이런 외연성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상호 침투한다. 
공간은 말 그대로 입체화된 것이다. 공간 속에서의 입체화가 아니라 공간 
자체의 입체화. 

근대 회화가 주체 중심적이었다면, 인상파 회화는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듦으로써 사물들의 드러남 그 자체를 포착하고자 했다. 현대 회화는 다시 
사물들의 근저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근저란 주체가 배제된 ‘객관적’ 
근저가 아니라, 세계와 주체가 함께 존재하는 그대로의 진짜 객관성이다. 
세계는 관점들로 넘실거린다. 그 넘실거리는 파도 하나하나가 화가들에 의해 
포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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