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14일 일요일 오전 03시 26분 01초 제 목(Title): 이성욱/서평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출처: 한겨레21 [ 문화 ] 2002년04월10일 제404호 사이비 우익, 네게 조롱을 주마 지배이데올로기와 맞서기 위한 ‘잡글’…육중한 지식을 거리의 언어로 육화하다 ‘나는’이라는 1인칭 대명사를 써가며 글쓰는 주체를 스스로 드러내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직접 대화를 나누는 듯한 친밀감을 줄 수 있어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노출해야 한다. 세상사를 헤아리는 시야와 손끝에 익힌 글솜씨가 웬만하지 않고서는 촌스럽기 딱 알맞다. <폭력과 상스러움-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푸른숲 펴냄)에는 “나는…”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뿐 아니다. 노골적인 조롱기가 다분하다. “나이 몇살 더 먹었다고 건방지게 ‘인간’이 되라는 둥, 말라는 둥 충고를 하며 제 개인적 인생관을 막 남에게 강요한다. …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상한다. 고교 시절로 돌아가보자. 그 시절 등교할 때마다 우리는 학교 정문에서 늘 재수없는 인간들을 봐야 했다. 소위 ‘규율부’라는 완장을 찬 자들이다. 이자들이 아침부터 교문 앞에서 남의 옷차림에 간섭하고, 바리캉으로 헤어스타일을 망가뜨리고, 심지어 남의 사적 공간(=책가방)에 침입하여 신성한 사유재산(=담배, 잡지)을 압수하는 위헌적 만행을 저지르곤 했다. 도덕군자들의 유가적 덕치가 실현되면, 아마도 자신을 군자라 칭하는 같잖은 보수 나부랭이들이 팔에 완장을 찬 규율부가 되어 대한민국 전체를 감시하게 될 것이다.” ‘눈에는 눈’의 전략 갖가지 방식으로, 예컨대 유교가 근대 서구사상보다 낫다는 식으로, 국가주의라는 살아 있는 시체에 힘을 보태려는 우익의 책략을 비판하는 한 구절이다. 안티조선 진영의 또 다른 ‘스타’ 김규항씨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식의 글쓰기를 ‘전투적 글쓰기’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진씨 자신은 ‘잡글’이라고 부른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썼다지만 대학생이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미학 개론서 <미학 오딧세이>나, 죽음을 다룬 그림들을 도상학적으로 해석해 죽음의 사회사를 입체적으로 써내려간 <춤추는 죽음> 같은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다. 이 때문에 스타일이 저열하고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듣는 모양이다. 하지만 육중한 지식을 거리의 언어로 단숨에 육화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잡글의 복원’을 외치는 그에게서 정교한 철학적 논리를 읽을 수 있다. 프랑스 철학에 관한 한 국내에서 푸코에 이어 가장 많은 조명을 받고 있는 질 들뢰즈가 마침 등장한다. 들뢰즈의 사유는 “시시각각 변하는 물질의 흐름 속 생성”을 중시한다. 우연과 필연이 주름져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현실의 세계에 제대로 개입하려면 “(비판적 담론이) 사건의 세계 속에 들어와 계열화되어야”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추상화된 언어나 논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고루 타당한 말”은 “언어의 휴가”일 뿐이다. 이런 식의 글쓰기로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거리에서, 술자리에서 혹은 택시 안에서 오가는 세론”이나 “몸 전체에 기입된 습속”의 형태로 완강히 자리잡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맞설 수 없다. “몸 속에 기입된 흔적”을 발견하고 지워내려면 대중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잡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중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협박과 위협의 폭력에는 그들을 이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희롱, 조롱, 우롱의 폭력을” 안겨주겠다고 선언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전략이다. 폭력과 상스러움이라고 책 이름을 지은 그답다. 진씨는 언어에 민감하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공부했고 이를 인식의 기초로 삼았다. “철학은 문법적 착각의 문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사용법을 착각하여 특정 영역에만 타당한 어법을 마구 다른 영역에 옮겨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요술이라는 것이다.” ‘… 라는 책에서’라는 뜻으로 남의 글을 인용할 때 쓰던 관용구 ‘엑스 리브리스’를 책의 부제로 사용해 다른 이의 글을 숱하게 인용한다. 잘못 사용한 언어의 쓰임에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다. 국가·자유·민족·공동체 등의 언어에 숨어 있는 음험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무장해제시키기 위해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월간조선>의 발행인 겸 편집장 조갑제씨, 소설가 이문열·복거일씨, 시장만능주의자 공병호씨 등이 주요 타깃이다. “파시즘은 니체를 흉내내는 원숭이”라며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언어를 묘하게 끌어쓰는 지점을 재치 있게 까발린다. “니체주의자들이 ‘유목적’(노마드) 삶을 노래하면, 우익 니체주의자 조갑제는 한 곳에 붙박이지 않고 영토를 확장하려고 온 세계를 떠돌아다녔던 칭기즈 칸 부대의 유목적 삶을 찬양한다. 좌익 니체주의자들이 ‘힘’을 얘기하면, 우익 파시스트는 그 ‘힘’을 무지막지한 군사력으로 이해해버린다.” 사이비 우익이 주요 공격대상이지만 “코뮌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공간적 형식은 무엇인가”라며 새로운 지식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는 이진경씨 같은 좌파도 때로는 사정없이 비판한다. ‘공동체’가 문제다. “공동체는 동질성을 전제하고, 동질성은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의미하고, 배제는 강제를 내포하고, 강제는 인격적 혹은 비인격적 지배와 폭력을 전제하는 것”이라며 “주책없이 공권력이 남의 사적 영역에까지 수시로 쳐들어오는 이 문화적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생활의 욕망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게 과연 얼마나 혁명적인 짓일까”라고 반문한다. 그 대신에 개인들이 자유로운 소통의 망을 구성해 거기서 얻어지는 자발적 합의로 국가주의라는 허구적 공동체를 사회 정의와 연대성에 입각한 실질적 공동체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우파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 <폭력과 상스러움…>은 12장으로 짜여졌다. 폭력, 죽음, 자유, 공동체, 처벌, 성(性), 지식인, 공포, 정체성, 민족, 힘, 프랙털이 각 장의 주제다. 한결같이 간단하지 않은 주제이고, 대부분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거쳐 거듭난 단어들이다. 진씨는 프랑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유용하게 써먹지만 그 안에 갇히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여전히 안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오류에 발목잡혀 있지 않은 것처럼. 계보학이란 방법론으로 갖가지 권력의 기원을 밝혀낸 푸코를 바라보는 눈도 그렇다. “푸코의 무정부주의적 비판은 권력의 감시를 느끼는 우리의 감수성을 민감하게 해주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찾는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거기에서 기계적으로 어떤 대안을 끌어낼 경우 종종 다분히 허구적인, 현실성 없는 얘기를 하기 쉽다. 국가가 존속하는 것은 그 폭력적 근원의 계보학적 비밀이 여전히 베일에 가려 폭로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현실 적합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일차적 가치는 보수 우익의 이데올로기를 초라하게 만드는 데 있지만, 여기에 쓰인 철학과 언어들의 풍부한 용례를 접하는 즐거움과 유익함도 그 못지않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