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14일 일요일 오전 03시 19분 43초
제 목(Title): 박노자/ 지노비예프 이야기 


출처: 한겨레21

[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  2002년04월10일 제404호   
 

'소련의 개미'가 되기 싫었다

미시적 권력과의 공존을 거부했던 러시아 노사상가 지노비예프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사보다 공이 앞서야 한다는 공산당 선전원의 
지루한 강연을 듣던 한 젊은 병사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생활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죽어서라도 공동묘지 아닌 개인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다. 
사상이 불온한 그 젊은 동무에게 사람들은 설득을 해보지만 군사재판소는 
그에게 사형을 내려 총살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총살을 집행한 뒤 그 시체를 
어떻게 묻어야 하는지 격론이 벌어졌다. ‘배반죄’로 총살당한 놈의 주검을 
영웅적으로 전사한 동무들의 유해와 함께 공동묘지에서 같이 묻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개인묘지를 만들면 그가 원했던 대로가 아닌가? 결국 그의 
시체를 상부에 전달했고 거기에서 어떻게 처리됐는지 우리는 알 바도 아니다.” 


스탈린 암살계획을 세웠던 청년 



 
사진/ 알렉산드로 지노비예프. 그는 체질상 어느 체제나 사회에도 구성원으로 
끼어들 사람이 아니었다.


이 내용은 현재 팔순을 넘긴 현대 러시아의 자유사상가이자 작가인 알렉산드르 
지노비예프(A. Zinoviev)의 한 저서에 담긴 것이다. 그런데 지노비예프의 
운명은 그 젊은 병사와 비슷한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그는 그 젊은 병사처럼 
개인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편안한 
‘개인묘지’- 예컨대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서구사회- 에서 안주할 사람도 
아니다. 그가 보는 서구사회는 ‘촌스러운 전체주의의 소련’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문명적인 타협주의와 기회주의’의 지옥이다. 그의 회고록- 
<나는 주권 국가다>- 이 이야기해주듯, 그는 체질상 어느 체제나 사회에도 
구성원으로 끼어들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골 출신의 지노비예프가 학교에 다녔던 시절은 스탈린 독재가 서슬이 퍼랗던 
1930년대였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란 개인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자율적인 사회라고 믿었던 청년 지노비예프는 동지를 규합하여 스탈린 
암살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대학교에 들어가 사회학·논리학을 탐구했다. 
물론 이 젊은 혁명가는 오래지 않아 동지 중 한 사람의 밀고로 고문 뒤 
탈옥하기까지 약 1년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그는 전선으로 끌려갔다. 그는 참전하게 됐지만 
적군 독일군에 대한 적개심이나 아군 소련군에 대한 충성보다는 오히려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흡사한 면들이 눈에 보일 뿐이었다. ‘악’과 싸우는 
‘선’을 자임하는 일부 소련 병사들이 살육에 참여할수록 적병 사살 자체를 
마음과 몸으로 즐겨간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그 광경은 
그에게 자신의 개성과 신념을 보존하려면 내면에서의 적극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전쟁에서 얻은 또 하나는 정권이 어떻게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선포하고 
애국자들을 양산하는가를 이해한 것이었다. 전선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되도록 
멀쩡한 몸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 생활인이었지, 신성한 전쟁에 
몸을 바칠 ‘공산주의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을 ‘애국적인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군 당국은 일체의 일탈행위마저도 무자비하게 
처벌하면서 조금이라도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아주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신문·라디오·문학작품·영화 등을 통해 ‘적개심과 애국심’의 
분위기를 훌륭히 조성해내었다. 결국 일탈에 대한 의식·무의식적 공포와 
사회적 분위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만들어진 정체성은 군인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희생할 욕구를 자아내게 했다. 나중에 사회학자로서의 지노비예프는 
그람시 못지않게 이 ‘만들어낸 합의’, 이념적 헤게모니 문제에 대해서 
고심했다. 


‘괴짜’로 낙인찍혀 추방당하다 



 
사진/ 2차대전에 참전한 소련 전차부대원들. 그도 이 전쟁에 참전했지만 적군 
독일군에 대한 적개심이나 아군 소련군에 대한 충성보다는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흡사한 면만을 보았다. 


전쟁이 끝난 뒤 지노비예프는 논리학을 계속 연구하여 그 분야의 거두가 됐다. 
스탈린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시작된 뒤(1956년 이후) 그는 마르크스의 
논리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소련·동구 철학계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면적인 성공에도 그의 삶은 늘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찼다. 그의 학문적 소신으로 말미암은 정권과의 마찰도 
문제됐지만, 무엇보다 학계의 ‘어른’들에 대한 그의 불순한 태도, 무능한 
제도권 철학가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정치적인 불온 못지않게 그를 기피인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정치적인 독재를 특징으로 하는 소련의 ‘거시 담론’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아부·복종·영합 중심의 그 ‘미시적 권력’까지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사회학자로서 그는 독립적 자아의 포기와 미시적 집단과의 무난한 
공존, 미시적 아부와 복종을 거대한 병영국가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가장 중요한 
장치로 평가하기도 했다. ‘괴짜’로 낙인찍힌 그는 결국 독일 뮌헨으로 
추방당한다. 20년이 넘은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에 돌아간 것은 불과 2년도 
되지 않았다. 

서구 학계의 보이지 않는 압력을 거부하고 정규적인 교직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지노비예프는, 30여개의 저서를 20여개 국어로 발표하는 등 활발한 지적 
활동을 해왔다. 이론서뿐 아니라 문학작품의 형태도 취하는 저서에서 그는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가했다. 미시적 집단(패거리)을 기본 
단위로 하는 병영국가에서 국가의 억압·통제 기능의 상당부분이 구성 집단에 
이양됐다는 것은 소련 체제에 대한 그의 이해의 기초이다. 미시적 집단이 
체제에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비범한 인간들을 평범하고 무방한 수준으로 
끌어내림으로 인해서 체제 전체는 그만큼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는 그 안정성의 이면에 있는 위기의 불가피성을 꿰뚫어본다. 미시 
집단과 타협을 가장 잘하는 둥글둥글한, 개성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출세가 
잘되는 사회는 궁극적으로 장래가 밝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미시적 
타협주의·권위주의의 절대화가 사회 발전의 가능성을 완전히 가로막는다는 
그의 이론을 현재 우리 남북한 사회의 분석에 적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주한 미군기지에 대한 우려 


흥미로운 것은 소련 체제의 허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노비예프가 거시적 
차원의 개혁 효율성을 회의적으로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닫힌’ 
집단주의 사회가 갑자기 개방될 경우 ‘시류 따르기’에 길들여진 집단의 
구성원들이 현실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서양의 노예밖에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십자가로 가라!>(Idi na Golgofu·1982)라는 소설에서 그는 개인 
차원의 한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집단을 현실적으로 떠나지 않고도 철저한 
거리 유지와 도덕적 실천을 통해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그가 제시한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결국에 사형(십자가)의 위협 앞에서 굴복하고 만- 자신 
안의 하나님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그 소설의 주인공의 운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의 대안은 평범한 인간 이상의 힘과 용기를 요구했다. 

야만성이 점차 짙어져가는 현재 사회에서 십자가 앞에서 겁을 내는 일반 
사람들은 결국 체제의 ‘개미’(소시민) 노릇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가슴 아픈 결론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그는, 서구중심주의적 교육과 고도로 
기만적인 ‘주류’ 대중매체, 그리고 저차원적인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생산·충족해주는 대중문화에 의해서 의식이 마비된 서구·미국의 보통사람을 
소련의 ‘개미’ 못지않은 끔직한 집단주의자로 여긴다. 미국·서구가 나머지 
세계를 궁핍과 전쟁으로 내몰아도 그 ‘안’에 있는 배부른 소시민들은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련 체제의 위기와 붕괴를 정확하게 예측했던 지노비예프는 부시의 ‘무한한 
전쟁’이 세계를 점차 잠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에 
따르면 이슬람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러시아의 매판적 엘리트의 매수에 
열중하는 미국·서구는 러시아의 괴뢰화(나토와의 ‘동반자’ 관계 구축 
등)·이슬람 세계의 무력화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 ‘대 중국 정벌’ 
준비에 착수할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인 ‘지구에 대한 전폭적 
지배’(full-spectrum dominance)를 위해서는 독립 세력으로서의 중국을 어떤 
방법으로든 무력화시켜야 되기 때문이다. 분리 공작이 성공적이지 않으면 
미국의 대 중국 침략전쟁의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는 괴뢰화된 러시아가 침략의 공범이 될 것을 우려하지만, 무엇보다 필자에게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한반도의 미군기지들이다. 이미 반세기 전에 
미·중 충돌의 측면도 지닌 6·25전쟁으로 쑥밭이 됐던 한반도가 미국의 새로운 
침략으로 사막이 되는 것은 말 그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미군 철수를 위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