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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6일 토요일 오전 11시 54분 44초
제 목(Title): 최영미/ 말하는 풍경 


출처: 월간미술 2/02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영등포시장 근처. 내가 사람들과 함께 가두행진을 하던 
가리봉오거리와 닮은 거리였다. 1987년 대통령선거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1988년, 아니 1989년이던가? 일찍 어두워지는 겨울 저녁, 
어슴프레 어둠이 깔리고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던가. 내가 최초로 ‘예술적 영감’이라 할 만한 강렬한 이미지를 
포착했던 때를 알고파 종이를 뒤적인다. 일기장이 빽빽하다. 하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하염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인생을 중간평가하는 게 당시 나의 
유일한 일과였다. 말하자면 나는 백수였다. 그해 겨울, 우리가 외치던 구호를 
벌써 나는 잊었고 서로를 '동지'라 부르던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도 반쯤 
지워졌을 때. 
 

1989년 2월 2일에서 2월 13일 사이 어느날, 지금 영등포 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선 
맞은편의 지하도를 막 들어가려는 찰나. 내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귤을 까고 있는 늙고 말라비틀어진 손. 차도와 인도 사이의 
경계에 바싹 붙어 좌판을 벌여 놓은 할머니가 팔다 남은 귤을 먹고 있었다. 한 
껍질씩 벗겨질 때마다 주홍빛 과실의 살이 열리고 물기가 배어 나왔다. 거리의 
먼지를 죄다 뒤집어쓴 듯한 주름투성이의 새까만 손가락과, 싱싱하고 탐스러운 
귤의 속살. 서로 상반된 이미지의 눈부신, 잔인한 대조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노란 껍질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벗겨지고, 주름진 
입에서 씹히는… 오래 된 청춘의 조각난 꿈. 귤처럼 시린 젊은 날의 추억.

며칠 뒤, 나는 따뜻한 내 방에 앉아 연초의 우울함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혼자 귤을 까먹고 있었다. 문득 똑같은 귤껍질을 벗기던 초라한 손이 생각나 
일기장을 펼쳤다.  


세월의 잔때를 벗기고 
조각난 꿈들을 
소리없이 씹고 있는 그대는 
누구의 어머니, 부인, 애인이었을까? 


알알이 탐스럽던 꿈들을
시리도록 화사했던 그리움을
눈물도 없이 삼키는 이유를 당신은 묻습니까?
살아온 날들은 짧고
살아갈 날들은 길답니다.


 
 
 

에릭 휘슬 〈가을 호랑이들(The Tigers of Autumn)〉 캔버스에 유채 
165.1×182.84cm 1980 
 지금 옮기려니 다소 감상적인 어조가 거슬리는, 미완의 시를 쓰며 나는 여러 
번 펜을 놓았다.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느낀 무상함을 정확히 묘사하려면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았다. 
글보다 그림이 더 그럴듯한 표현수단일지도 모른다는 최초의 자각.

그 저녁이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때묻은 손톱과 시린 귤껍질들이 내 속에 
잠재된 열정에 불을 지폈다. 내 눈에, 내 마음에 걸린 이미지를 건져내어 
언어로 표현하려는 간절함. 잠깐 스쳐 갈 뿐인 순간의 인상을 영원히 
고정시키려는 다급한 갈망. 그래서 헛되고 헛된 일상을 견디는 것.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지난한 과정에서 나는 소진되리라.

그날부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길거리의 노점상처럼 
너무도 익숙해 그냥 지나치던 풍경들이 낯설게 다가오고 그것들을 포착하느라 
내 감각은 예민해졌다. 


그 즈음 난 책을 멀리했다. 책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는 회의
 
 
가 들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고 유린당했다. 내가 속았던 걸까? 
나는 유물론의 대명제­물질이 정신에 우선하는지,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과연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지­를, 미술의 역사를 통해 규명하고 싶었다. 글보다 
그림이 더 정직하므로, 옛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더 잘 말해 주리라.

어쩌다 읽게 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재미있었다. 소설보다 
재미있었다. 곰브리치에 코를 파묻고 나는 미술사를 공부할 꿈을 다졌다. 
대학원 시험을 볼 거야, 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 당분간 만날 수 없어. 
그렇게 선포한 몇 달 뒤인 1989년 여름. 나는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어언 10년하고도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수많은 미술작품을 보았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미술관들을 순례했다. 내 눈을 스쳐 간 이미지들 중에 
기억나는 몇 가지를 말해 보련다.

사람들에게 치인 뒤라 그런지 인물보다는 풍경이 좋았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물화에도 오래 머물렀지만, 동·서양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풍경화다. 내가 젊었을 때, 대학원에 
다닐 무렵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톨레도 풍경〉 (1600)처럼 
으스스한 풍경을 선호했다. 아직 세상살이에 지치지 않았던, 인생의 쓴맛을 덜 
봤던 시절이라 그랬던가.

음산한 분위기가 독특했다.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내려칠 듯 잔뜩 찌푸린 하늘, 
언덕 위에 들어선 우중충한 회색 건물들은 마치 폭탄테러를 당한 듯 뼈대만 
겨우 남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 도시는 화가가 생존했던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스페인에서 마드리드보다 큰 상업적 중심지로 한창 번영을 
구가하던 톨레도(Toledo)였다. 반동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제주이트(Jesuit)교단의 본거지로서 이단을 심문하는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가 
있던 곳인데, 카톨릭 스페인을 대표하는 ‘성스러운 도시’를 인간은 없고 
유령만 사는 폐허로 묘사하다니. 당대에 보기 드문 신랄한 눈, 대담한 
비판정신과 황폐한 상상력에 나는 반했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성 조지와 용(Laubwald mit hl. Georg)〉 목판에 양피지 282×225cm 1510
 
 북유럽을 여행하며,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노르웨이 숲’이란 말이 실감나게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경치와 마주쳤다. 
독일화가 알트도르퍼의 그림에서처럼 울울창창하지는 않지만 높이 치솟은 
자작나무 숲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숲이… 몇 시간쯤 
지났나? 문득 창 밖이 온통 하얗게 보였다. 사람 키의 두 배는 넘는 듯한 눈. 
눈이라기엔 육중한, 손으로 눌러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만년설의 벽.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나는 여름과 겨울을 다 만났다.

서양의 현대미술에서 풍경은 자연이 아니라 하나의 평면, 실험의 장이 돼 
버렸다. 피카소나 칸딘스키의 풍경화들은 내게 속삭이지 않는다. 캔버스는 
관람자인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하나의 스크린일 뿐이다. 그런데 에릭 
휘슬(Eric Fis -chl, 1949∼ )의 〈가을 호랑이들(The Tigers of Autumn)〉 
(1980)은 달랐다. 한창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담론이 유행하던 시절, 남의 
사무실에 앉아 《월간미술》을 슬슬 넘기는데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거칠지만 그래서 더 처절한 붉은빛. 진하게 물든 단풍을 가을 호랑이라고 
이름하다니. 참으로 시적이군. 에릭 휘슬을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미술가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제목이 없었다면 
시뻘건 물감 덩어리에 불과했을 텐데, 그림과 제목이 참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작품이었다. 에릭 휘슬 하면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들만 떠올렸는데, 
이런 기막힌 풍경화도 있구나 싶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1538)의 〈성 조지와 
용〉(1510)이 르네상스시대에 나온 풍경화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 난 마치 삼차원 동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숲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질서하게 얽힌 나뭇잎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선 원근법도 대기 원근법도 거대한 자연 앞에서 사라졌다. 풍경에 가려 주제가 
(공주님을 구하려 용을 무찌르는 말 탄 기사 성 조지) 보이지 않는다. 화면 
아래에서 겨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주제는 핑계일 뿐 화가의 진정한 
관심은 ‘자연’이었다.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에 대한 당대 독일인들의 
공포감을 생생하게 전달한, 현대적이며 추상적인 감각이 놀랍다.

그런 깊은 숲에 있은 적이 있던가? 늙고 오염된 우리의 산과 강은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압도하기는커녕 놀라게 할 기운도 없다. 우리 나라의 산세 
자체가 험준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느 외국인의 말맞다나 ‘pretty country’,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나라인데… 내 생애 딱 한 번 무성한 나뭇잎들에 포위된 
적이 있다.

1970년대를 세검정에서 보낸 아이들에게 백사실은 서로를 확인하는 징표나 
마찬가지였다. 세검정에 오래 산 애들만이 그곳을 알았다. 신영삼거리에서 
부암동 방향으로 내려가다 길이 휘어지며 커다란 바위 덩어리 야산이 불쑥 
나타나는데, 거기를 지나 혹은 못 미쳐 백사실로 통하는 골목이 있다. 산 속의 
오솔길이 꽤 넓었다. 길을 걷다 문득 위를 쳐다보면 하늘이 보이지 않아 
무서웠다. 나뭇잎들이 해를 가려 대낮에도 어두웠다.

숲 속 공터에 동화처럼 예쁜 연못이 있었다. 못의 둘레가 꽤 넓어 겨울이면 
스케이트 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날씨가 풀리면 단체로 소풍 와서 그림도 
그리고 검푸른 물에 조약돌도 던졌지만 아무도 감히 연못에 들어가 헤엄치지 
않았다. 고인 물이라 깊어 보였다. 빠지면 죽는다고 했다. 깊은 물 속에 사는 
구렁이가 사람을 칭칭 감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구렁이를 봤다는 애도 있었다. 
환상 속의 정원이 지금도 남아 있을까? 



인간을 압도하는 알트도르퍼의 울창한 숲


 
 

왼쪽·엘 그레코 〈톨레도 풍경(Ansicht von Toledo)〉 캔버스에 유채 1600 
 작품이 완성된 해는 1595∼1600년. 세기말이다. 위기의 시대라는 매너리즘의 
끝에 사회가 얼마나 불안했으면 이런 그림이 나왔을까. 그런 그림을 그리고도 
화가가 무사했을까? 내 걱정과는 달리 엘 그레코는 장수했다. “대낮의 햇살이 
내 내면의 빛을 가린다”고 낮에도 작업실에 커튼을 쳤다는, 그리스 출신의 
신앙심이 비상한 신비주의자, 교양이 풍부한 인문주의자이며(그는 회화와 조각, 
건축에 관한 책들을 저술했다) 예술적 개성이 강한 화가가 이방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단의 칼을 피할 수 있었던 생존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난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뭔가 말하는 풍경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풍경이 있다. 예컨대 
호베마(Hobbema)의 〈미델하니스의 오솔길〉(1689)처럼 원근법의 교과서 같은 
객관적인 그림은 재미가 없다. 냉정하지만 깊이가 없다. 날 빨아들이지 않는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든 어둡든, 화가의 주관이 개입된 풍경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 후 난 그 그림을 다시 보지 못했다. 정확한 제목도 기억 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쯤 전 내 눈 밑에서 잠깐 타올랐던 빨간 물감을 못 잊어, 
글을 쓰기 위해 기자에게 1989∼1990년경 《월간미술》에 실린 에릭 휘슬의 
‘가을사자’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 뒤에야 비로소 사실을 확인했다. 호랑이를 
사자로 착각했으니. 호랑이나 사자나 포효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포효하는 
단풍이라…. 뉴욕의 단풍을 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거실 벽에 걸고 싶은 그림은 따로 있다. 예전에는 로스코의 〈검정 
위에 밝은 빨강〉을 걸었다. 내가 《시대의 우울》에서 썼던 그림인데, 
언급하고 싶지 않은 비극적인 사건에 연루된 뒤에 그만 치워 버렸다. 
들여다보면 우울하고 불길하여… 모르는 사람에게 주었다. 그 뒤에 나는 한동안 
벽에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보는 나의 눈은, 옷에 대한 취향만큼이나 완고한 듯하지만 천천히 
변해 왔다. 요즈음 나는 터너나 휘슬러의 화사한, 눈을 즐겁게 하는 풍경이 
좋다. 전에는 달착지근하다고 멀리했던 편안함을 내가 기꺼이 받아들일 줄이야.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이리라.

내 집이 생기면, 어머니의 방을 따로 마련해 드릴 만큼 넓은 아파트로 이사가면 
콘스터블(Constable)의 〈건초마차〉를 걸어 드리고 싶다. 함께 유럽여행을 
갔을 때 퐁텐블로의 미술상점에서 어머니가 고르신 포스터가 〈건초마차〉였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 당신의 평화로운 유년을 상기시키는 전원풍경이었다. 
그때는 왜 이런 싱거운 그림을 고르시나, 참 어머니도 할 수 없군, 
따분해했는데…. 당신의 건초마차가 어디 처박혀 있는지 찾아야겠다.

홍시가 담을 넘어 떨어지는 어머니의 집도, 나의 백사실도 이제 우리 곁에 
없다. 숲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더욱 숲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풍경을 
소유하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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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속초에서>를 시작으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와 <<꿈의 페달을 밟고>>(1998) 등의 시집을 발간했다. 
그밖에 산문집<<시대의 우울 : 최영미의 유럽일기>>(1997)와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2000), 번역서<<화가의 잔인한 손 : 프란시스 
베이컨>>(1998), <<그리스 신화>>(199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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