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6일 토요일 오전 11시 56분 55초 제 목(Title): 신경숙/ 황폐..헐벗은 관능의 극점 출처: 월간미술 1/02 빈의 그 미술관 이름이 뭐였는지 불과 4,5년 전 일인데도 어렴풋하다. 프라하를 거쳐 도착한 빈은 세련되었고 아름다웠다. 거리의 건축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또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 프라하 사람들과는 달리 세련되고 조용하였다. 어디나 쾌적하여 오히려 활기가 없고 늙은이들만 모여 살고 있는 듯이 여질 지경이었다. 그 미술관을 생각하면 커다란 개 한 마리도 저절로 떠오른다. 너무 큰 미술관이었으므로 온종일 그림 구경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에곤 실레와 클림트를 보고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30분쯤 일찍 미술관을 나왔다. 미술관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정원을 사이에 두고 저쪽 광장과 이쪽 광장이 이어질 정도로 드넓었다. 정원에는 나무와 꽃들이 가득이었다. 그 풍경을 마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자올자올 졸았던 것도 같고, 그런 거대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대한 상념에 잠겨 있었던 것도 같고, 그 미술관에 진열되어 있는 에곤 실레의 현기증을 일으키는 그림에 마음이 들러붙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고 앉아 있는 내 앞으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 개는 넓은 미술관 뜰을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떤 개가 그렇게 지나가나 보다, 무심히 보았다. 그런데 그 개는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돌고 돌았다. 하여 그 개가 내 앞을 지나갈 때면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개의 행보는 계속되었으므로 나중엔 어디쯤 오는지 살펴보게도 되었다. 떠돌이 개는 아니었다. 어느 집에선가 귀히 기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개였다. 검은빛과 누런빛이 섞인 털은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으며 걸음걸이도 혼자 걷는데도 무얼 찾는다든가 다른 곳을 살핀다든가 하는 낌새없이 편안하고 느렸다. 미술관에서 빠져나온 일행들이 하나둘 내 곁에 앉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 개의 정체에 대해서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는 동안에도 개는 줄곧 미술관을 빙 돌고 다시 돌곤 하였다. 누군가는 개가 산보를 하는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길을 잃은 개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주인을 잃어 주인을 찾고 있는 개라고도 했다. 나는 그도 저도 아닌 것 같았다. 무엇을 잃었거나 무엇을 찾는 개가 저렇게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닐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개가 산보를 하고 있다고 보기에도 그랬다. 사람도 아닌 개가 혼자 그렇게 긴 산보를 할 수 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빈을 생각하면 빈 외곽을 둘러싸고 흐르던 도나우강이나 혹은 우아한 건축물이나 그에 걸맞은 우아한 사람들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 미술관의 에곤 실레의 그림들과 그 미술관을 빙빙 돌고 또 돌던 그 커다란 개가 떠오르곤 했다. 이따금 화집에서 만나던 실레의 그림을 원화로 보는 느낌은 아주 달랐다. 달랐다고 하기보다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렴풋이 이 사람은 인간의 육체를 상당히 비틀어놨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정면으로 그 비틀린 육체를 맞바라보게 되었을 때는 내 갈비뼈가 한 대 비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고나 할까. 실레는 그래서 그런다 치더라도 그 커다란 개 생각은 왜 잇따르는지 모를 일이다. 때때로 그 개가 어찌되었는지 알고 싶어 빈에 다시 가보고 싶기도 하다. 혹 아직도 그 미술관을 빙빙 돌고 있지나 않을는지. 내 자아의 심연을 응시하는 타자의 시선 에곤 실레의 세계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고통이라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듯한 세계이다. 세기 말, 세기 초의 빈,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하기 직전, 쇠망해 가는 문명이 마지막으로 내뿜은 잔광처럼 실레의 시대는 요염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 선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르누보라 칭해지는 사치스럽고 화사한 미적 경향이 풍미하고 있었다. 에곤 실레는 바로 이런 흐름을 한편으로 대표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배반한 상속자이자 일탈자인 화가다. 그의 스승인 클림트의 세계와 비교해 보라. 초기에는 클림트의 그림인지 실레의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그림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실레가 클림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후엔 클림트의 정반대에 서게 된다. 클림트의 ‘풍요로운 관능’과 대비되는 ‘헐벗은 관능’의 극점을 보여 준다. 그는 육체에 그 어떤 장식적 아름다움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살을 깎아 내고 깍아 내 뼈에 이르기 직전의 그 아슬아슬한 상태까지 몰고 간다. 그의 그림은 가장 관능적인 구도를 통해 관능의 슬픔과 가난함과 무의미함을 드러낸다. 공포가 느껴질 만큼 단순하여 내면이 적확히 들여다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므로 뼈만 남은 문장 같은 실레의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하나의 고통이다. 너무 단도직입적이기에 저항할 수조차 없다. 그림 속에서 그림 바깥의 감상자를 향해 던지고 있는 여인들의 도발적인 눈빛을 보라. 감출 수 없는 존재의 나신, 그 중심에 유난히 붉게 칠해진 성기를 보라. 그들은 온몸으로 세기 말 세기 초 빈의 화려한 아름다움이 숨기고 있는 허무와 불안을 증언하고 있다. 이따금 실레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인간인 나 자신의 내면을 타자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 문득 자기 자신의 심연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행복한 일인가 자문하게 된다. 실레의 그림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슬픔과 또 다른 덧없음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실레의 그림들은 말하고 있다. 모든 예술의 기초는 나라는 우주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를 질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를 지나 타자에게로 그 영향이 번져 간다.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면 좋을 어두운 욕망들, 언제나 도덕에서 일탈하고픈 속마음, 올바르고 정직한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비협조적이 되어 버리는 엇나감,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또 얼마나 연약한가. 어느 것에도 신뢰가 없어 늘 흔들리고 불안한 인간내면을 알게 되는 일. 그것이 행복과 무슨 상관인가. 그러므로 보통의 사람들은 인간이 지닌 그 이면을 낯선 것, 혹은 부도덕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린다. 그것을 피해서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레에겐 그 알고 싶지 않은 인간의 이면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고독한 세계를 이룬다. 고독이 지나쳐 음울하다. 그의 창조물들을 보는 일은 고통이다. 한결같이 빛이 아닌 어둠에 감싸여 있거나 쩍쩍 갈라지거나 비틀려 있거나 비상식적으로 엉겨붙어있다. 아름다워서 눈에 띄는 게 아니라 황폐해서 눈에 띄는 것이다. 인간에겐 자기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볼 뿐이다.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그 상처는 한껏 비틀린 실레의 그림과 닮았다. 실레의 손끝으로 창조해 낸 인간이란 존재들의 육체를 보라. 아직 사랑의 이름으로도 나의 폐허에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데 이미 실레가 다녀갔음을 알게 된다. 끔찍해서 혹은 공포스러워서 눈을 질끈 감게 되는 실레의 그림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비롯한 보편적 인간들이 겹겹으로 휘장을 둘러쳐 타자에겐 절대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심연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소스라칠 일이다. 앙상한 채로 움푹 팬 눈을 하고 응시하고 있는 내 눈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을 듯이 서 있거나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는 누가 나를 빤히 보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기분이 나쁘기까지 하다. 아무려나. 실레의 인물들은 ‘이래도 인간의 육체가 아름답다고 할거요?’하는 질문을 메마른 눈동자에 담고 있다. 질책이나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 앞에서 이마를 찌푸리면 ‘당신이라고 예외겠어?’하고 반문한다. 사랑의 행위를 하는 중에도 그 행위에 몰두하지 못하고 나를, 당신을 빤히 쳐다본다. 턱을 괴거나 뒤틀리거나 비비꼬인 채로. 마치 ‘인정하라, 이것이 인간이다’하며 구호를 외치는 듯이. 이러니 실레를 생각하기 전에 내 무의식이 미리 빈의 미술관에서 본 그 유유한 걸음걸이의 커다란 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을 대비시켜 실레의 그림들이 끈질기게 말하고자 하는 황폐함을 피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폐허와 풍요가 공존하는 풍경 모르긴 해도 실레는 수줍고 연약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을 표출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방어할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비틀어 버리는 충격을 통과해 가면 이윽고 어루만지는 것 같은 그의 드로잉이 물처럼 출렁거린다. 때로 그는 나무를 그리기도 했다. 실레의 눈에 포착된 나무들은 자연친화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정한 나무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다. 〈울타리 저편의 앙상한 나무〉, 〈돌풍속의 가을나무〉는 마치 번개 맞은 것처럼 균열이 일고 있다. 대지가 아니라 실레의 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균열은 당연한 것일까. 그러나 노을을 등지고 있는 〈네 그루의 나무〉 속의 나무들을 보라. 100년 전의 노을과 50년 전의 노을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노을이 모여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은 배경에 구릉 위의 나무들은 천상과 닿아 있다. 하늘과 나무와 대지가 인간의 육체처럼 구불구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실레의 선이다. 하늘과 구릉과 나무줄기들을 손을 떼지 않고 그린 것같이 연결시켜 놓았다. 어둠과 빛이, 폐허와 풍요가 한자리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형국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집은 서향이었다. 해질녘이면 진홍빛 노을이 방문 앞 마루까지 밀려들곤 했다. 나는 노을을 양수처럼 느꼈다. 어머니 뱃속이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가을날, 운동회 연습을 마치고 10리쯤 되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빈집을 가득 에워싼 노을이 어린 나를 맞아주었다. 노을이 비춰 드는 그 집의 마루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곤 했다. 카뮈의 말을 빌리면 한 인간에게 어린 시절의 각인된 한 순간은 그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내겐 노을이 그러했다. 훗날 성인이 되어서도 창가로 노을빛이 어른거리면 그때까지 혼란해져 있던 정신이 수습되고 온화해지곤 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찰나의 빛은 곧 소멸해 버린다. 그 소멸의 자리에 예술이 있다. 찬란하지만 곧 사라져 버리기에 그 순간을 기억하여 불멸화시켜놓는 것이 예술이기도 한 것이다. 어린 시절에나 지금이나 노을이 비치는 순간은 금세 사라졌다. 곧 어둠이 내리는 것이다. 빈으로 이주한 이후에 실레가 그린 풍경화 중에 〈지는 해〉라는 작품이 있다. 내가 경험한 노을과는 정반대의 노을이 그의 〈지는 해〉 속에 담겨있다. 실레의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뢰슬러 레오폴트는 “이 노을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라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말을 하고 나면 곧 덧없어진다. 설명하려하면 할수록 설명해야 하는 그것은 더 멀찍이 달아나고 없다. 그런 덧없음 속에서도 그는 다시 덧붙였다. “해는 지고 있다. 전경은 벌써 춥고 어둡고, 나뭇잎은 추워서 모두 뻣뻣해졌다. 그렇게도 우울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렇게 떨어지는 해가 과연 다시 떠오를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실레의 〈지는 해〉 속의 나무들은 벌써 노을이 사라지기 전에 이미 어둠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해는 지고 나면 다음날 다시 떠오르지만 실레의 지는 해는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심하고 예민하고 때때로 조울증 환자처럼 득의만만하기도 했던 실레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둠에 뿌리를 내린 나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실레는 이미 아주 어린 시절부터 28세에 독감으로 죽을 자신의 운명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고도 느껴진다. 그리하여 기필코 폭풍처럼 몰아치는 불안과 덧없음을 인간이면 누구라도 드러내 놓기 두려워하거나 피해 가는 상처와 치부를 집요하게 비틀어 놓는 데 몰두했을 것이다. 짧은 생애이기에 더욱더 눈을 빤히 뜨고 얼핏 아름다움의 저편에 있는 것 같은 실레의 세계를 표현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타자들은 관능을 직시하거나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이라도 정직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 -------------------------------------------------------------------------------- 신경숙은 196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겨울우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풍금이 있던 자리(1993), 오래전 집을 떠날 때(1996), 딸기밭(2000)이 있으며 장편소설 깊은 슬픔(1994). 외딴방(1995), 기차는 7시에 떠나네(1999)와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1995) 등이 있다. 제40회 현대문학상(1995), 제28회 동인문학상(1997), 제25회 이상문학상(2001)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